은비녀 아래 진실
20화
의금부 서리 숙소의 촛불은 꺼져 있었다.
해시 말, 복도 석등의 희미한 빛이 창호지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 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먹물이 마른 벼루, 가지런히 정리된 붓걸이, 그리고 비어 있는 서류함 하나.
문이 열렸다.
경첩 소리는 나지 않았다. 미리 기름을 쳐둔 듯 부드럽게 밀렸다. 장내관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 작은 초롱을 들고 있었다. 불빛이 좁은 방을 훑었다.
그는 책상 앞에 섰다. 초롱을 들어 올렸다.
서류함을 열었다. 텅 비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류함을 닫고, 책상 아래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빈 약봉지와 묵은 붓촉 두어 개. 두 번째 서랍. 검시 기록 초본 몇 장.
장내관이 서랍에서 종이들을 꺼내 불빛에 비췄다. 한 장씩 넘겼다. 필적을 살피는 듯 손가락이 글자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세 번째 장을 넘기려는 순간, 방 안쪽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병풍 뒤에서 심수련이 걸어 나왔다.
장내관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초롱 불빛이 심수련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비추었다. 옅은 호박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고양이처럼 반짝였다.
“이 밤에 무슨 일이시옵니까.”
심수련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정중했다. 마치 최상궁 시절 상전에게 올리던 말투 그대로였다.
장내관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랍에서 손을 뗐다. 종이들이 다시 제자리로 밀려 들어갔다.
“심상궁이야말로, 이 시각에 의금부 서리 숙소에는 무슨 일이시오.”
“먼저 대답하심이 순서일 듯하옵니다.”
심수련이 한 걸음 다가섰다. 치맛자락이 바닥을 쓸었으나 소리는 없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초롱 불빛에 드러났다. 변색된 손가락 끝이 누렇게 말라 있었다.
“이곳은 폐비 사건 관련 증인으로서 오후부터 의금부의 협조 요청을 받아 머물던 처소이옵니다.”
장내관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전 들어본 바 없소.”
“기록고 장내관께 일일이 보고드려야 할 사안은 아니온 듯하나……”
심수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웃는데도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의금부 경력 나으리의 직인이 찍힌 협조 공문이 필요하시다면 내일 아침 기록고로 보내드리겠사옵니다.”
장내관이 서서히 몸을 바로 세웠다. 손에 든 종이들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정확히 원래 있던 위치였다.
“늦은 시각 실례했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시선은 방 안을 한 번 더 훑었다. 비어 있는 서류함. 가지런한 붓걸이. 그리고 심수련이 방금 걸어 나온 병풍 뒤 공간.
“그런데……”
장내관이 문 쪽으로 향하다 발을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이 방을 쓰던 서리는 지금 어디 있소.”
심수련이 대답하기까지 한 호흡이 걸렸다.
“모르는 일이옵니다. 제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비어 있었사옵니다.”
장내관이 문지방을 넘었다. 복도로 나서면서 낮게 한 마디를 남겼다.
“밤이 깊었소. 심상궁도 쉬시는 편이 좋겠소.”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심수련은 움직이지 않았다. 복도의 석등 불빛이 창호지를 통해 장내관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침묵이 돌아왔다. 그제야 심수련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장내관이 만진 서랍을 다시 열었다. 검시 기록 초본을 한 장씩 정리했다. 빈 약봉지와 붓촉은 남겨두었다.
서류함에 손을 넣었다. 바닥에 끼어 있던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서화연이 남긴 폐비 편지의 일부였다. 약재 이름이 적힌 쪽지.
심수련은 그것을 소매 안으로 접어 넣었다. 서류함을 닫았다.
책상 모서리에 손을 짚고 잠시 숨을 골랐다. 손가락 끝의 변색된 자국이 창호지 너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녀는 촛불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병풍 뒤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치맛자락이 이번에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윤공의 사가 서재는 자시가 되어서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현은 문지방을 넘자마자 공기부터 달랐다. 평소의 윤공이라면 탁자 너머에서 차를 권했을 터였다. 지금은 등잔 하나만 켜둔 어둑한 방 한가운데 서서, 등을 보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 닫아라.”
이현이 문을 닫았다. 빗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윤공이 몸을 돌리지도 않고 물었다.
“네 서리가 사라졌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동트기 전에 체포하기로 한 자가, 네 사가 뒷문 쪽 골목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다.” 윤공이 천천히 돌아섰다. 등잔 불빛에 반쯤 가려진 얼굴이었다. “네가 놓아준 것이냐.”
짧은 침묵.
“증거가 없으니 체포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증거.” 윤공의 입가가 비틀렸다. “대비전 마마께서 직접 발부하신 밀지 앞에서, 네가 증거를 논하느냐.”
이현은 허리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관복 소매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단순한 하급 서리가 아닙니다.”
“뭐냐.”
“산대청 별감 독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유일한 단서를 쥔 자입니다. 그를 잃으면 사건은 영원히 묻힙니다.”
윤공이 한 걸음 다가왔다. 바닥을 긁는 발소리.
“네가 은닉한 목격 기록을 내가 왜 몰랐겠느냐.”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최상궁이 은비녀를 꽂고 폐비의 거처로 향하는 장면이 기록된 청원지. 네가 그 문서를 발췌본에서 뺀 것도, 그 서리에게 전체를 보여주지 않은 것도.” 윤공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다 알고 있었네.”
“……그렇다면.”
“그러니 아직 네 목이 붙어 있는 거다.”
등잔의 심지가 타닥거렸다. 기름이 부족해 불꽃이 일렁였다.
윤공이 이현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등잔의 심지를 돋웠다. 불빛이 커지며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웠다.
“7년 전, 눈 쌓인 감옥에서 네가 죽어가던 밤. 내가 널 끌어냈다.”
이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네 출생을 감싼 것도, 네 죄목을 정직으로 낮춘 것도 나였다. 네가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지.”
윤공의 손이 이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나는 지금도 너를 구할 수 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관복 사이로 뼈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서리를 포기해야 한다.”
이현은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윤공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어두운 회색 빛깔이 등잔 불빛에 닿아 은은하게 돌았다.
“서리를 찾는 것이 의금부 검율의 본분입니다.”
“본분.”
“진실을 바로잡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윤공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네가 하는 일은 내가 정한다.”
한 박자 느리게, 이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윤공께서 의금부 경력을 구하신 것도, 그 본분을 다하라 함이 아니었습니까.”
윤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잔 불빛이 그의 깊은 주름 사이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네 출생을 내가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 말만 남겼다.
“그 출생이 문제가 된다면, 의금부 경력의 관복도, 검율로서의 권한도, 네가 쥔 그 어떤 기록도 한 줌 재가 될 것이다.”
윤공이 물러서며 등을 돌렸다.
“가라. 내일 아침까지 답을 듣겠다.”
이현은 허리를 굽혀 묵례를 올렸다. 예를 갖춘 인사였지만, 예보다 한 호흡 길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밤공기가 관복 깃으로 스며들었다. 왼쪽 옆구리에서 둔중한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비는 그쳤지만 통증은 그치지 않았다.
이현은 복도에 잠시 멈춰 섰다. 등 뒤로 윤공의 서재 불빛이 창호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옆구리를 짚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 검지를 천천히 접었다 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윤공의 사가 대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빗장 걸리는 쇠소리가 빗소리보다 날카로웠다.
이현은 골목길로 세 걸음 나섰다. 발이 멈췄다. 왼쪽 옆구리, 갈비뼈 바로 아래서 둔중한 통증이 올라왔다. 숨을 짧게 들이켰다.
비단 주머니를 품에서 꺼냈다. 손가락 끝으로 작은 환을 하나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에 퍼졌다.
검흔이 왜 지금.
이현은 벽에 손을 짚었다. 축시의 골목길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 비는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했고, 습기가 옛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통증은 예전보다 깊었다. 살점이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가 파고드는 느낌.
그가 손을 거두자 골목길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났다.
낮은 등급의 은비녀를 꽂은 하급 궁녀 한 명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이현 앞에서 묵례했다. 얼굴을 들지 않았다.
“심상궁님의 전언이옵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궁녀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장내관께서 업서리의 거처를 뒤지셨소이다.”
이현의 눈빛이 굳었다.
“서리가 돌아오실 때까지, 증거를 지키셔야 합니다.”
궁녀는 전언을 끝내자마자 뒤로 물러섰다.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발소리는 세 걸음 만에 들리지 않았다.
이현은 골목길에 혼자 남았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옆구리를 눌렀다.
장내관이 벌써 움직였다. 서화연의 거처를 뒤졌다는 것은 그의 부재를 공식화하겠다는 의도다. 의금부 내부에서 서화연의 흔적을 찾는 움직임이 시작되면, 대비전의 체포 밀지는 더 이상 연기할 명분을 갖지 못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았다. 의금부 문서고의 기록 정리 명목으로 하급 서리 두 명을 다른 건으로 돌릴 수 있다. 장내관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면, 그가 감시 중인 기록고가 아니라 집무실 기록 쪽에 문제를 만들어야 한다.
발걸음을 의금부 쪽으로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의금부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네댓 명의 장화가 자갈을 밟는 소리.
“서리 업서화의 거처를 다시 수색하라!”
장내관의 목소리였다. 굵고 다급했다. 쇠북을 두드리는 듯한 외침이 골목을 타고 번졌다.
“모든 소지품을 기록고로 옮기고, 발견 즉시 나리께 보고하라!”
발소리가 흩어졌다. 하급 관리들이 뛰는 소리.
이현은 손을 옆구리에서 떼었다. 손가락 끝이 아직 저렸다. 비단 주머니를 다시 품 깊숙이 밀어 넣고, 허리띠를 고쳐 맸다.
그의 흔적을 지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골목길을 가로질러 의금부 후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장내관이 서화연의 거처로 몰려가 있는 지금, 집무실 쪽은 비어 있을 것이다. 기록 정리 명목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반 각. 그 안에 서화연이 드나든 흔적을 감추고, 심수련의 전령이 남긴 실마리를 지워야 한다.
이현의 걸음이 빨라졌다. 옆구리 통증이 발걸음에 맞춰 욱신거렸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