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28화
이현이 숨을 골랐다.
넷.
맨 앞의 무인이 손을 들어 뒤따르던 셋을 멈춰 세웠다. 횃불이 길 모퉁이에서 덜컹이며 흔들렸다. 빛은 아직 두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썩은 벽돌 담장 모서리에 그림자가 깊게 져 있었다.
서화연은 품속의 탁본과 검시 기록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현이 왼손을 허리 뒤로 내렸다. 손가락이 검은 관복 주름 사이로 무언가를 찾는 듯 움직였다. 오른손은 들지 않았다. 어깨를 조금 낮추고 앞으로 나아간다. 발소리를 일부러 내며.
“의금부 경력 이현이다.”
울림 없이 낮은 목소리였다.
무인들 사이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선두의 사내가 횃불을 이현 쪽으로 기울였다. 불빛이 얼굴을 훑었다. 검은 관복, 허리띠의 은장식, 의금부 패용의 각인까지 순서대로 확인하는 시선이다.
“대비전 마마의 명으로 수색 중입니다.”
선두의 무인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손은 여전히 칼자루에 얹혀 있었다.
“길을 비키십시오.”
이현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서화연과 무리 사이를 반쯤 가로막는 위치다.
“수색 대상은.”
무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횃불이 다시 흔들렸다.
“도주한 의금부 서리 하나와, 신분을 위조한——”
“잘못 들었소.”
이현이 말을 끊었다. 단문이었다.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펴졌다.
“의금부에 수색 의뢰는 접수된 바 없소. 추적의 법적 근거를 대시오.”
횃불 두 개가 동시에 내려왔다. 선두 뒤에 있던 쌍검의 무인이 앞으로 나섰다. 허리 양쪽에 짧은 검집이 나란히 달려 있었다. 경례 없이 입을 연다.
“대비전의 구두 명령입니다. 의금부의 공식 문서 대신 대비전 선발대의——”
“구두 명령은 집행 근거가 될 수 없소.”
이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돌아가서 문서를 받아오시오. 그때까지 이 일대를 벗어나지 않겠소.”
쌍검의 사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깨 근육이 관복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뒤쪽 두 무인도 횃불을 낮춰 쥐며 발걸음을 반 보 옮겼다.
서화연은 이현의 등을 바라보았다. 관복 천이 왼쪽 갈비뼈 아래에서 검게 젖어 있었다. 검은 천이라 피의 색은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빳빳하게 굳은 천의 주름이 불빛 아래서 날카로운 각도로 접혀 있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품속의 은비녀 탁본이 체온에 젖어 부드러워져 있었다.
선두의 무인이 이현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뒤쪽에 손짓했다. 가장 오른쪽에 있던 네 번째 무인이 길가의 폐가 벽을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우회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현의 왼손이 허리 뒤에서 빠르게 나왔다.
손가락 사이로 은빛이 번쩍였다. 검은 아니었다. 의금부 경력의 직인이 찍힌 패 하나가 불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이 패는 왕실 직속 사법권을 상징하오.”
패를 어깨 높이로 들었다.
“이 앞에서 칼을 뽑는 행위는 의금부에 대한 경거다. 관여한 자는 전원——”
문장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쌍검의 무인이 움직였다. 오른손 검이 칼집에서 반 뼘 빠져나왔고, 그 금속음에 선두의 무인도 칼자루를 쥐었다.
“우리도 대비전의 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쌍검의 사내가 말했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칼날에 횃불의 주황빛이 번졌다.
“말만으로 물러설 수 없소.”
검지가 다시 접혔다. 패를 든 왼손은 내리지 않았다. 오른손은 소매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안쪽에 작은 약주머니가 위치한 곳이었다.
서화연이 발을 옮겼다.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현의 왼쪽으로 움직였다.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는 쪽과 반대편이었다.
“경력.”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짧았다. 이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 검지가 다시 접혔다. 이번에는 더 느리게.
그는 서화연이 낸 소리를 듣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패를 든 손을 내렸다.
“알겠소.”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
“돌아가며 답하겠소. 단——”
쌍검의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길목에서 물러나시오. 의금부 경력의 행동을 제지하는 행위는 사후에 공식 조사를 받게 되오.”
쌍검의 사내가 잠시 망설였다. 칼날을 완전히 뽑지 않은 채 옆의 선두 무인을 바라보았다. 선두의 무인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횃불을 들어 이현의 왼쪽 옆구리 부근을 다시 비추었다.
관복의 검은 천 아래로 진한 윤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주 작은 점 하나가 천 밖으로 배어 나와 곧바로 천에 스며들었다.
무인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부상을 입으셨군요.”
“문제 될 것 없소.”
“추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로 보입니다.”
검지 움직임이 멎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판단은 내 몫이오.”
“대비전 마마께서도 부상자를 붙잡아 두라는 명령은——”
“대비전의 명령은 문서가 있을 때만 유효하오.”
이현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작은 동작만으로도 옆구리에서 새로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서화연의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갔다가 멈췄다.
쌍검의 무인이 칼을 칼집에 도로 밀어 넣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좋습니다.”
선두의 무인이 뒤로 물러서며 길을 비켰다. 나머지 셋도 덩달아 발걸음을 옮겼다. 횃불이 길 모퉁이 쪽으로 일제히 후퇴했다.
“단, 이 결정은 대비전에 보고됩니다.”
선두의 사내가 덧붙였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횃불들이 스무 걸음쯤 물러나자마자 오른손을 소매에서 꺼냈다. 손바닥에 작은 약주머니가 쥐어져 있었다. 손가락이 주머니 끈을 풀지 못하고 약간 떨렸다.
서화연은 이현의 팔을 잡지 않았다. 앞서 걸어간 뒤 폐가 골목의 분기점에서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쪽.”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은 여전히 일정했지만 호흡이 짧아져 있었다.
골목은 곧 막다른 담장으로 이어졌다. 서화연이 먼저 담장 틈새의 썩은 나무 판자를 밀어젖혔다. 뒤편으로 오래된 별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와 일부가 무너져 천장에 구멍이 났지만 사방이 벽으로 막힌 은밀한 공간이었다. 두 번째 은신처. 북쪽 관아 터의 뒤편이었다.
이현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서화연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달빛 한 줄기가 천장 구멍으로 떨어져 어깨 위에 놓였다. 그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여주십시오.”
이현은 말없이 왼쪽 팔을 들었다. 관복 천은 이미 검붉게 굳어 있었다. 서화연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은침 네 뿌리가 가죽 홀더 안에 나란히 꽂혀 있었다. 손가락이 가장 얇은 침을 골랐다.
내명부의 침구실에서 의금부 검시를 위해 지참했던 것. 관복의 옆구리 부분을 찢지 않고 봉합 부위만 드러나게 접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길이로 서너 치 정도의 베임 자국이었고, 가장자리가 약간 벌어져 있었다. 낡은 검흔의 상부를 따라 새로 생긴 상처였다.
서화연의 손이 멈췄다.
폐비 검시 기록.
그 기록에 적혀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좌측 갈비 아래 자상, 칼끝이 위에서 아래로 향함.’ 이현의 옛 흉터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각도로 형성되어 있다면——
“묻지 않을 겁니다.”
이현의 목소리였다. 낮고 느렸다. 서화연은 침을 불빛에 비춘 채 답하지 않았다. 찢어진 옷자락에서 깨끗한 안감 천을 한 뼘 길이로 찢어내 상처 주변의 굳은 혈흔을 닦았다.
“여성 신분을 속이고 관직에 오른 일.”
이현이 말을 이었다. 고개는 벽에 기댄 채 천장을 향해 있었다.
“내가 왜 처음부터 알면서도 밝히지 않았는지. 그것도 묻지 않고 있소.”
서화연은 비단 천을 세 번 접어 상처 위에 올렸다. 손가락이 천 가장자리를 누를 때마다 복근이 미세하게 수축했다.
“지금 피를 멈추는 게 먼저입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전 왕세자의 서자요.”
서화연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은침이 천을 뚫고 천천히 들어갔다. 첫 번째 봉합.
“생부는 산대청 별감으로 신분을 낮춰 임명된 분이오. 폐비마마의 억울함을 청원지에 기록으로 남겼고, 그날 밤——” 숨이 한 번 끊겼다. 침이 한 번 더 들어갔다.
“기록과 함께 죽었소.”
서화연은 두 번째 침을 집었다. 가죽 홀더에서 침을 뽑는 소리만 어둠 속에 작게 울렸다.
“내가 열두 살이던 해요. 윤공이 유배지로 가던 나를 거둬 의금부에 들였소. 빚을 쥐기 위해서였지만, 덕분에 진실을 추적할 수 있었소.”
“윤공은 당신의 출생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침을 놓으며 물었다.
“알고 있었소. 그 빚으로 나를 통제해왔소.”
두 번째 침이 천을 가로질렀다. 이현은 움찔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당신을 구출하는 대가로 그 빚을 끊었소. 이제 윤공은 내 출생을 협박할 수 없소.”
서화연의 손이 세 번째 침을 잡았다. 손끝이 침과 함께 미세하게 떨렸다. 내면에 쌓여 있던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검흔은.”
침을 놓으며 조용히 물었다.
“폐비 사건 현장에서 난 것입니까.”
고개가 벽에서 떨어졌다. 처음으로 서화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색 기운이 도는 검은 눈이 달빛 아래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열두 살 때.”
그가 말했다.
“폐비마마의 거처 뒤편에서 밤에 숨어 있었소. 생부를 찾아갔다가. 그때——”
검지가 바닥에 닿아 천천히 접혔다.
“칼을 든 자가 들어오는 걸 보았소. 숨소리를 죽이고 옷자락에 몸을 숨겼는데, 상대가 놓치지 않았소. 칼끝이 내 왼쪽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소.”
서화연은 네 번째 침을 놓지 않았다. 들고 있던 침을 불빛 가까이 올렸다. 은침 표면에 가로로 미세한 균열이 빛을 받아 깜빡였다.
“폐비마마의 검시 기록에. 그날 밤 폐비마마의 몸에도 같은 자리에 칼자국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눈빛이 좁아졌다.
“맞소. 두 상처는 같은 칼, 같은 각도, 같은——”
“같은 범인.”
서화연이 말을 완성했다. 침을 내리며 상처의 마지막 봉합을 마쳤다.
천이 단단히 고정되자 이현이 벽에서 상체를 떼었다. 호흡이 조금 깊어졌다. 서화연은 침 세 뿌리를 피 묻은 천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마지막 한 뿌리를 불빛에 다시 비추었다.
미세한 균열. 은엽초에 노출되면 은제 도구에 생기는 특유의 반응. 장서윤 독살 사건에서 쓴 침과 동일한 반응이었다.
“이 침도 폐비 사건과 닿아 있습니다.”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폐비의 독살 도구와 같은 장인이 만든 것이라면, 누가 이 침을 만들었는지 기록이 어딘가에——”
“의금부 기록고.”
이현이 옆구리의 봉합 부위를 손끝으로 확인하며 말했다.
“《독침 장인 도록》이 있소. 폐비 사건 당시 제작된 침들의 장인과 규격, 유통 경로가 기록되어 있소.”
“그 기록은 어디에.”
“윤공이 관리하는 서가 깊숙한 곳에.”
천천히 일어났다. 동작에 무리가 있었지만 더 이상 피는 배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윤공은 지금쯤 대비전에 내 출생과 당신의 행방을——”
말을 멈췄다. 폐가 밖에서 바람에 실려 온 소리 하나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였다. 멀리서 몇 겹의 담장 너머로 메아리쳤다.
서화연이 침을 주머니에 거두며 일어섰다. 은비녀 탁본을 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의금부 기록고로 가야 합니다.”
낮게 말했다.
이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붙잡는 것이 아니었다. 손등에 살짝 얹는 정도였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이 손가락 마디에 닿았다.
“가기 전에. 한 가지 약속하시오.”
서화연이 손을 빼지 않았다.
“이 기록을 손에 넣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오. 증인에서——”
“주체자로.”
말을 가로챘다. 이현의 눈에 빛이 돌았다.
“내가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이 되는 거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거두며 벽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거기에 망가진 선반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낡은 피리집과 겹겹으로 쌓인 먼지가 있었다.
“해 뜨기 전까지 여기를 떠나야 하오. 한 시진 뒤면 추적대가 다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현은 말을 줄이고 빗장 쪽으로 이동했다. 손이 관복 아래 새로 봉합된 부위를 짚었다가 놓았다.
상처가 조용히 맥박 치고 있었다. 서화연은 침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어둠 속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탁본의 종이가 품 안에서 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