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22화

서화연은 멍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끝에 닿은 약봉투를 품속 깊이 밀어넣고, 허리띠 주머니에서 심수련의 지도를 꺼내들었다. 어둠에 길든 눈으로 배수로 쪽을 가늠했다.

대비전 후원 담장까지 반 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갈라진 돌틈 사이로 낡은 배수로 입구가 입을 벌렸다. 몸을 낮추면 어깨가 닿을 듯 좁았다. 서화연은 숨을 짧게 들이마신 뒤,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돌바닥에 손바닥이 달라붙었다. 흙내와 썩은 낙엽 냄새가 뒤섞여 길게 숨 쉴 수 없었다. 그녀는 팔꿈치로 몸을 밀어 앞으로 나아갔다. 진흙이 옷자락을 적셔도 속도는 늦추지 않았다.

출구에 닿자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서화각 후원이었다. 지도에 적힌 대로, 배수로는 후문에서 동쪽으로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끝났다. 후문 앞엔 등불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야간 순찰 3차 교대 시각. 경수소 기록대로 축시 말에서 인시 초까지, 서화각 후원 순찰은 잠시 붕 떴다.

서화연은 담장 그림자에 몸을 녹였다.

뒤꿈치를 든 채 후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살폈다. 지도대로라면 안쪽 빗장이 걸리지 않는 문이었다. 문짝에 손바닥을 대고 밀자, 경첩이 가볍게 신음했지만 그 소리는 바람에 묻혔다.

서화각 안은 고요했다.

대청마루를 피해 오른쪽 복도로 접어들자, 심수련이 표시한 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비의 서재를 겸한 공간. 문 앞에 멈춰 선 서화연은 숨을 가다듬었다.

문틈 너머를 들여다봤다. 안은 비어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든다.

서가가 벽면을 가득 메웠다. 용뇌향 섞인 먹 냄새가 희미하게 공기를 맴돌았다. 서화연은 서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지도에 찍힌 붉은 점. 아래에서 세 번째 서랍.

손잡이를 쥐자 차가운 쇠붙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천천히 당기자, 비단 보자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색 바탕에 금실 모란 무늬. 폐비의 유품이 아닌, 대비전에서만 사용하는 양식이었다.

보자기를 집어 들자 손가락 끝으로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풀어헤치니 은비녀 한 점이 드러났다.

서화연은 그것을 들어 올렸다. 달빛 한 점 닿지 않는 방 안에서도 은의 광택은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비녀 머리 문양을 더듬자 연꽃이 새겨져 있었다. 폐비를 상징하는 봉황이 아니었다.

순도도 달랐다.

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내 비녀 끝을 문질렀다. 이현에게 전수받은 방식이었다. 천에 남은 자국은 옅은 회색에 그쳤다. 진품이라면 더 깊은 흔적이 남아야 했다.

가짜다.

심수련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대비전은 진품 곁에 반드시 모조품을 두어, 찾는 자를 덫으로 삼는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서화연은 비녀를 보자기 위에 내려놓으려다 멈칫했다. 서랍 안쪽에 걸리는 시선. 접힌 종이 한 장이 바닥에서 살짝 밀려나와 있었다. 청원지 특유의 엷은 청색 기름기가 끝자락에 번져 있었다.

종이를 집으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

서화연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손에 쥔 비녀를 다시 보자기 위에 올리고, 서랍을 천천히 밀어넣었다. 소리는 서가 뒤편에서 멎었지만, 그림자가 한 뼘 더 가까워졌다.

누군가 서 있다.

서가 너머, 별실과 대청을 잇는 협문 앞. 어둠 속에서 실루엣이 드러났다. 최상궁 복장. 왼쪽 옷깃에 꽂힌 은비녀가 희미한 윤곽을 그었다.

서화연은 숨을 죽였다.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가를 사이에 두고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들어 협문 기둥에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기다리는 태세였다.

누군가 올 줄 알았다는 뜻이다.

서화연의 시선이 서랍 안쪽으로 되돌아갔다. 청원지 쪽지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펼치지 않아도, 붉은 먹의 잔상으로 세 글자가 읽혔다.

업서화.

함정이었다. 은비녀는 미끼, 쪽지는 신원을 확인하는 덫. 서화각 별실에 발을 들이는 자가 누구일지, 대비전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서화연은 종이를 집지 않았다. 두 걸음 뒤로 물러서 서가 옆면에 몸을 붙였다.

최상궁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발각된 것은 아니었다. 서가의 각도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서화연은 다시 손을 뻗어 서랍을 조용히 당겼다. 아까보다 한 치만 더 열렸다. 쪽지가 시야에 걸린 그대로. 그녀는 거기에 손대지 않고, 그 위를 덮은 얇은 비단 조각만 집어 들었다. 비녀를 쌌던 안감이었다.

코 가까이 가져가자, 용뇌향 없이 일반 먹 냄새만 났다. 청원지에 직접 쓴 게 아니라, 다른 종이에 먼저 적고 베낀 흔적이었다.

비단을 소매 안으로 밀어넣고 서랍을 닫았다.

최상궁이 발을 옮겼다. 서가 반대편 모서리 쪽으로 한 걸음.

서화연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서가 아래로 몸을 낮췄다. 발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는 동안, 그녀는 반대 방향으로 기어 별실 출입문으로 이동했다.

발소리가 멎었다. 최상궁이 서가 앞에 선 듯했다.

문고리를 잡았다. 바깥 복도는 여전히 어둡다. 문을 한 치만 열고 몸을 빼냈다.

별실 안에서 서랍이 열리는 소리. 최상궁이 확인하는 중이다. 쪽지가 그대로인지, 비녀를 건드렸는지.

서화연은 복도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내쉬었다.

서랍이 다시 닫혔다. 최상궁의 발소리가 협문 쪽으로 멀어졌다.

후문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소매 안에서 비단 조각이 손목을 감쌌다. 가짜 은비녀, 서랍 속 청원지 쪽지, 서가 뒤에서 기다리던 최상궁. 대비전은 덫을 완벽하게 준비해두고 사냥감을 기다렸다.

후문을 지나 배수로 입구로 몸을 숙인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배수로를 빠져나와 담장을 넘고 나서야, 서화연은 처음으로 제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비전 후원 서쪽 담장 아래, 배수로 철개 안쪽.

석축 틈에서 스며나온 물기가 발목을 적셨다. 서화연은 숨을 죽인 채 어둠 속을 기었다. 머리 위로 군화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횃불이 철개 틈 사이로 한 줄기씩 번졌다 사라졌다.

대비전 내부는 완전한 경계 태세였다. 명령을 외치는 목소리, 달려가는 발소리, 빗장 걸리는 소리가 차례로 겹쳐졌다.

팔꿈치로 기어 배수로 분기점에 닿자, 왼쪽은 동궁 방향, 오른쪽은 후원 연못으로 이어졌다.

서화연은 서랍을 밀어 닫았다. 손끝에 남은 차가운 금속 감촉을 접어 주먹을 쥐었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 굽 낮은 신이 석판을 밟았다. 한 박자, 둘. 멎었다.

“누구냐.”

여자의 목소리. 늙지도 젊지도 않은, 훈련된 음성이었다.

서화연은 숨을 멈췄다. 등 뒤로 서가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손가락이 품속 약봉투를 눌렀다. 심수련의 지도에 표시된 배수로 입구는 바로 이 서가에서 세 걸음 뒤.

“서화각에 지금——”

최상궁의 목소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촛불 그림자가 복도 바닥을 쓸었다. 서화연은 허리를 낮췄다.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배수로 철개 쪽으로 기었다. 철제 덮개는 녹슬었지만, 손잡이엔 기름칠이 돼 있었다. 심수련이 미리 손을 쓴 흔적이었다.

덮개를 들어 올리자 쇠가 돌에 긁혔다. 가느다란 마찰음.

“거기——!”

최상궁의 외침이 복도를 갈랐다. 서화연은 곧장 배수로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철개가 닫히기 직전, 촛불이 서가를 쓸었다. 빛이 닿기 전에 덮개가 제자리로 떨어졌다.

어둠. 젖은 돌냄새. 발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배관을 타고 울렸다.

서화연은 무릎으로 기었다. 배수로 폭은 어깨에 간신히 닿을 정도. 이끼 낀 돌바닥이 손바닥에 미끄러웠다. 심수련의 지도대로라면 서른 걸음 앞, 외곽 담장 아래 배출구가 있다.

뒤에서 철개가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발소리가 두 사람이었다.

“경비병을 부르시오. 서화각에 침입자——”

목소리가 멀어졌다. 서화연은 속도를 높였다. 무릎이 돌에 부딪혀 욱신거렸다.

오른손으로 배출구 쪽을 더듬자 철창이 닿았다. 좁았다. 어깨를 비틀어 통과했다.

바깥 공기가 얼굴에 밀려들었다. 풀내, 흙내. 담장 밖 후원의 버드나무 그림자가 달빛 아래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배수로 건너편, 대비전 외곽 담장 쪽에서 불꽃이 솟았다. 처음에는 횃불 하나 크기. 이내 마른 덩굴을 타고 담장 하단으로 번졌다. 연기가 검게 올랐다.

“발화다!”

“뒷담 쪽에 불이야——!”

경비병들의 고함이 방향을 틀었다. 발소리가 배수로에서 멀어졌다. 서화연은 담장 아래 웅크린 채 숨을 들이켰다.

불길 너머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 관복 자락. 어깨의 폭. 의금부 순찰대라는 외침을 날리는 목소리.

이현이었다.

그는 경비병 둘을 배수로 반대편으로 돌리며 직접 횃불을 쥐고 있었다. 왼손으로 옆구리를 짧게 눌렀다 놓는 동작이 불빛에 스쳤다.

서화연은 몸을 일으켰다. 담장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불길이 잦아들 무렵, 대비전 후원은 젖은 재 냄새로 가득했다.

이현은 발화 지점의 덩굴을 발로 밟아 마지막 잔불을 껐다. 경비병들이 물통을 내려놓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순찰대장에게 보고하시오. 원인은 마른 덩굴에 등촉 불씨가 튄 것으로——”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였다.

“의금부 경력께서 어찌 이곳에.”

최상궁이 서화각 곁문 앞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손에 쥔 촛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순찰 경로를 재조정 중이오. 최근 외곽 담장에 침입 흔적이 있다는 보고가 있어——”

이현은 횃불을 경비병에게 건넸다.

“발화 지점은 이곳이다. 서화각과는 무관하오.”

최상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침묵이 두 박자 흘렀다.

“서화각 내부도 확인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시오. 나는 바깥 흔적을 더 살피겠소.”

경비병들이 서화각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이현은 배수로 배출구 쪽을 흘끗 보았다. 젖은 풀섶에 가느다란 발자국 하나. 작고, 굽이 낮은 신발 자국이었다.

발로 흙을 쓸어 자국을 지웠다. 그리고 담장을 따라 걸었다.

궁 외곽 담장 인근 골목길.

서화연은 빈집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젖은 옷소매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숨이 점차 가라앉았다.

발소리. 한 사람. 보폭이 길고 리듬이 일정했다.

골목 입구에서 이현이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 사이, 서너 걸음. 달빛이 바닥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는 대비전 쪽에서 막 걸어온 참이었다. 관복 소매 끝이 그을음에 검었다. 숨은 고르지 않았다.

서화연을 보았다. 젖은 옷, 흙 묻은 손, 담장 밑에서 나온 자의 자세.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대비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겠소.”

낮은 목소리. 검지를 접었다 펴는 버릇은 오늘 따라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이 품에 들어가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것으로 진짜 은비녀의 위치를 추적하시오.”

서화연은 종이를 받지 않고 이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서 난 겁니까.”

“대비전 물자 반출 기록이다.”

“그런 기밀 문서를 경력께서 어떻게.”

그가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그 틈에 서화연의 시선이 그의 옆구리로 갔다. 젖은 듯이 어두운 얼룩이 관복 옆선을 따라 번져 있었다. 이현은 몸을 반쯤 돌려 그 시야를 차단했다.

“내가 확보했다. 그 이상은 묻지 마시오.”

서화연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손끝이 젖은 표면에 닿았다. 먹 냄새. 청원지가 아닌, 일반 저지에 베낀 등본이었다. 대비전 인장의 붉은 날인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걸 베끼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사흘이다.”

서화연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가 사흘 내내 이 기록 하나를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이 무게로 내려앉았다. 대비전의 물자 반출 기록. 의금부 경력 직권만으로 열람할 수 있는 문서가 아니었다.

“대가가 있을 겁니다.”

“알고 있소.”

이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화연은 한 걸음 물러섰다.

“은혜는 갚겠습니다. 하지만——”

말을 마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짧고 단호한 동작이었다.

“갚을 필요 없소. 다만 그 기록으로 진실을 찾으시오. 내가 하지 못한 일이오.”

서화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골목 저편에서 인적이 끊겼다. 이현은 몸을 돌려 의금부 방향으로 두 걸음 떼다가 멈췄다.

“은신처로 바로 가시오. 장내관의 하급 관리들이 아직——”

“알고 있습니다.”

서화연의 목소리가 이현의 말을 잘랐다. 부드럽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추궁하지도 않았다.

이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걸어갔다.

서화연은 민가 골목을 세 번 꺾었다. 빈집 문짝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멍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젖은 소매를 걷어내고 품에서 두 가지를 꺼냈다. 심수련의 약봉투와 이현이 건넨 종이.

먼저 약봉투에서 접힌 지도를 펼쳤다. 폐비의 필체로 적힌 ‘진품’의 위치. 서화각 서가 안쪽 서랍.

다음으로 이현의 종이를 폈다.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물자 반출 기록. 날짜와 품목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상단에서부터 훑어 내려가던 시선이 멈췄다.

하단에서 세 번째 줄.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대비전 서화각 → 내명부 심수련 처소. 은제 장신구 일점(一點). 촉탁 인장.’

심수련의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붉은 점이 찍힌 서랍,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진품’이라 적힌 위치.

석 달 뒤, 같은 경로로 반송된 기록은 없었다.

두 기록이 교차하는 지점이 손끝 아래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가짜 은비녀가 서화각 서랍에 놓이기 전에, 진짜는 이미 심수련의 처소를 거쳐간 것이다. 대비전은 진품을 내명부로 옮겨 보관하다가, 서화각에 가짜를 배치했다.

서화연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 기록은 이현의 단독 판단으로 빼내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문서였다. 대비전 인장이 찍힌 물자 반출 원부는, 의금부 경력조차 정식 절차 없이 접근할 수 없는——

그때였다.

골목 바깥에서 발소리.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근방이다. 빈집을 샅샅이——”

장화가 자갈을 밟는 소리. 셋, 아니 넷. 창틀 너머로 횃불 빛이 스몄다.

은비녀 아래 진실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