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27화
의금부 구금실 철문이 바깥에서 열렸다. 열쇠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자물쇠를 미리 풀고 기다렸다는 뜻이다.
서화연은 주머니 속 은침을 밀어 넣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문틈으로 낮은 관등 하나가 먼저 스며들었다. 이어 이현이 허리를 숙여 좁은 문을 통과했다. 관복이 아니었다. 검은 무관의 평상복에 허리띠만 은장식으로 마무리한 차림이었다.
이현은 단 한 걸음에 안으로 들어왔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바깥에서 빗장 걸리는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일어나시오.”
서화연이 몸을 일으켰다. 손목에 아직 포승이 감겨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이현의 시선이 거기서 반 박자 멎었다.
“경력 나리. 윤 도사께서 들이셨습니까.”
이현은 대답 대신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칼끝을 포승 사이로 찔러 넣어 위로 당겼다. 삼줄이 한 올씩 끊어지며 발밑으로 흘러내렸다.
“대비전에서 내일 재심 전 조사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들인다. 구금실에서 죽은 채 발견될 예정이오.”
서화연이 풀린 팔목을 조용히 문질렀다. 이현은 단검을 다시 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나오시오. 시간이 없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금실 입구 당직 번소에 순검 두 명이 엎드린 채였다. 잔등에는 약물이 밴 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이현이 서화연을 데리고 복도 끄트머리로 발을 옮겼다. 정문이 아닌 서쪽 비상구. 사건 현장 검증 때만 쓰는 통로라 문틀에 먼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병사들을 부르지 않은 것은 당신을 믿은 탓입니까.”
이현이 뒤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오. 내가 부르지 않았소.”
문을 열자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밖은 어둡고, 대청 앞뜰의 횃불 빛만 멀리 반짝였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나였다. 무겁고 느린 걸음이었다.
“이현.”
윤공이 서쪽 비상구 복도 입구에 서 있었다. 손에는 체포장 두루마리를 그대로 말아 쥐고 있었다.
“내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이것이냐.”
이현이 서화연을 제 등 뒤로 밀었다. 서화연의 등이 차가운 돌벽에 닿았다.
“대비전의 밀지입니다.”
이현이 윤공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내일 재심 전, 구금실에서 피고인을 처리할 계획. 밀지에 찍힌 인영은 대비전 서화각 최상궁의 도장. 직접 확인하시오.”
윤공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장내관 체포 때 압수한 서류 속에 있었소.”
이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다.
“대비께서 법으로 체포된 피고인을… 증거 재심 전에 제거하실 생각이십니다. 도사께서 가르치신 의금부는 이런 곳이 아니오.”
윤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가락이 체포장을 말아 쥐었다. 두루마리 종이가 뻣뻣하게 구겨지는 소리가 좁은 복도를 울렸다.
“네 이번 행동의 대가는 어떻게 감당할 참이냐.”
“알고 있소.”
이현의 오른손이 허리띠 은장식을 짚었다. 윤공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
“서화연의 호송은 내 책임으로 합니다. 도사께서는 밀지를 확인하시고, 대비전에 보고하실 일만 남았소.”
“명령을 거역한 너를 그냥 보내면 그 또한 내 책임이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지금 절차를 밟으시오.”
이현의 왼손이 옆구리를 스쳤다. 통증을 확인하는 동작이 아니었다. 낡은 버릇이었다.
“대비전의 밀지는 병사들 증인 앞에서 공개한다. 장내관 진술과 청원지 위조 증거도 포함해서.”
복도가 조용해졌다. 바깥에서 횃불 타는 소리만 이따금 끼어들었다.
윤공이 체포장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천천히 허공에 멈췄다. 그대로 내렸다.
“한 시진이다.”
이현이 고개를 숙였다.
“한 시진 뒤에 대비전에 보고한다. 그 안에 네 할 일을 끝마쳐라.”
윤공이 돌아섰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점점 멀어졌다.
이현은 곧장 뒤돌아 서화연의 팔꿈치를 잡았다.
“갑시다.”
궁성 서쪽, 오래된 물자 수송로였다. 야간 순찰 경로에서 가장 동떨어진 곳. 돌바닥 틈으로 잡초가 올라와 있었고, 벽을 따라 쌓인 나무 상자들 사이로 썩은 내가 풍겼다.
이현이 앞장섰다. 서화연은 그 뒷모습을 따르며 손목에 남은 포승 자국을 문지르고 있었다.
수송로 중간쯤, 지붕이 무너져 내린 옛 물자 창고 옆에서 이현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잠시.”
창고 벽에 등을 기댔다. 달빛이 얼굴 절반을 비췄다.
“내 출생에 대해 말하겠소.”
서화연이 우뚝 멈춰 섰다. 시선은 자연스레 이현의 옆구리 쪽으로 흘러갔다. 관복 아래 감춰진 낡은 검흔이 있는 자리였다.
“전에 말했듯이, 나는 전 폐세자의 서자요.”
이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감정을 눌러 담은 기색조차 없었다.
“일곱 해 전, 폐비 사건이 터지기 직전. 나는 열두 살이었다. 폐세자전의 하인들이 밤사이 모두 흩어졌다. 나를 데리고 도망친 노비 하나가 있었다. 사흘 뒤 그마저 떠났다.”
서화연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 뒤 의금부에 들어온 경위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소.”
이현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윤공은 내 출생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유배지로 갈 나를 거둔 것도 그 빚을 쥐기 위해서였소. 일곱 해 동안 갚고 또 갚아도, 빚은 사라지지 않았다.”
“빚이라면.”
서화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사께서 협박의 수단으로 쓰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폈다.
“서화연을 의금부에서 내보내는 대가로, 그가 내 비밀을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한 시진 뒤에 대비전에 보고할 테니, 그 전에 끝내라.”
서화연의 숨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한 시진이라면 아직 부족합니다.”
“알고 있소. 그러니 제대로 듣고 기억하시오.”
이현이 벽에서 몸을 떼었다.
“내가 전 왕세자의 핏줄이라는 것. 폐비 사건의 진실을 찾는 이유가 단지 의금부의 원칙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이 두 가지를 당신은 알고 있소. 윤공이 나를 협박했던 유일한 무기였다. 이제 그 무기는 쓸모가 없소.”
서화연이 눈을 들었다.
“왜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일이면 당신도 알게 될 일이었소.”
이현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잠시 회색으로 빛났다.
“내가 말하기 전에 남의 입으로 듣는 것보다, 내 입으로 직접 터놓는 편이 낫다.”
수송로 저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썩은 나무 상자들 사이를 바람이 휘돌아 지나갔다.
서화연이 품속에서 손을 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손은 다시 팔목으로 돌아갔다. 포승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이현이 옆구리를 짚었다. 이번에는 통증을 더듬는 손짓이었다. 약하게, 한 번만.
“궁성 서쪽 폐문까지는 반 각. 순찰이 이 구역을 지나가기 전에 통과해야 하오. 서두르시오.”
그가 다시 앞장섰다. 서화연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잡초 사이로 묻혀들었다.
수송로 끝에서 오래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이 슬어 붉게 얼룩진 문짝이었다. 이현이 문 앞에 서서 바깥을 살폈다. 야간 순찰대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을 밀자 소리 없이 열렸다. 경첩에 기름이 발라져 있었다.
이현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서화연도 뒤따랐다. 문이 다시 닫히고, 두 사람은 궁성 외곽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폐가의 안채였다. 무너진 기둥 사이로 쥐가 스치는 소리가 멎고, 썩은 짚 냄새가 가라앉은 자리에 두 사람이 등을 기대고 앉았다. 서화연의 소매 끝이 젖은 땅바닥에 닿아 얼룩졌다. 이현은 숨을 깊게 한 번 내쉬고는 왼쪽 옆구리를 짚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풀렸다.
서화연이 그 손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처음부터.”
이현의 목소리는 메아리 없이 벽에 부딪혀 사라졌다.
서화연은 무릎 위에 놓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구금실에서 풀린 손목에는 아직 가느다란 붉은 선이 남아 있었다.
“들어올 때, 내 필적이 의심스럽다고 한 말. 그게 시작이었군요.”
“그렇소.”
이현이 몸을 곧추세웠다. 어깨가 벽에서 떨어지며 마른 흙이 조금 흘러내렸다.
“목소리와 체구도. 장덕수는 전임 업서화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소. 당신이 다르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터.”
“그런데도.”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이현의 윤곽이 희미하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와 맞닿았다.
“보고하지 않으셨습니다.”
“증거가 부족했소.”
“의금부 경력 나리가, 증거 부족을 이유로 신분을 의심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서화연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이현은 잠시 침묵했다. 손가락이 허벅지 위에서 접혔다 폈다.
“당신의 실력을 본 뒤로는.”
바람이 부서진 문틈으로 밀려 들어왔다. 서화연의 옷깃이 가볍게 출렁였다.
“산대청 별감의 사인을 밝혀낸 자가 당신이었소. 그걸 알면서 내칠 수는 없었소.”
“그것만입니까.”
서화연이 몸을 이현 쪽으로 약간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 뼘 정도 줄었다. 그녀의 눈이 이현의 옆구리에 잠시 머물렀다.
“폐비의 검시 기록에서 찾으셨다고 했소. 상처가, 당신의 상처와 같다고.”
이현의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왼쪽 옆구리 위로 올라갔다.
“좌측 갈비뼈 아래. 깊이도 방향도 같았소.”
“어떻게 그걸.”
“25일 밤, 기록고에서.”
이현이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이 다시 한 번 문틈으로 밀려 들어왔다.
“폐비의 검시 기록은 두 장이 서로 붙어 있었소. 누군가 풀로 붙인 것인데, 불빛을 비추자 사이에 숨은 글자가 드러났소. 상처의 위치와 각도, 사용된 칼날의 추정 폭까지. 그것이 나를 겨눈 것과 같았소.”
서화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품속의 은침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래서 확신하셨군요. 폐비 사건과 당신을 죽이려 한 것이 같은 사람의 짓이라는 걸.”
“그렇소.”
이현이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상처를 남긴 자는, 아직 살아 있소.”
“대비전.”
서화연의 목소리가 돌처럼 굳었다.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혼자가 아니오.”
그 말에 서화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만났다.
“폐비의 진실과, 당신을 죽이려 한 자가 같다면. 우리가 할 일도 같소.”
서화연이 숨을 들이쉬었다. 품속의 은침이 손끝에 닿아 차가웠다.
“증거를 모아야 합니다. 검시 기록의 원본과, 은비녀 탁본의 각인. 그리고——”
바깥에서 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이현이 즉시 손을 들어 서화연의 말을 막았다. 귀가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를 쫓았다. 두 번째 소리.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발자국이었다. 질질 끌리는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숙련된 자들의 조심스러운 발소리.
이현이 일어섰다. 오른손이 허리로 내려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검을 두고 온 모양이었다.
“대비전 추적대요.”
서화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찾은 건 아니오. 주변을 넓게 돌고 있소.”
이현이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눈빛이 어둠을 꿰뚫듯 좁아졌다.
“여기서 더 머무를 수 없소.”
서화연이 즉시 몸을 일으켰다. 품속에서 은비녀 탁본과 검시 기록 사본을 꺼내 확인했다. 종이가 접힌 자리가 밤이슬에 약간 눅눅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두 번째 은신처는.”
“북쪽 옛 관아 터에.”
이현이 문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썩은 문짝 너머로 횃불 하나가 멀리 스쳐 지나갔다. 뒤돌아 서화연의 팔을 잡지 않고, 소매 끝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윤공이 내 출생을 공식적으로 폭로하기 전에 반격할 증거를 확보해야 하오.”
서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 끝에 닿은 이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통증인지 긴장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탁본의 각인이 폐비의 진짜 마지막 글씨라면, 그걸 만든 은장이를 찾아야 합니다. 대비전 최고의——”
“나중에.”
이현이 소매에서 손을 떼며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뒷문 너머로 횃불 하나가 더 가까워졌다. 목소리도 들렸다.
“이 근방에 폐가가 있다. 안을 확인해라.”
서화연과 이현은 동시에 움직였다. 이현이 앞서고 서화연이 뒤를 따랐다. 무너진 부엌을 지나 뒷문을 빠져나가자 폐가 뒤편의 잡초가 무성한 작은 길이 나타났다. 달빛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새벽까지는 아직 반 시진쯤 남아 있었다.
이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왼쪽 옆구리를 더 이상 감싸지 않았다. 서화연은 그 뒷모습을 보며 걸음을 맞췄다. 그때——
앞서 가던 이현이 갑자기 멈춰 섰다.
길 모퉁이에서 횃불 두 개가 동시에 꺾여 들어왔다. 검은 옷차림의 무인들. 하나는 이현보다 어깨가 넓었고, 다른 하나는 허리에 쌍검을 차고 있었다. 둘 다 대비전의 표식이 박힌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선발대. 모두 넷이었다. 이현이 한 걸음 서화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