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24화

윤공은 창가에서 몸을 돌리지 않았다.

동틀 무렵의 희부연 빛이 창호지 너머로 스며들었다. 탁자 위 신원 보증 문서와 밀고서는 그가 펼쳐놓은 그대로였다.

이현은 문을 닫았다.

“선택하라 했다.”

윤공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함이 오히려 칼날 같았다.

“장덕수를 의금부 취조실에 가둔 것은 대비전에 대한 공개적 도전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나.”

이현은 답하지 않았다. 윤공이 천천히 돌아섰다.

“대비전은 오늘 안으로 장내관을 빼낼 것이다. 그리되면 네가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진다.”

탁자 위 문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서리. 업서화.”

이현의 손끝이 움찔했다. 윤공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가 그를 감싼 이유를 묻지 않겠다. 하지만 결과는 분명히 해야 한다.”

익명의 밀고서를 들어 이현 앞으로 밀었다.

“필체가 다르다. 체구가 다르다. 전임 업서화와 지금 그 서리는 같은 사람일 수 없다.”

이현은 밀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서화연의 필체를 언급한 문장이 접힌 종이 사이로 보였다.

“누군가는 이미 눈치챘다. 아직 대비전으로 들어가기 전이니 막을 수 있다.”

윤공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 서리를 의금부에서 내보내라. 오늘부로 해촉 처리하면 나머지는 내가 감춰준다.”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아침 빛이 닿아 회색으로 물들었다.

“해촉할 수 없습니다.”

“이현.”

“업서하는 증거가 아닌 인재입니다.”

윤공의 눈매가 좁아졌다. 손가락이 문서 위에서 멈췄다.

“인재?”

“검시 능력은 의금부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힙니다. 오늘 장내관을 체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서리의 은침 감식 결과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냐.”

“도사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증거를 바로 보는 자를 내치는 것은 의금부의 검시 체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윤공이 탁자를 내리쳤다. 문서가 바닥에 흩어졌다.

“네 출신을 감쌀 수 없다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현의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전 왕세자의 서자임을 의금부가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이다.”

윤공은 한 걸음 다가섰다. 낮아진 목소리가 더 위협적이었다.

“7년 전 유배지에서 너를 구한 것은 나다. 그 빚, 오늘 갚아라.”

이현의 왼손이 옆구리로 향했다. 멈추었다. 갈비 아래 통증이 아침마다 도지는 때였다. 하지만 손을 올리지 않았다.

“빚은 갚겠습니다.”

“그렇다면―”

“다만 목숨이 아닌 진실로 갚겠습니다.”

윤공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진실?”

“장내관이 위조한 기록은 3년 전 검시 보고서 하나가 아닙니다. 청원지 묵 반응 감식 결과, 최소 아홉 건의 기록이 같은 방식으로 조작되었습니다.”

이현은 바닥에 흩어진 문서를 줍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감식 보고서 전문입니다. 도사님께서 먼저 보셔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윤공은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았다. 이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의금부 경력으로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대비전을 건드리면 너부터 죽는다.”

“이미 건드렸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먼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오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윤공은 천천히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

“네 출신을 감싸준 지난 7년을 후회하게 만들지 마라.”

“도사님.”

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7년 전 도사님께서 저를 구해주신 것은, 제 출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는 이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윤공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

“다르지 않습니다.”

이현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업서하를 해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도사님께 드리는 제 대답입니다.”

윤공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현은 몸을 일으켜 문을 향했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뒤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선택한 길이다.”

이현은 멈추지 않았다.

복도에 나서자 아침 공기가 폐부 깊이 들어찼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윤공의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무겁게 울렸다. 윤공은 이미 대비전에 보고할 준비를 시작했을 것이다.

이현은 오른손 검지를 접었다 폈다. 생각이 깊어질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서화연을 지키려면 윤공의 비호 밖으로 나서야 했다. 그것은 7년 만에 다시 혼자가 되는 길이었다.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내명부 후원의 버려진 다락방은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에 가장 은밀했다.

서화연은 썩은 나무 계단을 조심스럽게 디뎠다. 심수련의 전령이 전한 약도에는 후원 담쟁이덩굴 뒤쪽으로 난 버려진 창고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자 먼지 냄새와 함께 오래된 먹물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심수련은 이미 와 있었다. 남색 당의가 어둠 속에서 실루엣처럼 드러났다.

“오셨습니까.”

심수련의 소녀 같은 음색이 낮게 울렸다.

서화연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빛은 창고 한쪽 높은 창에서 쏟아지는 한 줄기뿐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내명부 순찰이 한 각 후에 이쪽을 돕니다.”

심수련은 당의 소매에서 낡은 문서철을 꺼냈다. 두꺼운 종이 뭉치가 삼베 끈으로 묶여 있었다.

“대비전 서화각 서가 깊숙이 숨겨져 있던 것입니다. 청소 궁녀 하나가 저의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대가로 그 궁녀의 가족은 오늘부로 의금부 감시 대상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서화연은 문서철을 받아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묵직함이 예상보다 무거웠다.

“대비께서 감추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지요.”

심수련의 손끝이 문서철 위를 스쳤다. 변색된 검지와 중지가 창틈 빛에 드러났다.

서화연은 문서철을 품에 넣었다. 가슴팍에 닿은 종이의 온도가 차가웠다.

“어찌 이걸.”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것이 폐비 마마의 마지막 순간을 적은 기록이라는 것만 기억하십시오.”

심수련은 한 걸음 물러섰다.

“발각되기 전에 이만 가야 합니다. 대비전의 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많습니다.”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이것으로 대비를 압박할 수 있겠습니까.”

심수련의 눈이 어둠 속에서 옅게 빛났다. 호박색 눈동자에 웃음기가 없었다.

“압박은커녕, 이건 대비께서 가장 두려워하시는 물건입니다. 서리께서 그 용도를 아실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심수련은 몸을 돌렸다. 걸을 때 치마 밑자락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서화연은 숨을 들이마셨다. 품속의 문서철이 가슴을 눌렀다.

창가로 다가가 삼베 끈을 풀었다. 먼지가 날렸다.

첫 장을 펼쳤다.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폐비 서씨에 대한 사약 조제 기록이었다. 내의원과 내명부의 이중 인장 전표가 상단에 찍혀 있었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기록을 한 줄씩 짚었다.

사약 처방: 은엽초 삼 푼, 백미초 이 푼, 부자 일 전.

눈이 멈췄다.

두 번째 줄. ‘사약’이라는 글자 위로 옅은 먹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었다. 서화연은 문서를 창가로 더 가까이 가져갔다.

빛이 종이 섬유 사이를 통과했다.

그때 보였다.

청원지 특유의 기름기가 푸르게 빛나는 자리. ‘사약’이라는 글자 아래로 지워진 원본의 흔적이 드러났다.

‘독초 혼합 탕약’.

서화연은 숨을 멈췄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각도를 바꾸자 지워진 글자가 더 선명해졌다. 청원지의 묵 반응 흔적은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원리였다.

누군가 ‘독초 혼합 탕약’을 ‘사약’으로 위조해놓은 것이다.

탕약은 치료를 전제로 조제된다. 사약은 집행을 전제로 한다. 조제 목적을 바꾸는 이 한 줄의 위조만으로, 폐비의 죽음은 ‘처벌’이 되었다.

서화연의 손이 떨렸다. 은침 감식 때와 같은 떨림이 아니었다. 증거 앞에서 느끼는 서늘한 확신이었다.

문서를 접었다. 마주 접고 다시 접어 품속 깊이 밀어 넣었다.

가짜 은비녀가 대비의 공포를 증명했다면, 이 위조 문서는 대비의 범죄를 증명하는 첫 물리적 증거였다.

다락방 밖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심수련이 후원을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서화연은 창틈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서서 가슴팍의 문서를 눌렀다.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이현이 설명했던 청원지의 특성. 기록은 지울 수 없고, 위조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이제 그 흔적을 손에 쥐었다.

다락방에서 나온 서화연은 곧장 폐가의 탁자 앞에 앉았다. 그날 밤 내내 촛불 아래서 문서철을 펼쳐 분석하는 동안, 손끝에는 먹물이 배고 심지가 반쯤 타들어간 접시에는 촛농이 여러 겹 쌓였다.

폐가의 문은 안쪽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 이현이 정해둔 신호대로 세 번, 한 박자 두고 두 번 두드리자 빗장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서화연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현은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탁자 위에는 문서철이 펼쳐져 있었고, 촛농이 여러 겹 쌓인 접시에서는 심지가 반쯤 남아 타고 있었다. 서화연의 손가락 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먹물을 만진 지 오래된 흔적이었다.

“윤공이 선택을 요구했소.”

이현은 소매를 털지도 않고 탁자 앞에 섰다.

“내 출신을 대비전에 알리든지, 서리를 내치든지.”

서화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이현은 단문으로 답했다. 서화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현은 말을 이었다.

“빚으로 시작된 관계는 빚으로 끝내겠다고 했소. 이번에는 목숨이 아닌 진실로 갚겠다고.”

서화연이 문서철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 탁자 위에 펼쳤다. 오래된 청원지였다. 불빛을 비스듬히 비추자 먹물 자국 아래로 은은한 청색 기름기가 떠올랐다. 원래 기록 위에 다른 손으로 덧쓴 흔적이었다.

“폐비마마의 사약 조제 기록입니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문서의 한 줄을 가리켰다.

“원본은 독초 혼합 탕약 조제 기록으로 위조되어 있었습니다. 청원지의 묵 반응 흔적은 지울 수 없습니다. 원래 기록과 위조 기록이 종이 섬유 안에서 뒤섞여 있습니다.”

이현이 문서를 집어 들었다. 불빛에 비스듬히 기울이자 두 겹의 필체가 선명하게 분리되었다. 독초 혼합 탕약의 재료를 나열한 글씨 아래로, 죽은 자의 마지막 음식이라 기록된 원래 문장이 푸르게 떠올랐다.

“이것이 대비의 기록을 공격할 첫 무기입니다.”

서화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끝이 떨리지 않았다.

“윤도사의 위협에 굴하지 않을 실체입니다.”

이현은 한참을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손가락이 위조된 부분과 원래 기록의 경계를 천천히 따라갔다. 청원지 섬유가 손상된 자리마다 위조자의 필압이 과하게 찍혀 있었다. 급하게 덧쓴 흔적이었다.

“이 증거를 의금부 공식 기록으로 등재해야 하오.”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를 통해 제출합니까.”

“경력 나리 본인이 직접.”

“안 되오. 내가 제출하면 윤공이 곧바로 기각할 명분을 찾을 것이오.”

서화연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그럼 누구에게 맡기자는 겁니까.”

“심수련.”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화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이현이 말을 덧붙였다.

“내명부 최상궁이 내명부 기록의 위조를 의금부에 고발하는 형식이오. 의금부는 내명부의 정식 고발을 무시할 수 없소.”

서화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수련이 이 문서를 건넨 경로는 대비전 내부를 거쳤다. 그녀가 고발자로 나서면 대비전은 내부 배신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시점은.”

“장내관의 재심문이 열리는 내일 신시가 지나서요. 그 전에 움직이면 윤공이 사건 분리 명분을 만들 것이오.”

서화연이 문서를 접어 이현에게 내밀었다.

“보관은 경력 나리께서 하십시오. 은신처는 오래 버티지 못할 곳입니다.”

이현이 문서를 받아 품에 넣었다. 서화연은 자신의 품에서 가짜 은비녀를 꺼내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촛불이 은 표면에 번지듯 반사되었다.

“신분 탄핵이 언제 들어올지 모릅니다. 그 전에 저는 이 가짜의 제작 경로를 추적하겠습니다. 진짜를 숨기려고 가짜를 만들었다는 것은, 제작자를 추적하면 가짜를 의뢰한 자에게 닿는다는 뜻이니까.”

이현이 은비녀의 문양을 짧게 살폈다.

“대비전 최고의 은장이 솜씨요. 일반 장인은 이 문양을 모방할 수 없소.”

“그렇다면 추적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집니다.”

서화연이 은비녀를 다시 품에 넣었다.

“내일까지 각자 할 일이 정해졌군요.”

바로 그때, 먼발치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을 짚는 소리. 의금부 포졸들의 군화였다. 이현이 재빨리 창가로 붙어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다섯, 아니 여섯 개의 횃불이 폐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현이 품에서 문서를 꺼내 두 겹으로 접어 옷깃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가 서화연의 손을 잡았다. 예상보다 따뜻한 손이었다.

“그대의 진짜 이름을 지키겠소. 내 모든 것을 걸고.”

서화연은 이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색 기운이 도는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손을 거두었다. 발소리가 폐가의 문 앞에서 멈췄다.

서화연이 문서철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 탁자 위에 펼쳤다. 오래된 청원지였다. 불빛을 비스듬히 비추자 먹물 자국 아래로 은은한 청색 기름기가 떠올랐다. 원래 기록 위에 다른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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