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26화

의금부 대청 앞뜰. 해가 진 지 한 식경은 지났다. 여덟 명의 금군이 뜰 입구에서부터 좌우로 늘어서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 중앙에 서화연이 서 있었다. 손목에는 아직 포승이 감기지 않았다. 그녀는 대청 정문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이현이 걸어 나왔다. 관복 차림이었다.

“이현 경력. 체포를 집행하겠소.”

서화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현이 손을 들었다. 금군 두 명이 다가서려다 멈췄다. 이현은 뜰 중앙까지 걸어와 서화연 앞에 섰다. 횃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닥에 길게 늘어뜨렸다.

“물러나 있으라.”

금군들이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현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향해 있었다.

서화연이 품에서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탁본이었다. 은비녀 안쪽 면을 숯으로 떠낸 흔적이 접힌 종이 사이로 비쳤다.

“폐비께서 남기신 마지막 증거요.”

이현의 손이 탁본을 받았다. 종이가 바람에 펄럭이자 그가 재빨리 접어 품에 넣었다. 허리띠 은장식이 횃불에 반사됐다. 그는 포박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잠시 대청 안으로 들겠소. 체포 전 확인할 사항이 있소.”

금군 대장이 머뭇거렸다.

“경력 나리, 규정상 즉시 구금이……”

“대청 안에서 도주할 길은 없네. 문 앞에 서 있으라.”

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평탄했다. 금군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이 돌아서서 먼저 걸었다. 서화연이 따랐다. 그녀의 양옆으로 금군 두 명이 붙었으나 손을 대지는 않았다.

대청 정문이 닫혔다.

이현은 대청을 가로질러 별실로 향했다. 자신의 관사로 통하는 작은 방이었다. 촛불 한 점이 탁자 위에서 타고 있었다. 창밖으로 금군들의 횃불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문은 열어둔 채였다.

서화연이 방 한가운데 섰다. 이현은 탁자 앞에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름을 밝히시오.”

서화연의 손이 옷자락을 단정히 모았다.

“나는 폐비 서씨의 이복 동생의 딸. 본명은 서화연이오.”

촛불이 일렁였다. 이현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알고 있었소.”

서화연의 숨이 멎는 소리가 침묵 속에 들렸다.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처음부터.”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폈다. 한 번. 생각이 깊어질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의금부 채용 기록에 추천인 란이 비어 있었다. 폐비와 연관된 자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서류였다. 게다가 업서화라는 이름은 실제 존재하던 인물이오. 걸음걸이와 체구가 지금 그대와는 확연히 달랐소.”

서화연의 눈에 무언가 스쳤다. 분노도 안도도 아니었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런데도 왜……”

말을 마치지 못했다. 이현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포승도 없이 맞잡은 손이었다. 따뜻했다.

“숨겨야 했소. 윤공의 눈, 대비전의 감시. 그대가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이오.”

서화연이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잡은 손의 감촉이 떨리며 전해졌다.

“그 기록을 숨긴 것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등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일부는 그랬소. 하지만 전부는 아니오.”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이현의 회색 눈이 촛불을 받아 어둡게 빛났다.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더 가까이 섰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리가 한 뼘으로 줄었다.

“나 또한 숨겨진 자식이오.”

서화연의 눈이 커졌다. 이현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폐위된 전 왕세자의 서자.”

그녀의 손이 그의 손 안에서 굳었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그렇다면…… 폐비 사건의 기록을……”

“7년 전, 열 살 때였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 했다. 윤공이 구해 유배에서 건져냈소.”

이현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옆구리로 올라갔다. 관복 아래 오래된 검흔이 있었다.

“폐비 검시 기록에서 같은 위치의 자상을 발견했소. 왼쪽 갈비 아래. 깊이 두 치. 은침으로 추정되는 자상이오.”

서화연의 표정이 무너졌다. 연결되었다. 모든 조각들이 한순간에 정렬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신의 상처와…… 폐비의 상처가…… 같은 자리인 거요?”

이현이 끄덕였다.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누군가 폐비의 죽음과 나를 연결하려 했다. 아니,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진실을 감춘 자들이 검시 기록마저 찢고 붙여 위조한 것이오.”

촛불이 다시 일렁였다. 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서화연이 숨을 들이켰다.

“이 탁본이……”

“대비의 죄를 증명할 것이오.”

이현이 품에서 탁본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은비녀 안쪽에 은침으로 새겨진 글자의 탁본. 숯 자국 사이로 희미한 획이 드러났다.

“‘사약은 독초 청엽이었다. 조제자는 대비전……’”

서화연이 조용히 읽었다. 이현이 탁본을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내일, 정식 재심을 청구하겠소. 이 탁본과 위조된 청원지 기록을 물증으로 제출할 것이오.”

서화연이 고개를 저으려다 멈췄다. 대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윤공은……”

“막지 못하오.”

이현의 손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7년 전 빚은 갚았소. 이제는 빚이 아니라 진실로 답할 차례요.”

서화연이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포승도 없이 겹쳐진 두 손. 촛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하나로 합쳤다.

“가겠소. 유치장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현이 손을 거두었다.

“호송을 직접 지휘하겠소. 재심 청구 전까지, 그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이현이 문을 열었다. 금군들이 긴장한 채 돌아섰다. 서화연이 별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곧고 단단했다.

대청 밖. 금군 여덟 명이 횃불을 든 채 두 줄로 늘어섰다. 이현이 앞서 걸으며 손을 들었다.

“유치장까지 호송한다. 포승은 내가 직접 맨다.”

그가 서화연의 손목을 잡았다. 포승을 한 번 감아 느슨하게 매듭지었다. 너무 조이지도, 풀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출발.”

행렬이 움직였다. 횃불이 긴 그림자를 끌며 의금부 후원을 가로질렀다. 밤바람이 서화연의 옷자락을 스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유치장 쪽을 바라보았다.

유치장 정문 앞에서 금군들이 멈췄다. 이현이 서화연의 포승을 풀었다. 유치장 입회 진행관이 다가와 명부를 내밀었다.

“죄인 인계 서류입니다. 서명을……”

이현이 붓을 받아 이름을 적었다. 진행관이 서화연을 안으로 들이려 했으나, 이현이 손을 들어 막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그가 돌아서서 서화연 앞에 섰다. 유치장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등불이 두 사람의 옆얼굴에 걸렸다.

“내일 오전. 정식 재심을 청구하겠소. 그때까지.”

서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붉어지지도,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다.

“기다리겠소.”

이현이 한 걸음 물러섰다. 진행관이 서화연을 유치장 안으로 들였다. 쇠창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이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손이 품에 든 탁본 위로 올라갔다.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폐비가 은침으로 새긴 마지막 진실. 그 진실이 내일이면 세상에 드러날 터였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대청 쪽으로. 기록고 쪽으로. 아직 밤은 길었다.

관사 밖은 아직 짙은 어둠이었고, 품 안의 탁본은 체온을 머금어 따뜻했다. 이현이 대청 마당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금군의 횃불이 마당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결국 밤이 다 가기 전에 그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관사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었다. 윤공이 직접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뒤로 금군 넷이 횃불을 든 채 늘어서 있었다.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윤공의 시선이 서화연을 훑었다.

“시간이 다 되었다.”

윤공이 한 걸음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의 손에는 대비전의 붉은 봉인이 찍힌 체포장이 들려 있었다.

“네놈이 지체시키는 바람에 내가 직접 왔다.”

이현이 서화연 앞으로 반 걸음 나갔다.

“보고는 제가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보고를 기다리기엔 네가 너무 오래 걸렸다.”

윤공의 손이 체포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붉은 봉인의 인장이 촛불에 반짝였다. 서화연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손이 이현의 소매에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탁본을 지켜주십시오.”

서화연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떨림은 없었다.

“그 안에 폐비의 마지막 진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왼손이 가슴께로 올라갔다. 관복 안주머니에 접힌 탁본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기다리시오.”

이현의 목소리는 짧았다. 두 글자씩 끊어졌다.

“내가 반드시 구명하겠소.”

서화연이 대답하는 대신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금군 두 명이 다가왔다. 한 명이 서화연의 팔을 잡았다. 다른 한 명이 허리띠의 포승을 풀었다.

윤공이 이현을 향해 섰다.

“경력은 여기서 기다리도록. 체포 집행은 내가 직접 감독한다.”

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서화연이 문 밖으로 끌려나가는 등 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관사 문 밖. 밤공기가 차게 내려앉았다. 횃불이 바람에 일렁이며 금군들의 갑옷 위로 붉은 빛을 던졌다. 서화연은 포승이 감긴 손목을 들어 올리지도, 내리지도 않았다.

금군 대장이 말에서 내리며 외쳤다.

“의금부 대청으로 압송한다.”

발소리가 자갈을 밟으며 움직였다. 서화연은 걷는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현은 관사 문간에 서서 그 행렬이 대청 방향으로 꺾여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여전히 가슴께에 있었다. 탁본의 모서리가 손바닥 안에서 살짝 눌렸다.

윤공은 압송 행렬이 대청 앞을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돌려 대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현에게는 더 이상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은 곧장 도사 집무실로 향했다. 대비전에 올릴 보고서를 정리하기 위해.

의금부 구금실.

돌바닥이 습했다. 벽을 타고 내려온 물기가 석회에 얼룩을 남겼다. 천장 가까이 난 작은 창으로 달빛 한 줄기만 들어왔다.

서화연은 구석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철문이 닫힌 뒤로 발소리와 열쇠 소리가 멀어지고,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손이 천천히 내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손끝이 차가운 금속에 닿았다. 은침이었다.

서화연은 은침을 달빛 아래로 꺼내 들었다. 침 끝에서 3푼쯤 되는 자리. 전에 보지 못한 미세한 균열이 있었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은 표면을 따라 실금처럼 번진 금.

은엽초에 노출된 은침의 반응이었다. 이것이 내부 구조를 약화시킨다는 것은 앞선 사건에서 확인했다. 그런데 이 균열은 표면뿐 아니라 침을 비스듬히 기울였을 때 속까지 이어져 있는 듯 보였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균열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굳은살이 박인 검지 끝으로 미세한 요철이 읽혔다.

“이 은침이 말해주는 진실……”

그녀가 낮게 읊조렸다. 문장은 끝까지 맺지 않았다.

잠시 후 은침을 내의 안으로 되돌려 꽂았다. 이번에는 다른 것을 꺼냈다. 자색 끈이 달린 작은 약주머니. 심수련이 건넨 물건이었다.

주머니 안에는 여전히 약재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말라붙은 잎사귀 조각과 고운 가루. 서화연은 주머니 입구를 손끝으로 벌려 냄새를 맡았다. 은은한 단내 뒤에 숨은 쓴맛. 백미초 특유의 독성 향이었다.

그녀는 약주머니를 다시 조심스럽게 접어 내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마지막 한 가지. 품속 가장 깊숙한 곳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청원지 조각.

사약 조제 기록으로 위조되기 전, 원래의 ‘독초 혼합 탕약’ 조제 기록이 남은 단편이었다. 접힌 종이를 펴자 청원지 특유의 기름기가 달빛에 옅은 푸른색으로 반응했다. 위조자가 덧씌운 ‘사약’이라는 먹 자국 아래로, 원래의 글씨가 희미하게 비쳤다.

독초의 이름은 읽을 수 있었다. 청엽. 그리고 그 아래, 조제자의 이름 일부가 잘려 있었다.

서화연은 청원지 조각을 접어 약주머니와 함께 내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은침. 약주머니. 청원지 조각.

탁본은 이현에게 있지만, 세 가지 물증은 그녀의 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비의 죄를 입증할 증거는 아직 이곳에 있었다.

그녀가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명부 지밀상궁 처소.

촛불 하나가 방 안을 지키고 있었다. 심수련은 낮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은 폐비의 친필 비망록이었다.

비단 표지가 닳고 가장자리가 눅눅해진 책. 폐비가 사약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들이 빼곡했다. 심수련의 손가락이 한 구절 위에 멈췄다.

진실을 아는 자는 반드시 오리라.

심수련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방문 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심수련이 비망록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너라.”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젊은 궁녀 하나가 머리를 숙인 채 들어왔다. 내명부 하급 궁녀로, 심수련이 심어둔 전령이었다.

“말씀드리옵니다. 의금부에 체포된 자…… 업서화라 하옵니다.”

심수련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였느냐.”

“자시 무렵이었사옵니다. 윤도사께서 직접 관사로 가셨다 하옵니다.”

심수련이 손을 들어 궁녀를 물렸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그녀는 다시 비망록을 펼쳤다.

“기다려라, 서화연.”

심수련의 목소리는 어린 소녀처럼 맑고 높았다.

“마마께서 말씀하셨소이다. 진실을 아는 자는 반드시 나타나리라고.”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대비전 출입 기록 사본을 꺼냈다. 7년 전 을미년 시월의 기록. 폐비의 사약 조제일 전후로 대비전 서화각을 드나든 자들의 명단이었다. 심수련은 그 종이들을 비망록 옆에 나란히 펼쳐 놓았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따로 꺼내 반으로 접었다. 이현에게 전할 내용이었다. 붓을 들어 먹을 찍으려던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약물로 변색된 검지와 중지 끝이 촛불에 비쳤다.

심수련은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붓을 다시 내려놓았다. 대신 접은 종이를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연기로 글씨를 써넣으려는 듯, 그녀의 손놀림이 느리고 정교했다.

촛불이 한 번 일렁였다.

심수련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때가 왔습니다, 마마.”

비망록의 낡은 책장이 저절로 한 장 넘어갔다. 그 페이지에는 다른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은침이 부러지는 날, 거짓도 함께 부러지리라.

은비녀 아래 진실2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