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21화

이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장내관의 고함이 등 뒤에서 멀어지자, 골목길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의금부 후문 앞 초석에는 등불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자정 무렵엔 늘 그랬다. 문지기조차 취침에 든 시각.

그는 품속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집무실 전용이다. 차갑게 식은 놋쇠가 손바닥에 눌렸다. 옆구리 통증이 숨을 들이킬 때마다 욱신거렸지만,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그는 잠시 멈춰 섰다. 발소리는 없었다. 순찰조는 기록고 쪽에 배치된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먹물과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현은 촛불을 켜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달빛만으로도 서가의 윤곽은 충분했다.

왼쪽 벽면. 서리들의 출입 기록이 꽂힌 함.

그의 손이 서가를 훑었다. 을미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네 번째 칸. 서화연의 이름이 적힌 출입부가 모서리만 내민 채 꽂혀 있었다.

이거다.

이현은 출입부를 뽑았다. 종이 묶음 사이에 끼워진 얇은 기록지들. 그는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서화연이 산대청 별감 사건 관련 열람을 신청한 날짜들. 규장각 출입 전표 사본도 함께 있었다.

그가 그것들을 한 장씩 뽑아내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리.”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도 또렷했다.

이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심수련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치마는 발소리를 삼킨 듯 고요했다. 왼쪽 옷깃 안쪽에 은비녀 하나가 달빛을 받아 짧게 빛났다.

“그 기록을 빼내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심수련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지나치게 공손했다.

“장내관이 벌써 서리 업서화의 거처를 뒤졌습니다. 집무실 출입부는 그가 가장 먼저 찾을 차례옵니다.”

이현은 손에 쥔 기록을 내려놓지 않았다. 손가락이 종이 가장자리를 더 세게 눌렀다.

“……내가 알 바 아니오.”

“아시고 계실 터이옵니다.”

심수련이 한 걸음 다가왔다. 달빛이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를 스치자, 웃음기 없는 눈이 더 선명해졌다.

“나리께서는 지금 서리 업서화의 흔적을 지우고 계시오. 허나 그걸로는 늦습니다. 대비전의 밀지는 이미 발부되었사옵니다. 장내관의 수색은 명분 쌓기에 불과하옵니다.”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심상궁께서 이런 일에 관여하실 이유가 없소.”

“관여라 하시기에는.”

심수련의 손가락이 허리춤 약주머니를 살짝 쓸었다.

“소인이 바라는 바는 나리께서 그 서리를 지키시는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옵니다.”

“방법이라면.”

심수련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는 작은 전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내명부 발행. 야간 직무 중 출입을 허가하는 전표였다.

“그 서리가 지금 안전한 곳에 있사옵니다. 내명부 깊숙한 곳이옵니다. 나리께서는 이곳에서 기록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내일 아침, 장내관이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옵니다.”

이현은 전표를 내려다보았다. 내명부 서화각 소속 최상궁의 명의로 발행된 것이었다.

“심상궁께서 업서리를 내명부에 숨기셨소.”

“숨긴 것이 아니옵니다.”

심수련이 전표를 이현 쪽으로 밀었다.

“볼 일이 있어 부른 것이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부딪혔다. 이현은 심수련의 눈에서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7년 전 폐비 사건 당시에도 저 눈으로 침묵을 지켰을 것이다. 증언하지 않음으로써 살아남고, 침묵을 무기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온 여자다.

“무슨 볼 일이오.”

이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건 소인이 서리 업서화에게 전할 말씀이옵니다.”

심수련은 한 걸음 물러섰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 반을 가렸다.

“시간이 없사옵니다, 나리. 장내관이 곧 이곳으로 올 것이옵니다. 출입부는 소인에게 맡기십시오.”

이현은 손에 쥔 기록을 내려다보았다. 서화연의 출입 흔적. 장내관이 이것을 입수하면 서화연이 의금부 기록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다는 증거가 된다. 대비전에 유리한 정황이 하나 더 쌓이는 셈이었다.

그의 흔적을 지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바닥나고 있었다.

이현은 출입부를 건넸다. 심수련이 그것을 받아 품에 넣었다. 종이 한 장 구겨지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입니다.”

이현은 허리띠를 고쳐 매며 낮게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그가 무사히 돌아오지 않으면, 심상궁께서는 대비전과 의금부 양쪽에 적을 두는 셈이오.”

“걱정 마시옵소서.”

심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그린 듯 정확한 예의였다.

“소인은 이미 오래전에 적을 두는 법을 익혔사옵니다.”

그녀가 뒤돌아서자 치마 밑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둠에 삼켜지듯 그녀의 뒷모습은 빠르게 희미해졌다.

이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옆구리의 통증이 다시 밀려왔다. 그는 품속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작은 환약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를 감쌌다.

장내관의 발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현은 서가를 제자리로 정리하고, 집무실 후문으로 빠져나갔다.

등불 하나 꺼뜨리지 않은 채.

연희당 후원의 담장은 수리된 지 오래였다.

자시가 지난 시각, 서화연은 담벼락 아래 쭈그리고 앉아 숨을 골랐다. 심수련이 알려준 대로라면, 이 부근 담장 아래쪽 벽돌 세 개가 헐거웠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자, 이끼 낀 돌 틈이 만져졌다. 손가락으로 밀자 벽돌이 안쪽으로 살짝 밀려났다.

야간 순찰 교대 시간. 경수소 기록에 따르면 자시 2각에 순찰조가 연희당 후원을 지나고, 다음 순찰은 축시 초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이 반 각이 채 안 되는 틈. 서화연은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돌에 어깨가 끼었다. 숨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왼쪽으로 돌리자 천천히 빠져나갔다. 자갈밭에 내려서는 순간, 발뒤꿈치가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딱 하는 소리.

서화연은 몸을 굳혔다.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뿐이었다.

심수련의 약봉투 속 쪽지에는 내명부 후원까지 가는 경로가 세세히 그려져 있었다. 폐비의 옛 거처를 끼고 서북쪽으로 꺾어, 내명부와 규장각을 잇는 오래된 통로를 지나도록 표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궁인들이 잊은 길이었다.

그녀는 벽에 등을 붙이고 움직였다. 걸음마다 자갈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끝으로 디뎠다. 연희당의 버려진 전각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문풍지를 울렸다. 썩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7년 전, 이곳에 폐비가 갇혀 있었다. 서화연은 멈춰 서서 전각의 검은 창을 올려다보았다.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폐비는 이 창문으로 달을 보았을까. 혹은 매일 밤 등불도 없이 어둠만 바라보았을까.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왼쪽 옷깃 안쪽으로 갔다. 옷 속에 숨긴 진짜 은비녀는 이미 대비전으로 옮겨진 뒤였다. 지금 그녀의 옷깃에는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았다.

서화연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명부 후원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등불 하나 희미하게 걸린 후문 앞, 심수련이 미리 말해둔 표지석이 보였다. 세 번째 돌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왼쪽 측면을 누르면, 작은 쪽문이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돌을 누르자 소리 없이 문이 안쪽으로 밀렸다.

어둠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서화연은 비명을 삼켰다.

“이쪽이옵니다.”

심수련의 목소리였다. 어린 소녀 같은 음색이 오히려 서늘하게 귀를 감쌌다.

심수련은 서화연의 손목을 잡은 채 좁은 통로로 그녀를 이끌었다. 통로는 내명부 깊숙한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양쪽 벽에는 용뇌향의 옅은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지밀상궁의 집무실로 쓰였던 작은 밀실이었다. 심수련이 은퇴한 뒤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방. 그러나 먼지 한 점 없이 정리된 책상과 서가가 그녀가 지금도 이곳을 드나들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심수련은 촛불 하나를 켰다. 불빛이 밀실의 사방을 밝혔다.

서화연은 숨을 들이켰다.

서가 한가운데, 붉은 비단으로 덮인 작은 함이 놓여 있었다. 비단의 색은 세월에 바랬으나, 테두리에 수놓인 모란 무늬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폐비 서씨의 문양.

심수련은 비단을 걷어 냈다. 함 안에는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청동으로 만든 낡은 인장 하나. 그리고 종이 묶음 한 첩.

“보시옵소서.”

심수련은 종이 묶음을 들어 서화연 앞에 내밀었다.

서화연은 두 손으로 받았다. 손끝이 떨렸다. 종이는 바랬지만 먹물의 자국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첫 페이지. 폐비의 친필이었다.

갑술년 구월 보름. 오늘 대비전에서 약재 반출 전표를 열람하라 하셨으나, 그중 은엽초 이중 인장이 없는 건이 있었다. 윤의관에게 확인하라 일렀다.

서화연은 숨을 멈추었다. 폐비의 비망록이었다. 사건 당시의 일을 직접 기록한 것.

“이것은…….”

“폐비마마께서 친히 남기신 비망록이옵니다.”

심수련이 인장을 집어 들었다. 손등의 화상 자국이 촛불에 비쳤다.

“그리고 이것은 소인이 지밀상궁으로 있던 시절 사용하던 인장이옵니다.”

그녀는 인장을 뒤집어 서화연에게 보여 주었다. 청동 바닥면에는 ‘지밀상궁 심씨’라는 글자가 반대로 새겨져 있었다.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호박색 눈동자는 웃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그 안에 울음의 자국 같은 것이 어렸다.

“심상궁께서는.”

“소인은 폐비마마의 지밀상궁이었소이다.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자.”

심수련이 인장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흰 손가락이 함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변색된 검지와 중지 끝이 촛불 아래에서 누렇게 말라 보였다.

“7년 전 그날 밤, 소인은 마마의 마지막 분부를 받들었습니다.”

서화연은 비망록을 가슴에 안았다. 종이에서 용뇌향의 옅은 향이 올라왔다. 내명부 상궁 이상만 쓰는 전용 먹의 냄새였다.

“마지막 분부라 하시면.”

“은비녀에 관한 일이었소이다.”

심수련은 비망록 위로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끝이 서화연의 손가락에 닿았다.

“마마께서는 사약을 받기 직전, 지밀상궁인 소인에게 은비녀 하나를 건네셨소이다. 그리고 이르셨소. ‘이 안에 진실을 새겼으니, 반드시 살아서 전하라’고.”

서화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망록의 표지가 구겨지려 하다가 멈췄다.

“진실이라면…… 폐비 사건의?”

“그보다 더 큰 진실이옵니다.”

심수련이 물러서며 촛불의 심지를 돋웠다. 불꽃이 커지자 밀실의 벽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은비녀의 안쪽 면에는 폐비마마께서 직접 각인을 새기셨소이다. 청원지와 같은 이치옵니다. 한 번 새긴 각인은 지울 수 없고, 위조하려 들면 은의 결이 갈라집니다. 그 안에 새겨진 것은……”

심수련은 말을 끊고 서화연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대비전이 7년 동안 숨겨 온 한 가지 사실이옵니다. 대비마마께서 가장 두려워하시는 진실이옵니다.”

서화연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갔다. 손에 쥔 비망록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 은비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대비전 깊숙한 곳이옵니다.”

심수련의 눈빛이 흔들렸다. 촛불의 탓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서화각 별실 서가 뒤쪽. 촉탁 도장이 찍힌 비단 보자기 안에 은닉되어 있소이다. 그러나 주의하셔야 합니다. 대비마마께서는 이미 그 자리에 함정을 파 두셨소. 가짜 은비녀를 같은 곳에 보관하고, 찾는 자를 역으로 잡아들이려는 계획이 이미 서 있소.”

서화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상궁께서 그걸 어떻게 아시오.”

심수련은 잠시 침묵했다. 변색된 손가락이 약주머니의 끈을 쓸었다.

“소인은 대비전에서 오래 일했사옵니다. 상궁들의 입에서 오가는 말을 듣고, 때로는 그들이 모르는 것을 보기도 했소.”

그녀가 촛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얼굴에 불꽃의 그림자가 떨어졌다.

“그리고 진짜 은비녀의 각인을…… 소인 자신이 한 번 보았사옵니다.”

서화연의 숨이 탁 막혔다. 심수련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리라는 침묵이었다.

“왜 하필 지금 저에게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오.”

서화연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손에 쥔 비망록을 내려놓으려다, 도로 끌어안았다.

“7년 동안 숨기고 계셨을 터. 지금 와서 꺼내신 이유가 무엇이오.”

심수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웃지 않는 눈이 서화연을 바라보았다.

“진실을 기록할 자격이 있는 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옵니다.”

서화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심수련은 그 반응을 보면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단지 촛불이 한 번 흔들렸다.

“무슨 뜻이오.”

“아직은 알 수 없사옵니다.”

심수련이 책상 위 약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자색 끈이 손등을 감았다.

“다만 소인이 아는 것은, 당신께서 의금부에 들게 된 것이 누군가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옵니다. 그리고 폐비마마께서 생전에 ‘언젠가 진실을 기록할 자가 찾아올 것’이라 말씀하셨소.”

서화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금부 채용 기록의 빈칸. 특별 추천서의 발신인 미상.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심수련은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대신, 작은 약봉투 하나를 들어 서화연에게 건넸다.

“이것을 받으시옵소서.”

서화연은 약봉투를 받아 품에 넣었다. 심수련의 약주머니와 똑같은 자색 끈이 달려 있었다.

“그건 나중에 필요하실 때 열어보십시오. 지금은 아니옵니다.”

“지금은 아니라면.”

“대비전 잠입 바로 전이 되실 때.”

심수련은 촛불을 한 번에 불어 껐다. 밀실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그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축시가 지나기 전에 담장을 넘으십시오. 그 후로는 순찰 경로가 바뀝니다.”

서화연은 비망록을 내려놓았다. 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붉은 비단의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심상궁께서는.”

“……말씀하시옵소서.”

“폐비마마의 은비녀를 대비전에 넘기신 적이 있소.”

어둠 속에서 심수련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화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심수련의 침묵은 그 자체로 답이었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돌아가겠소.”

서화연이 함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밀실의 출구를 찾았다.

심수련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짚었다. 화상 자국이 있는 손가락이 의외로 단단하게 팔뚝을 감쌌다.

“부디.”

심수련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은 음색을 잃었다.

“폐비마마의 진실을 찾아 주시옵소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화연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심수련의 손등을 한 번 가볍게 쥐었다. 마디진 손가락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통로로 걸어 나갔다.

인시가 가까워질 무렵, 동녘 하늘이 아직 검푸른 채로 잠겨 있을 때였다.

서화연은 똑같은 길을 거슬러 연희당 담장을 넘었다. 두 번째 통과는 더 빨랐다. 몸이 통로를 기억한 탓이었다. 내명부 후원에서 연희당 후원까지. 담장 틈새를 지나 궁 밖으로.

인적 없는 민가 골목길을 몇 번 꺾자, 다 쓰러져 가는 빈집 한 채가 보였다. 심수련이 알려준 은신처 중 하나였다. 문짝은 기울었지만, 안쪽 방 한 칸은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바닥에 깔린 멍석은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서화연은 그 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숨이 차올랐다. 달리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뛰었다.

품속에서 약봉투가 눌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심수련이 마지막에 건넨 봉투. 자색 끈을 풀어 안을 확인했다.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서화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폈다.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심수련이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대비전 서화각 내부의 세부 구조도. 서가와 별실의 배치, 순찰조가 지나가는 경로, 그리고.

붉은 점 하나가 찍힌 자리.

비단 보자기와 가짜 은비녀가 놓인 서랍. 그 서랍보다 한 칸 더 깊숙한 곳에, ‘진품’이라고 작게 적힌 글씨가 옅은 먹물로 써 있었다. 글씨는 심수련의 필체가 아니었다. 더 오래되고, 더 날카로운 획이었다.

폐비마마의 글씨인가.

서화연은 종이를 접어 품에 도로 넣었다. 손끝이 저렸다. 촛불을 켤 수 없는 방 안에서, 그녀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대비전이다.

마음속에서 세 글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비전 서화각. 가짜 은비녀와 진짜 은비녀. 함정과 진실이 같은 장소에 숨겨져 있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서화연은 멍석 위에 등을 기대고 천장의 갈라진 나뭇결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눈은 잠들지 않았다.

서화연은 숨을 들이켰다.

서가 한가운데, 붉은 비단으로 덮인 작은 함이 놓여 있었다. 비단의 색은 세월에 바랬으나, 테두리에 수놓인 모란 무늬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폐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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