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31화
촛불의 심지가 한 번 가늘어졌다가 다시 타올랐다. 서화연은 편지를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채 손을 떼지 않았다.
검지가 종이 가장자리를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획의 굴곡을 더듬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 필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현이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촛불이 흔들리며 종이 위의 글자가 일렁였다.
“어디서.”
“심수련의 글씨입니다.”
서화연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미 내린 결론을 말로 확인하는 듯한 톤이었다.
“내명부에서 마주친 문서들. 그녀가 직접 작성한 출입 전표와 약재 관리 기록.”
그녀는 편지 왼편의 ‘서(徐)’ 자를 짚었다. 마지막 획을 길게 빼며 붓을 떼는 지점이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
“이 획의 버릇을 기억합니다. 붓을 떼기 직전 손목을 살짝 비트는 습관.”
이현이 몸을 숙였다. 편지와 서화연의 손가락 사이로 시선을 좁혔다.
“확신하시오.”
“예. 심수련의 필적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서화연은 종이 위에 펼쳐진 다른 글자들을 차례로 짚었다.
“첫째, ‘심(心)’ 자의 가운데 점을 가로획에 바짝 붙입니다. 둘째, 받침의 ‘ㄴ’ 모양 획을 항상 오른쪽으로 다섯 푼쯤 더 밀어 씁니다. 셋째…”
그녀의 손가락이 편지 중간쯤에서 멈췄다.
“문장의 끝에서 획이 갑자기 가늘어집니다. 붓에 먹이 마르기 전 멈추는 버릇이오.”
이현은 말없이 편지를 다시 들었다. 첫 장을 넘기고 뒷면을 확인했다. 은가루 흔적이 촛불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오. 법정에선 정식 감정을 거쳐야 한다.”
“그건 그렇습니다.”
서화연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심수련이 폐비의 지밀상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탁자 모서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폐비의 시종이 쓴 편지라면 내용은 신빙성이 있소. 필적 감정은 그 다음 문제.”
“그렇다면 이 편지를 보관한 사람도 심수련이라는 뜻입니다.”
서화연은 접은 편지를 소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손끝이 종이 사이에 스며든 은가루에 닿아 미세하게 반짝였다.
“폐비의 처소에서 나온 은제 물건. 그리고 폐비의 지밀상궁이 알고 있던 이 폐가. 모든 조각이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촛불이 다시 흔들렸다. 바람은 없었다. 심지가 거의 다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이현은 남은 촛농 위에 새 초를 포개어 세우며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의금부에 들어왔을 때의 일을 말하겠소.”
서화연은 고개를 들지 않고 기다렸다. 손은 여전히 소매 속 편지 위에 얹혀 있었다.
“윤공은 내 출생을 알고 있었소. 전 왕세자의 서자라는 것, 유배지로 가던 나를 거둔 것도 그 때문이었소.”
이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들릴 듯 말 듯한 선을 유지했다.
“열두 살. 하인들이 모두 떠난 뒤 나를 찾아온 사람이 윤공이오. 의금부에서 검율을 키울 것이라고 했소.”
“검율로 키우다가 필요한 순간에 기생시킬 생각이었겠지요.”
서화연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현은 잠시 침묵했다.
“예. 전 왕세자의 핏줄이라는 사실은 대비전에겐 위협이오. 동시에 윤공에겐 협상 도구.”
촛불이 새 심지에 옮겨붙으며 불빛이 한 번 커졌다. 이현의 옆얼굴에 그림자가 깊게 패였다.
“7년 전 폐비 사건. 내가 입은 상처. 모든 기록이 윤공의 손을 거쳤소. 의금부 기록고에 폐비 사건이 특별 봉쇄된 것도 그의 명령.”
서화연의 눈이 이현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손끝이 소매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폐비 사건 은폐에 가담한 셈이라는 뜻이오.”
이현은 문장을 똑바로 끝맺었다. 어미는 평온했지만, 식탁 위에 둔 그의 왼손이 주먹을 쥔 채 굳어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얇게 솟았다.
“기록을 숨기던 날도, 서리를 감시하던 날도, 그 끝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고 말할 자격은 없소.”
서화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위로가 아니었다. 부정도 아니었다. 그저 받아들임이었다.
잠시 뒤 그녀가 소매에서 손을 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석에 쌓아둔 보따리에서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폐비 검시 기록의 사본입니다.”
이현이 두루마리를 보았다. 그가 가져온 사본이었다. 서화연이 28화에 그의 상처를 봉합하던 밤, 함께 확인했던 기록.
“편지와 이 기록을 대조해 보겠습니다.”
서화연은 탁자 위에 두루마리를 펼쳤다. 청원지 특유의 검푸른 광택이 촛불 아래 살짝 비쳤다. 그녀는 검시 기록의 마지막 장을 편지 옆에 나란히 놓았다.
“검시 기록 본문이 아닙니다. 이건 기록과 기록 사이에 숨은 글자.”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숨은 글자?”
“20화에 이 기록을 살펴볼 때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두 장 사이에 숨은 텍스트가 있을 줄은. 그러나 나중에 각도를 비틀어 보니…”
서화연은 검시 기록을 들어 촛불에 비스듬히 기울였다. 접착된 두 장의 청원지 사이로 희미한 푸른 기름기가 번지며 숨은 글자가 드러났다.
“폐비의 필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록자의 메모.”
그녀는 그 숨은 글자 중 ‘礻(보일 시 변)’ 자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 이체자를 보십시오. 일반적으로는 示로 쓰는 것이 정자입니다. 그러나 이 기록자는 예서 이체인 礻를 썼습니다.”
서화연은 곧바로 편지에서 같은 글자를 찾았다. 편지의 두 번째 문단 중간, 거의 같은 모양의 이체자가 있었다.
“같은 이체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흥분을 억누르는 듯한 긴장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여기. ‘毒(독)’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시 기록의 숨은 메모는 毒의 마지막 점을 가로획 아래 찍지 않고 왼쪽에 찍었습니다. 편지도 동일한 버릇.”
이현이 일어나 그녀의 어깨 너머로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탁자 위의 두 기록은 같은 손이 쓴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내명부에서 쓰는 이체자 규칙이오. 최상궁 이상만 교육받고, 특정 문서에만 쓰는 글자. 외부인은 배울 기회조차 없소.”
서화연은 두루마리와 편지를 나란히 두고 손을 뗐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내명부 최상궁 이상입니다. 폐비 사건의 검시 기록에 숨은 메모를 남길 정도로 가까웠던 인물.”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하기 전에 손가락으로 편지의 첫 문장을 한 번 더 짚었다.
“심수련입니다.”
이현은 그 이름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같은 결론에 도달한 표정이었다.
서화연은 계속 말했다. 숨이 조금 빨라져 있었다.
“심수련은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20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이 집 장판 아래에 숨겨 두었습니다. 누군가 찾을 것을 예상하고.”
그녀는 탁자 옆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촛불이 그녀의 실루엣을 벽에 길게 늘렸다.
“제가 의금부에 들어온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녀가… 혹은 그녀를 움직인 누군가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했습니다.”
이현은 그녀의 등을 향해 말했다.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겠소.”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말하는 순간 그녀 자신이 사라질 테니까.”
서화연은 벽을 향해 서서 잠시 말을 멈췄다. 벽지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자리로 오래된 회벽이 드러나 있었다.
“심수련은 대비전에서 일하면서도 폐비의 편지를 보관했습니다. 진짜 은비녀를 저에게 전달할 길을 닦았습니다. 제가 의금부 검시관이라는 신분으로 사건을 파고들게 만든 것도 그녀입니다.”
이현이 탁자 위의 검시 기록을 조심스럽게 말았다.
“이유는.”
“아직 모릅니다.”
서화연이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에 촛불이 반쯤만 닿아 있었다. 나머지 반은 어둠 속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진실을 밝히려는 것인지, 대비를 몰아내려는 다른 세력의 뜻인지… 아직은.”
“하나 확실한 건.”
이현이 검시 기록을 원래 보따리에 도로 넣으며 말을 이었다.
“심수련이 이 편지를 숨긴 시점은 최소 20년 전. 서화연이 의금부에 들어오기 훨씬 전의 일이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된 판.”
서화연은 소매 속 편지의 위치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손끝이 종이 모서리에 닿자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심수련이 ‘서씨 집안의 마지막 아이는 살아있다’고 쓴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이건… 누군가에게 맡기는 신호입니다.”
“그 신호가 바로 당신을 향한 것.”
이현은 문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는 다시 서화연을 향했다.
“지금 심수련에게 연락할 수 있소.”
“약속된 장소가 있습니다. 내일 새벽까지 답신이 올지 모릅니다.”
서화연은 촛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불빛이 그녀의 손바닥에 은은하게 번졌다. 손가락 사이로 난 얕은 찰과상이 그림자로 도드라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묻기 전에, 하나 더 확인해야 합니다.”
“무엇을.”
“이 편지를 숨기게 한 사람. 진짜 배후가 따로 있는지.”
촛불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이번에는 정말 바람이었다. 밖에서 야간 바람이 폐가의 낡은 문틈을 파고드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이현은 초를 손으로 감싸 바람을 막으며 말했다.
“한 사람씩. 증거 순서대로.”
편지의 은가루가 촛불 아래서 마지막으로 반짝이고, 서화연의 손가락이 종이를 반으로 접던 순간이었다.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았다. 셋, 아니 넷. 말굽이 굳은 흙을 디디는 리듬이 규칙적이었다.
이현의 손이 촛불 심지를 집었다. 불꽃이 꺼지고 어둠이 방을 삼켰다. 타는 심지 냄새만 코끝에 남았다.
“벽장.”
이현의 목소리는 이미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상태였다.
서화연이 접은 편지를 옷깃 안쪽에 밀어 넣었다. 종이가 가슴께에 닿아 바스락거렸다. 그녀가 일어서자 무릎이 장판에 닿는 소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이현이 병풍 뒤 벽면의 판자를 옆으로 밀었다. 손바닥이 나무에 닿는 소리도 절제되어 있었다. 벽장 안쪽은 어둠이 더 짙었다.
서화연이 먼저 들어갔다. 바닥에 깔린 헝겊이 발바닥 아래서 눌렸다. 이현이 뒤따라 들어오며 판자를 원위치시켰다. 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좁은 공간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벽에 붙이면 팔이 닿을 거리. 판자 사이로 바깥 공기가 스며들었지만, 호흡 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서화연은 편지가 있는 가슴께로 팔짱을 끼어 종이가 옷깃에 스치는 소리를 눌렀다.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경쾌하지 않았다. 빗장을 부수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낡은 문짝이 밀리며 경첩이 삐걱거렸다. 이들이 이미 열려 있는 문을 조금 더 연 것인지, 아니면 취침 전에 잠갔던 문이 열린 것인지, 그 차이는 어둠 속에서 분간할 수 없었다.
장화 소리. 대청 쪽에서 두 사람분의 발걸음이 마루를 밟았다. 한 명은 발뒤꿈치부터 딛는 무거운 걸음걸이. 다른 한 명은 발끝으로 디디며 천천히 방 안을 훑는 움직임.
“누가 촛불을 켰던 모양인데.”
발끝으로 걷던 쪽이 말했다. 목소리는 젊고 날카로웠다.
“심지는 아직 따뜻하군.”
무거운 걸음걸이 쪽이 대답했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였다.
서화연은 숨을 멈추었다. 심지의 온도를 확인했다는 말은 그들이 방 안에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들이 촛불을 끈 지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았다.
방 안쪽으로 발소리가 접근했다.
“병풍이다.”
젊은 쪽이 병풍 앞에서 멈추었다. 종이를 손가락으로 퉁기는 소리가 들렸다.
서화연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손끝이 편지의 모서리를 더 세게 눌렀다.
“이 앞에 벽장이 있을 텐데.”
나이 든 쪽이 병풍 옆으로 다가왔다. 발소리가 멈춘 지점은 벽장 판자 바로 앞이었다. 나무 한 장 두께만큼만 떨어진 거리.
서화연은 이현의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가 호흡을 완전히 멈췄는지, 아니면 자신의 귀가 긴장으로 모든 소리를 차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열어볼까.”
젊은 쪽이 손을 판자에 댄 듯, 나무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만두게.”
나이 든 쪽이 말했다.
“이 판자 틈새에 거미줄이 제법 두껍네. 먼지도 쌓였고. 요 며칠 사이에 열린 흔적이 아니야.”
잠시 침묵. 판자에서 손이 떨어졌다.
“게다가 쥐똥도 보이는군. 이런 데 사람이 숨을 리 없지.”
발소리가 물러났다.
“대청 앞 장판은 확인했나.”
“들춰봤습니다. 빈 공간이긴 한데, 오래된 낙엽만 쌓여 있었습니다.”
“다른 방도 둘러보고 나가세. 이 구역은 끝났어.”
발소리가 멀어졌다. 문지방 넘는 소리, 마루 밟는 소리, 그리고 바깥 흙바닥으로 내려서는 소리가 이어졌다. 말발굽 소리가 다시 울렸다. 네 필의 말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리듬이 점점 작아졌다.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서화연은 팔짱 낀 팔을 풀었다. 편지가 옷깃 안에서 제자리에 있었다. 땀에 젖은 손끝이 종이 가장자리를 확인했다. 찢어진 곳 없었다.
이현이 판자를 옆으로 밀었다. 공기가 움직이며 먼지 냄새가 희석되었다. 그는 먼저 나가지 않고 판자 옆에 서서 밖을 가리켰다. 손가락 두 개. 둘 다 무사함을 의미하는지, 바깥이 안전함을 의미하는지, 어둠 속에서는 분간할 수 없었다.
서화연이 벽장을 빠져나왔다.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지도 않고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손이 촛불을 찾았다.
이현이 그 손목을 잡았다.
세지 않은 힘이었다. 하지만 정확했다. 서화연이 고개를 돌렸다. 이현은 말하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창문 쪽을 가리켰다.
서화연이 시선을 돌렸다.
폐가 서쪽, 나지막한 언덕 너머. 희미한 등불 서너 개가 줄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탄 자들의 행렬이었다.
앞서 간 추적대와는 다른 무리였다. 등불의 간격이 더 넓고, 움직임이 더 느렸다. 철저히 수색하는 대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