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23화

해 뜨기 전, 내명부와 의금부를 잇는 회랑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심수련은 회랑 기둥 뒤에서 몸을 숨겼다. 남색 당의 소매가 석등의 희미한 불빛에 스쳤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접혀 있었다. 장내관이 축시 말 대비전 후문으로 드나든 것, 그리고 해 뜨면 서화연의 거처를 정식 수색한다는 내용이었다.

발소리. 이현이 회랑을 가로질러 의금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젯밤 대비전 후원에서 돌아온 지 두 시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옆구리를 감싸듯 왼손이 허리춤에 닿아 있었다.

심수련이 기둥에서 나왔다.

“경력 나리.”

이현이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는 동작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이시오.”

심수련은 대답 대신 쪽지를 내밀었다. 손가락 끝의 변색된 자국이 어스름 속에서도 드러났다.

“장내관께서 축시 말 대비전 후문을 다녀가셨습니다. 한 시진 뒤면 서리들을 이끌고 그 아이의 거처로 향하실 터.”

이현이 쪽지를 받아 폈다. 눈이 글자를 훑는 동안 숨소리가 한 번 멎었다.

“대비전 밀명이라는 증거는 있소.”

“대비전 최상궁이 친히 문까지 배웅하셨소이다. 장내관이 무슨 명분을 확보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심수련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서화각 침입자를 찾는다는 명목일 가능성이 크옵니다.”

이현은 쪽지를 접어 소매 안에 넣었다.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펴졌다.

“알겠소.”

짧은 한 마디였다. 이현은 몸을 돌려 의금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걸음 떼다가 멈추지 않고 뒤를 향해 말했다.

“최상궁께서는 내명부로 돌아가시오. 대비전의 움직임이 더 있거든 곧바로 알려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심수련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을 때 이현은 이미 회랑 끝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심수련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이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회랑 바깥으로는 동녘 하늘이 서서히 옅은 군청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여미고 내명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걸음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의금부 중정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술렁였다.

장내관 장덕수가 서리 일곱 명을 중정에 세워놓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의금부 정문이 열려 있었고, 먼동이 터오는 하늘 아래 관복의 검은 색이 한층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각자 맡은 구역을 다시 한 번 확인하라. 거처 내부는 물론이고 처마 밑과 마루 밑까지 샅샅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정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돌아보았다. 이현이었다.

관복 차림은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고, 왼손에는 청원지 두 장이 말려 있었다. 걸음걸이는 곧고 느렸다. 중정 한가운데 멈춰 서자 아침 찬 공기 속에서 입김이 희게 풀렸다.

“장내관.”

이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중정 구석까지 또렷이 닿았다.

장덕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스친 것은 당혹감이었다. 이현이 이 시각에 중정에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경력 나리. 이른 시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그 질문은 내가 할 차례요.”

이현은 서리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서리 한 명이 물러서려다 멈칫했다.

“동트기 전에 서리 일곱 명을 소집한 목적을 말하시오.”

장덕수가 턱을 약간 치켜들었다.

“대비전의 지시로, 서리 업서화의 거처를 공식 수색하려던 참입니다. 업서화의 신원에——”

“그 전에.”

이현이 손에 든 청원지를 들어 올렸다. 동녘 빛이 종이 가장자리를 붉게 물들였다.

“이것부터 보시오.”

장덕수는 청원지를 받아들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이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경력 나리. 지금은 업서화의 신원에 관한 중대한 의혹이 먼저——”

“의혹은 나중이오. 지금은 이것이 먼저.”

이현이 청원지 한 장을 펼쳐 장덕수의 면전에 내밀었다. 종이 위로 필체와 함께, 옅은 푸른 기름기가 특정 각도에서 번들거렸다. 청원지의 묵 반응 흔적이었다.

“3년 전, 계축년 유월 스무닷새. 산대청 하급 궁녀 장서윤의 사망보고서요.”

장덕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동이 터오르는 빛이 그의 이마를 비추자 식은땀이 반짝였다.

“그게… 무슨…”

“장서윤의 사인은 자살로 보고되었소. 하지만 이 기록은 위조된 것이오.”

이현의 손가락이 청원지의 특정 부분을 짚었다.

“이 부분의 묵 반응을 보시오. 청원지의 섬유는 기록 후 수정하려면 반드시 흔적이 남소. 원본 사망보고서는 '은엽초 중독'으로 기재되었으나, 누군가가 이 부분을 칼로 긁어내고 '자살'로 다시 적어 넣었소.”

중정이 숨을 멈췄다.

서리 일곱 명 중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장내관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긁어낸 흔적은 청원지 고유의 섬유 배열을 손상시켰소. 최근 나흘간 의금부 기록고에서 이 기록을 대조 감정한 결과, 위조 흔적은 명백하오.”

이현은 두 번째 청원지를 펼쳤다.

“이것은 감정 기록이오. 전문 감정관 세 명의 서명이 있소.”

장덕수의 눈이 두 문서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그의 오른손이 허리춤에서 떨렸다. 이현이 말을 이었다.

“장내관, 장덕수. 그대를 사문서위조와 직무유기 혐의로 체포하오.”

이현의 목소리는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마치 날씨를 전하는 듯 무심한 어조였다.

장덕수가 반 걸음 물러서며 외쳤다.

“이건… 이건 날조된 증거요! 경력께서 업서화를 감싸려고——”

“이 증거는 대비전과 무관한 문서요.”

이현이 장덕수의 말을 잘랐다.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3년 전 사건이오. 업서화가 의금부에 들어오기도 전의 일. 누구를 감싸려고 3년 전 사건 증거를 날조하겠소.”

침묵.

서리 하나가 발걸음을 옮겼다. 장내관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는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다른 서리들도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장덕수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대비전의 밀명과 이현의 증거 사이에서, 그의 입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이건… 이건 대비전 마마께서…”

“대비전 마마와 상관없소.”

이현은 청원지를 다시 말아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문제는 장내관의 3년 전 범죄. 이 증거 앞에서, 다른 사안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장덕수가 더 물러서려는 순간, 이현이 중정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리들. 장내관을 의금부 구금실로 호송하시오.”

서리들 사이에 잠시 망설임이 흘렀다. 상관 둘 사이에서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가장 나이 어린 서리 하나가 먼저 장내관의 왼쪽 팔을 잡았다. 그 움직임이 신호가 되어 두 명이 더 붙었다.

장덕수는 더 이상 대비전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이현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당혹감과 함께, 지금 막 깨달은 무언가가 떠올라 있었다. 이현이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사실. 대비전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대응 카드를 준비해뒀다는 인식이었다.

구금실로 끌려가면서 장덕수가 돌아보며 말했다.

“경력 나리.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중정에 남은 것은 이현과 서리 세 명뿐이었다.

그중 한 명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윤공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관리하는 하급 서리였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고 존재감도 옅었으나, 중정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눈에 담았다는 듯 시선은 예리했다.

이현이 그 서리를 향해 반 걸음 돌아섰다.

“모두 들었소?”

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은 중정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아침 햇살이 마당의 절반을 밝히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돌바닥에 길게 누웠다. 옆구리 통증 때문인지 왼손이 잠시 허리춤을 짚었다가 떨어졌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두겠소.”

세 명의 서리뿐 아니라, 구금실로 향하던 무리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중정 전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업서하는 내 사람이오.”

이현의 목소리는 벽에 부딪혀 울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멀리 퍼졌다.

“누구도 함부로 의심하지 마시오.”

서리 하나가 숨을 들이켰다. 윤공의 심복 서리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이현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 아래, 이현의 손가락 두 개가 검지를 포함해 접혔다 펴졌다. 장내관을 압박할 때와 같은 버릇이었지만, 손끝의 힘이 조금 덜 실려 있었다.

“이상이오. 모두 본 업무로 돌아가시오.”

이현은 더 이상 중정에 머물지 않았다. 몸을 돌려 의금부 집무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서리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윤공의 심복 서리만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가 중정 한구석에 서서 이현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는 동안, 그의 손은 이미 관복 주머니 속에서 작은 전령용 나무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현의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심복 서리는 몸을 돌려 중정을 빠져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윤공의 사가 쪽을 향하고 있었다.

동이 완전히 터올랐다. 돌바닥 위로 아침 볕이 번지자, 장내관이 소집했던 서리들의 발자국과 이현이 들어올린 청원지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사라졌다.

새벽 빛이 문풍지 사이로 스몄다. 서화연은 멍석 위에서 눈을 붉히지 않은 채 잠들지 않았다. 발소리가 멈추고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신호. 검은 두루마기의 어린 궁녀가 건넨 합죽선 살대 사이에서 쪽지를 꺼냈다.

의금부 중정. 이 경력께서 청원지 위조 혐의로 장내관을 체포하시고, 업서화 서리의 검시 기록을 공식적으로 신뢰한다고 선언하셨소이다.

서화연은 쪽지를 촛불에 태웠다. 불꽃을 먹어가는 손끝이 약간 떨렸다가 멈췄다.

궁녀가 떠난 뒤 품에서 가짜 은비녀와 물자 반출 기록을 꺼내 나란히 두었다. 비녀를 창 쪽으로 기울이자 아침 햇살에 은 표면이 반짝였다. 폐비의 신분에 맞지 않는 순도.

문양은 대비전 최고의 은장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정교한 세공이었다. 대비가 이토록 정성을 들였다는 것은, 진짜가 치명적일 때만 가짜가 필요하다는 뜻. 진짜 은비녀에 담긴 비밀이 대비전의 존립을 흔들 수 있다는 증거였다.

반출 기록 하단을 짚었다.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대비전 서화각에서 심수련 처소로.

반송 기록은 없었다. 심수련은 진짜를 받았는데, 가짜가 서화각에 있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대비전이 가짜를 만든 시점은 진짜의 소재를 통제할 수 없게 된 이후다. 숨기려 할수록 추적할 흔적은 늘어난다.

먹을 갈았다. 가짜 은비녀의 문양, 은의 순도 추정치, 세공 기법, 비녀 머리 부분 꽃잎 수를 전부 기록했다. 붓이 멈추자 쪽지의 문장이 떠올랐다.

공식적으로 신뢰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현이 왜 그런 일을. 기록을 숨겼던 자가 공개적으로 그녀의 편에 섰다. 배신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곁에 이름 붙이기 싫은 감정이 스며들었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그 감정에 붓을 세우지 않았다.

종이를 말아 대나무 통에 넣고, 가짜 은비녀는 천으로 싸서 품에 간직했다. 심수련의 약봉투에서 대비전 지도를 꺼내 펼쳤다. 서화각 내부 구조, 빠져나온 배수로, 붉은 점이 찍힌 서랍.

다음은 내명부 심수련 처소의 출입 전표와 야간 순찰 기록을 교차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적었다. 촉탁 도장, 행방 불명. 그 아래 작게 덧붙였다.

대비전이 두려워하지 않는 진실은 없다. 다만 치를 대가를 두려워할 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일어났다.

취조실 벽면의 횃불이 장내관의 얼굴을 반쯤 비추었다. 이현은 탁자에 청원지 위조 감식 보고서를 펼친 채,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밀었다. 장내관은 보지 않았다.

“기록을 위조한 것은 인정하오.” 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누구 지시였소.”

“내 판단이오.”

“청원지 위조는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묵의 배합을 아는 자, 기록 보관소 출입 권한이 있는 자, 그리고 이 일로 이득을 보는 자.” 손가락이 보고서를 한 번 쳤다. “세 사람 이상의 공모가 필요하오.”

장내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현은 검지를 접었다 폈다.

“묵의 배합 비율이 내명부 최상궁 이상의 전용 먹과 같소. 용뇌향이 섞였다.”

“내명부에는 취조 권한이 없소.”

“묻는 것은 내명부가 아니오. 그 먹을 당신에게 건넨 자요.”

장내관의 입술이 말라붙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서 유난히 컸다. “대비전과는 무관하오.” 그 말뿐이었다.

이현은 보고서를 덮었다. 대비전이라는 말을 스스로 꺼낸 건 장내관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은 곳을 먼저 막은 대답이었다.

“장내관은 오늘부로 직위 정지요. 내일 신시에 다시 심문하겠소.”

문고리를 잡았을 때 장내관이 뒤에서 말했다. “경력 나리께서도 알지 않으십니까. 감싸는 자가 가장 먼저 다친다는 것을.”

이현은 걸음을 멈췄다. 옆구리 통증이 맥박처럼 뛰었다. 환약을 복용했지만 반나절도 가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고 복도에 나서자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갈비뼈 아래를 눌렀다.

윤공이 알게 되기까지 길어야 한나절. 장내관 체포는 대비전에 대한 공개적 도전이었고, 윤공은 대비전의 눈치를 보는 자다.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이현의 출생.

전 왕세자의 서자라는 사실은, 윤공이 아니었다면 일곱 해 전 유배지에서 죽었을 빚이 되었고, 이제 협상의 도구가 될 참이었다. 빚을 갚으라 말할 것이다. 이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서화연을 지키려면 대비전을 무너뜨려야 한다. 대비전을 무너뜨리려면 윤공의 비호 밖으로 나서야 한다. 빚으로 시작된 관계는 빚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갚는 방식이 달랐다. 목숨이 아닌 진실로 갚을 생각이었다.

집무실 문 앞에 하급 서리가 서 있었다. “경력 나리. 윤 도사께서 곧바로 뵙자고 하셨습니다.”

이현은 손을 옆구리에서 떼고 끄덕였다. 윤공의 집무실 문을 열자 탁자 위에 두 개의 문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오래된 신원 보증 문서, 그리고 익명의 밀고서.

서화연의 필체를 언급한 문장이 접힌 종이 사이로 비쳤다. 윤공은 창가에 선 채 몸을 돌리지 않았다.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끝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그 빚을 갚을 때가 됐군, 이현. 이 서리와 네 출생, 하나를 선택해라.”

은비녀 아래 진실2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