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35화
바깥이 완전히 밝아올 무렵, 이현의 이마에 얹은 손이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서화연은 손을 거두었다. 그의 호흡은 고르고, 봉합한 옆구리 상처에서 새로 번진 붉은 기운도 없었다. 열이 내린 것이다.
그녀는 침낭에서 은침을 꺼냈다.
동트는 빛에 은침을 비스듬히 기울이자 균열이 드러났다. 표면이 아니라 내부로 번진 미세한 금이었다. 은엽초에 노출되어 생긴 부식이라고만 생각했던 흔적. 하지만 빛의 각도를 바꾸자 균열의 갈래가 일정한 방향성을 띠고 있었다. 마치 제작할 때부터 존재했던 은의 결을 따라 번진 것처럼.
서화연은 숨을 멈추었다.
제작 단계의 결함이 이런 형태로 남을 수 있는지는 장인의 도록을 보지 않고는 단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현이 이십팔화에서 입에 올린 《독침 장인 도록》. 대비전 전속 은장이들의 제작 기법과 도구를 기록한 문서. 만약 이 균열이 특정 장인의 단조 방식과 일치한다면, 이 은침은 단순한 증거품이 아니라 대비전과 폐비 사건을 잇는 물적 고리가 된다.
그녀는 은침을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이현에게서 떨어진 외투를 집어 그의 어깨 위로 다시 덮어주었다. 손이 스치는 순간 그가 움찔했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
서화연은 바닥에 남은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폐정자 밖으로 나서자 아침 안개가 허리께까지 차 있었다. 후원의 돌담을 따라 서쪽으로 걸었다.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담장 모서리에 이르자, 세 번째 돌 틈새에 흰 세저포 천이 매듭져 걸려 있었다.
매듭은 하나.
심수련의 신호였다. 오늘.
그 아래 작은 돌 조각이 바닥을 가리키듯 놓여 있었다. 서화연은 돌이 향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낡은 석등 뒤, 다른 때 같으면 눈에 띄지 않았을 좁은 공간이 덩굴 사이로 드러났다.
심수련이 이미 와 있었다.
수수한 회색 당의에 머리에는 장식 없는 옥비녀 하나. 아침 안개 속에서도 그녀의 오른손 변색된 손가락이 움직임마다 눈에 들어왔다.
“잠이 적으시옵니까.”
심수련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고 맑았다.
“이현 경력의 간병 때문이옵니다.”
서화연은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열이 내렸소.”
“다행이옵니다. 경력 나리의 체질은 원래 단단한 편이시니.”
심수련의 말에 과거형이 섞여 있다는 것을 서화연은 알아챘다. 이현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의 표현이었다.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은침을 꺼내 보였다.
“이 균열이 제작 단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인해야 하오.”
“그렇다면 때마침이옵니다.”
심수련이 소매 안에서 접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청원지가 아닌 거친 닥종이. 필사본이었다.
“《독침 장인 도록》 중 폐비 사건 당시 독침 제작을 맡은 장인의 부분만 추려 두었사옵니다.”
서화연은 받아 펼쳤다.
장인의 이름, 사용한 은의 산지와 순도, 단조 온도와 횟수. 수은 아말감 도금 방식과 세부 문양까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녀의 눈이 빨라졌다. 은침의 제작 방식이 기록된 마지막 장에서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은 내부 결을 따라 균열이 번지는 것은, 이 장인의 단조법에서는 수은을 과다 혼입했을 때 나타나는 고유한 특징.”
서화연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맞소?”
“그러하옵니다. 대비전 전속 은장이, 김 씨 장인의 특징.”
심수련이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았다.
“이 은침을 만든 자와 폐비마마의 독침을 만든 자가 동일인이라면, 얘기는 달라지옵니다.”
서화연이 종이를 접으며 심수련을 똑바로 보았다.
“이현 경력이 부탁한 것이오.”
질문이 아니었다. 심수련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아프시기 전, 벽장에서 나오신 직후였사옵니다. 서 검율께서 은침의 균열을 말씀하실 것을 미리 짐작하신 듯.”
서화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현은 이미 그때 이 연결을 예측하고 심수련에게 기록을 청해둔 것이다. 자신이 열에 시달리며 무의식 속에서 죄책감을 토해내는 동안에도, 그가 깨어 있을 때 심어둔 조각들이 지금 그녀의 손에 닿았다.
“한 가지 더.”
심수련의 어린 소녀 같은 목소리가 낮아졌다.
“검율께서 아직 모르시는 것이 있사옵니다.”
서화연이 종이를 접는 손을 멈추었다.
“김 씨 장인은 폐비 사건 이후 대비전 서화각으로 작업실을 옮겼사옵니다. 지금도 그곳에 거처하며 대비마마의 은기를 전담하시옵니다.”
심수련이 한 걸음 물러서며 안개 속으로 반쯤 녹아들었다.
“기록고에 보관된 장인의 작업 일지. 그 안에 폐비 사건 당시 독침 제작 발주서가 남아 있을 것이옵니다.”
서화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쥔 필사본의 무게가 달라진 듯했다. 대비전 서화각. 기록고. 다음 걸음의 좌표가 선명해지고 있었다.
심수련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완전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사흘 뒤 자시, 약속은 그대로.”
서화연은 종이 뭉치를 방수포로 싸서 품 깊숙이 넣었다. 폐정자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까보다 빨랐다. 마룻바닥 아래 은신처에서 이현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침낭을 정리하고 그의 외투를 걷어 개켰다. 그리고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접선에서 가져온 종이 뭉치를 바닥에 펼쳤다. 금이 간 은침을 그 옆에 나란히 두었다.
장인의 단조 기록과 은침 균열을 대조하는 일. 그것은 이제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필사본을 들고 폐정자로 돌아온 뒤부터 아침까지, 서화연은 이현의 열이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품 안에서 방수포에 싸인 종이 뭉치가 체온에 데워져 있었다. 밤사이 두 번 정도 이현이 신음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확인했다.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에야 그의 호흡이 고르게 자리잡았다. 배수로를 건너올 때 옷깃에 스몄던 물기는 아직 채 마르지 않아 손끝이 눅눅했다.
폐정자 안으로 아침 햇살이 기둥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서화연은 무릎 위에 필사본을 펼쳤다. 심수련이 건넨 《독침 장인 도록》의 독침 제작 부분. 종이 가장자리가 습기에 눅눅했다. 배수로를 지나는 동안 깃에 스민 물기 탓이었다.
그녀는 먼저 이현을 돌아봤다. 외투를 덮은 그의 호흡이 한결 고르고 깊어졌다. 손등을 이마에 대자 열이 한창보다 많이 내렸다. 깨어날 때가 가까웠다.
서화연은 침낭에서 은침을 꺼냈다. 길이 두 치 닷 푼. 침 끝 가까이에 미세한 균열 하나.
필사본 셋째 장을 폈다.
거기 그려져 있었다. 독침 도면 열세 점. 각 도면마다 침체 말단의 균열 방향과 결의 깊이가 먹으로 세필 표기되어 있었다. 일곱째 도면의 균열이 유난히 익숙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번진 결. 침 끝에서 두 푼 위에서 시작해 침체 중간으로 굽어 들어간 선 하나.
서화연은 은침을 도면 바로 옆에 눕혔다. 같은 결. 같은 각도.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필사본의 장인 주석을 더듬었다.
‘해동 제일의 독침 장인, 승(承). 대비전 전속. 20년간 은엽초 독침만 400본 제작.’
대비전 전속.
서화연은 눈을 감았다 떴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은침은 1화부터 그녀 손에 있었다. 폐비 사건이 터지기도 전에 죽은 아버지의 유품. 검시 도구라며 남긴 유일한 물건.
그런데 그 침이 바로 대비전 전속 장인의 작품이었다.
은침을 들어 창문 쪽 빛에 비추었다. 균열의 가장자리에서 은엽초 특유의 부식 흔적이 옅은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독침으로 쓰인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훈증이나 접촉이 아니라 침 끝에 직접 독을 묻혀 썼을 때 생기는 흔적.
“무얼 보시오.”
목소리는 바닥에서 났다. 이현이 눈을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동공에 빛이 돌아왔다. 의식이 선명했다.
서화연은 필사본을 들었다.
“당신이 심수련에게 부탁한 물건.”
이현이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켰다. 느리게. 옆구리 상처가 당기는지 이를 악물었다.
“확인했소.”
“네.”
서화연이 은침과 필사본을 나란히 그의 앞에 놓았다.
“같은 장인의 작품입니다. 《독침 장인 도록》의 도면과 제 은침의 균열 패턴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현이 은침을 들었다. 빛에 비추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침체를 천천히 돌렸다.
“장인은 대비전 전속이오.”
“네.”
“폐비 독침도 같은 손에서 나왔소.”
“그렇습니다.”
이현의 검지가 접혔다 폈다. 그는 은침을 조심히 천 조각 위에 내려놓았다. 서화연이 말했다.
“이 은침은 아버지의 유품입니다. 1화부터 제 손에 있었습니다.”
이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눈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니까.”
서화연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폐비 독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침이 대비전 전속 장인의 작품임을 입증할 계보가 이 은침입니다. 같은 재료, 같은 결, 같은 부식 흔적.”
이현이 말했다.
“확실하오.”
“검시 기록의 자상 깊이와 침 길이도 부합합니다.”
서화연이 필사본을 덮었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침낭에 은침을 다시 넣고 단단히 말았다.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검시 도구가 아닙니다.”
이현이 자세를 바로 했다. 상처가 당겼지만 참았다.
“폐비 사건의 물증이오.”
“네.”
바깥에서 새 한 마리가 정자 기둥에 앉아 울었다. 아침 햇살이 정자 바닥의 먼지를 한 올 한 올 드러냈다.
이현이 외투를 밀어내고 완전히 일어나 앉았다. 그의 검지가 다시 접혔다 폈다. 서너 번 반복했다.
“사흘 뒤 자시까지.”
그가 말했다.
“나머지도 모읍시다.”
사흘이 지난 늦은 밤, 정적이 내려앉은 동궁 약방 안이었다. 서화연은 필사본을 펼친 채 이미 탁자 위에 올려진 은침을 향해 턱짓했다.
서화연이 손목을 놓았다. 햇살이 폐정자 기둥 사이로 기울어져 들어와 이현의 이마에 닿았다. 열은 내렸다. 숨결도 고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현이 눈을 떴다. 처음엔 천천히, 그리고 곧장 초점을 맞추었다. 깨어나자마자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얼마나 지났소.”
목소리는 잠겼지만 또렷했다. 서화연이 무릎 곁에 놓인 물수건을 접었다.
“한낮입니다. 열은 꺾였소.”
이현이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왼쪽 옆구리에 힘이 들어가자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봉합한 자리가 당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일어나 기둥에 등을 기댔다.
“추적대는.”
“동틀 무렵 다른 구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근처는 벗어났소.”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화연은 침낭에서 은침과 필사본을 꺼냈다.
“확인할 것이 있소.”
이현의 눈이 은침에 멎었다.
“균열이 보이는군.”
“예. 이 균열은 은엽초에 장기 노출됐을 때만 생깁니다. 그리고 균열의 폭과 깊이를 도록의 기록과 대조했습니다.”
서화연이 필사본 한 장을 펼쳤다. 독침 도면 아래에 작은 글씨로 침 끝 단면의 단조 흔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폐비 사건에 사용된 독침과 이 은침은 같은 장인이 만들었습니다. 망치 자국, 끝을 접는 각도, 식히는 방식이 일치합니다.”
이현이 필사본을 받아 들었다. 도면을 천천히 훑었다.
“도록은 어디서.”
“심수련이 건넨 주머니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대비전에 넣어둔 사람에게 미리 부탁한 물건이지요.”
이현이 잠시 침묵했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독초 전표 원본이 대비전 기록고에 있소. 청원지로 보관 중이다.”
“청원지라면 위조 흔적이 남을 터.”
“그렇소. 대비의 인장과 이 장인의 독침 발주 전표를 교차 검증할 수 있다. 대비가 직접 지시했다는 물증이 되는 거요.”
서화연이 필사본을 다시 집었다. 손가락이 도면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갔다. 장인의 이름과 소속을 적은 난이 있었다. 가는 붓글씨로 ‘대비전 전속’이라는 주석이 이름 옆에 달려 있었다.
손가락이 멎었다.
“……대비전 전속 장인이었군.”
이현이 그 대목을 보았다.
“그 장인이 만든 독침은 대비전을 통하지 않고는 발주할 수 없소. 독초 전표에 찍힌 인장과 이 도록을 함께 제출하면 대비의 연루를 입증할 수 있다.”
서화연이 필사본을 내려놓았다. 따가운 낮의 볕이 무너진 지붕 사이로 쏟아졌다. 공기 중에 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
“기록고의 구조를 아시오.”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소. 그중 서쪽 서가에 대비전 전용 문서가 별도 보관된다. 야간 순찰은 해시와 자시, 두 차례.”
서화연이 말없이 침낭에서 붓과 빈 종이를 꺼냈다. 은침과 나란히 놓고, 관찰 기록을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갔다. 균열의 길이, 깊이, 방향.
도록 해당 쪽수. 장인의 망치 자국과 침 끝 단면 형태. 증거 번호를 붙이고 마지막 줄에 서명했다.
이현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검시 기록을 작성할 때와 똑같은 손놀림이었다.
서화연이 종이를 말려서 포개고, 도록 필사본과 함께 기름종이에 싸서 품안에 넣었다.
“당신의 옆구리는.”
“봉합은 유지되고 있소. 통증은 있다.”
이현이 자신의 옆구리를 짚었다. 손가락이 천 위를 가볍게 눌렀다.
“기록고 진입은 내가 앞장서겠소. 잠금은 당신이.”
“석쇠 방식입니까.”
“그렇소. 은비녀 내부 구조를 응용하면 해제할 수 있다. 당신이 그 원리를 이미 확인했으니.”
서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창밖을 보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폐정자 마루에 그림자가 길어졌다.
서화연이 도록 필사본을 다시 펼쳤다. 이현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도면 아래 작은 글씨가 해 질 녘 불빛에 반짝였다.
독침 장인의 이름 옆. 그 옆에 붓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네 글자.
대비전 전속.
서화연이 그 글자를 짚었다. 이현이 일어나 허리춤에 장검을 고정했다. 동작이 한 번 멈췄다. 옆구리를 감싼 천이 약간 눌렸다가 풀렸다.
“해질녘에 출발하겠소.”
서화연이 필사본을 접어 품에 넣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