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36화

해가 완전히 진 뒤, 폐정자 마루에 스민 냉기가 발끝부터 올라왔다.

이현이 장검을 허리춤에 고정하고 일어섰다. 옆구리를 감싼 천 위로 손가락이 한 번 스쳤다. 더듬는 동작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었다.

서화연은 기름종이에 싼 도록 필사본과 은침 비교 관찰 기록을 품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은비녀는 이미 왼쪽 옷깃 안쪽에 꽂혀 있었다.

“경로를 말하시오.”

이현이 마루 아래로 내려서며 짧게 답했다.

“후원 담장 서북쪽. 배수로를 따라가면 감시 초소의 사각이 나온다.”

서화연이 침낭을 접어 구석에 밀어 넣고 그의 뒤를 따랐다. 폐정자를 나서자 풀숲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바람 한 점 없는 밤, 발걸음마다 마른 풀대가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이현이 담장 쪽에서 손을 들었다. 멈춤. 서화연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담장 너머로 횃불 하나가 지나갔다. 발소리는 한 사람. 리듬이 규칙적이었다. 야간 순찰조의 마지막 배치가 아직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현이 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서화연에게 건넸다. 경수소의 순찰 시간표 사본이었다. 해시 순찰 경로가 붉은 선으로 그어져 있고, 자시 배치는 다른 색으로 겹쳐 그려져 있었다.

서화연이 달빛 아래 종이를 펼쳤다. 자신이 챙겨온 야간 순찰 기록 사본과 나란히 대조했다.

“해시 순찰이 예정보다 늦었습니다. 자시 교대까지 남은 시간은……”

담장 밖 발소리가 멀어지는 방향을 확인했다. 서북쪽.

“반 시진이 안 됩니다.”

“충분하오.”

이현이 배수로 쪽으로 몸을 낮췄다. 돌로 쌓은 수로 벽면이 담장 아래로 이어져 있었고, 철책이 드리운 곳과 겹치면서 어둠이 짙게 고여 있었다.

두 사람은 배수로를 따라 담장 밑까지 기어 들어갔다. 습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화연의 소매 끝이 물에 젖었지만 손놀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담장이 끝나는 지점. 돌출된 감시 초소가 왼쪽으로 열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초소 창문에 등불이 반짝였다.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그림자.

이현이 속삭였다.

“교대한다.”

그림자가 초소 밖으로 나왔다. 다른 그림자가 다가와 인계를 주고받는 모습이 짧게 이어졌다. 이전 근무자가 초소를 떠났다.

새로 들어온 근무자가 초소 안에 자리를 잡았다. 찻잔을 따르는 소리가 밤공기를 뚫고 들렸다.

이현이 손가락 둘을 세웠다. 지금.

서화연이 허리춤에서 가느다란 철침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끝을 살짝 구부린 탐침. 다른 하나는 은비녀 내부 구조를 본떠 다듬은 석쇠 해제용 도구였다.

기록고 후문은 나무 문짝에 철제 빗장이 가로질러 있었다. 빗장 아래 자물쇠. 석쇠 방식.

서화연이 자물쇠 앞에 쪼그려 앉았다. 탐침을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천천히 돌렸다. 석쇠 핀의 간격을 손끝으로 읽는 표정이었다.

이현은 그 뒤에 서서 초소 쪽을 주시했다. 오른손은 장검 자루에 얹혀 있었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탐침이 첫 번째 핀을 걸었다.

“셋.”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석쇠 핀 세 개. 은비녀의 중공 구조와 같은 원리였다. 내부 공간을 핀으로 분할해 걸쇠를 잠그는 방식.

두 번째 핀. 철침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화연이 손목 각도를 바꾸지 않고 눌렀다.

딸깍.

세 번째 핀은 탐침을 뺀 자리에 두 번째 도구를 넣어 비틀었다. 손목이 꺾이지 않게 팔꿈치를 몸에 붙였다.

한 호흡 뒤.

철컥.

자물쇠가 열렸다.

이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눈이 한 번 깜빡였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서화연은 그 시선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빗장을 밀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기록고 내부. 공기는 건조했고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감쌌다.

서화연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이현이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다시 닫았다. 빗장을 거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서쪽 서가.”

이현이 입구에서 등을 돌렸다. 외부 감시를 맡겠다는 뜻이었다.

서화연은 품에서 작은 촛농 덩어리를 꺼내 바닥에 붙였다. 부싯돌을 한 번 쳤다. 불꽃이 심지에 옮겨붙자 손바닥으로 빛을 가렸다.

기록고는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쪽과 북쪽은 일반 행정 문서. 남쪽은 재정 장부. 서쪽은 대비전 전용.

서화연은 서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명부 기록 분류 방식이라면 삼중 기록 중 대비전이 별도 관리하는 사본은 겉표지 분류 기호가 아닌 속표지 이체자로 구분한다. 규장각 사본과 의금부 사본은 같은 외형이라도 속표지의 글자 하나가 다르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서가의 책등을 하나씩 짚으며 내려갔다. 을미년. 폐비 사건 연도.

열두 번째 책. 속표지를 펼쳤다.

아니었다.

열일곱 번째.

아니었다.

스물세 번째 책.

속표지 오른쪽 아래. 내명부 이체자 규칙. ‘사사(賜死)’라는 글자의 마지막 획이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규장각 사본에서는 이 획이 곧게 내려간다.

서화연이 숨을 들이켰다.

책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촛불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청원지 특유의 푸른 기름기가 섬유 사이에서 반짝였다.

첫 장. 폐비 서씨 사사 집행 기록.

약재 목록. 독초 혼합 탕약의 구성 성분이 열거되어 있었다. 부자, 천오, 감수——

서화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 아래. 먹물이 다른 곳보다 짙고, 섬유 결이 미세하게 일그러진 부분. 말소된 흔적이었다.

촛불 각도를 더 낮추자 푸른 기름기가 말소된 글자들의 원형을 드러냈다.

은엽초.

그리고 그 오른쪽. 내의원 전표 번호.

전표 번호는 은엽초의 이중 인장 반출 전표와 일치했다. 심수련이 건넨 기록에서 본 번호다.

말소된 항목을 덧씌운 새 글씨는 ‘사약’이라는 단어였다. 붓끝이 떨린 흔적이 있었다. 위조자가 서둘러 덧쓴 것이 분명했다.

서화연이 두 번째 장을 넘겼다. 집행 확인란. 서명이 세 개. 그중 하나는 최상궁의 필체.

서화연은 이체자 버릇 세 가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마지막 획을 안으로 꺾는 습관, ‘을’자의 첫 획을 길게 빼는 버릇, 옥편에도 없는 획 하나를 더하는 집착.

세 가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장. 은엽초 반출 전표 사본. 대비전 인장과 내의원 인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날짜.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그리고 그 아래, 반출 사유를 적는 칸. 원래 기록에 검은 횡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위에 작은 글씨로 ‘집행 용도’라고 다시 적혀 있었다.

청원지의 특성상 원래 글자를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횡선 아래로 빛을 투과하자 원래 문구가 드러났다.

‘독초 혼합 탕약 조제용——사용 금지 약재 포함.’

서화연이 세 장을 차례로 들추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현이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몇 장이오.”

“셋.”

서화연이 촛불을 끄고 세 장을 겹쳐 들었다. 일어서서 이현에게 다가갔다.

이현이 품에서 방수포를 꺼내 문서를 감쌌다. 네 귀퉁이를 접어 밀봉한 뒤 옷깃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

“나가겠소.”

그가 빗장을 풀었다.

문이 반쯤 열렸을 때, 이현이 멈췄다.

바깥에서 발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셋. 보폭이 짧고 불규칙했다. 순찰조의 규칙적인 걸음이 아니었다.

이현이 문을 닫지 않고 어깨로 살짝 밀어 붙였다. 틈새로 바깥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후문 앞 통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검은 옷차림. 허리띠 장식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대비전 표식.

추적대 선발대였다.

이현이 서화연을 뒤로 밀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증거를 몸에 붙이시오.”

서화연이 즉시 침낭을 열었다. 은침 케이스 안쪽 칸막이. 검시용 침을 보관하는 틈새에 방수포를 밀어 넣었다. 천으로 다시 감싸고 침낭을 닫았다.

이현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칼날이 달빛에 푸르게 빛났다.

“내 뒤로 나와서 통로 왼쪽. 벽면에 붙어서 후문 밖으로 빠지시오. 내가 신호할 때까지 움직이지 마시오.”

서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짧게 다스렸다.

문이 열렸다.

이현이 먼저 나갔다. 걸음은 빠르고 소리는 없었다.

첫 번째 추적대원이 그를 발견하기도 전에 이현의 왼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오른손 단검이 옆구리와 어깨 사이를 찔렀다. 칼끝이 근육을 비껴갔다.

“적——”

두 번째 추적대원이 소리치려는 순간 호루라기가 입술에서 떨어졌다. 이현이 단검을 거꾸로 쥐고 손잡이로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한 번. 추적대원이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대원이 칼을 빼들었다. 이현과 거리는 네 걸음.

좁은 통로. 벽이 양옆을 막고 있었다. 이현이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틀며 거리를 좁혔다. 단검과 칼이 부딪쳐 불꽃이 튀었다.

추적대원의 칼이 이현의 왼쪽 옆구리를 스쳤다. 천이 찢어졌다. 봉합 부위가 벌어지는 감각이 이현의 턱을 굳게 만들었다.

그가 신음이나 표정을 드러내기 전에 역수로 단검을 찔렀다. 허벅지 깊숙이. 추적대원이 비틀거렸다.

이현이 그의 손목을 꺾어 칼을 떨어뜨리고, 무릎으로 가슴을 가격했다. 몸이 벽에 부딪혀 미끄러졌다.

세 명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의식이 없었다.

이현이 허리를 폈다.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천을 적시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평소와 같았다. 그는 숨을 한 번 내쉬고 서화연을 향해 손을 올렸다.

서화연이 통로 벽면을 따라 빠져나왔다.

“이쪽 통로는 막다른 길입니다. 남쪽 배수로로——”

그녀의 발이 첫 번째 추적대원의 소매에 걸렸다.

금속성 소리.

서화연이 고개를 숙였다. 대원의 허리춤에서 작은 패가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금빛. 대비전 금패.

서화연이 한순간 허리를 굽혔다. 손가락이 금패에 닿았다. 차가웠다.

심수련과의 접선. 대비전 무인들이 휴대하는 금패는 내명부 내부 통행에도 사용된다. 이걸 가져가면 심수련과의 다음 접선 경로가 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추적의 근거가 된다. 금패 분실이 보고되면 대비전 전체가 폐쇄될 것이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금패 위에서 떨렸다.

이현이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금패를 보았다.

“가져가시오.”

한마디였다.

서화연이 금패를 집어 품안 도록 필사본 아래로 밀어 넣었다. 이현은 이미 몸을 돌려 통로 입구 쪽을 살피고 있었다.

“주력이 오고 있소. 남쪽 배수로.”

두 사람은 후문 밖 좁은 통로를 빠져나왔다. 뒤편에서 여러 발의 발소리가 기록고 쪽으로 몰려오는 것이 들렸다. 횃불 여섯 개가 담장 너머로 번져왔다.

서화연이 먼저 배수로로 뛰어내렸다. 물이 무릎까지 찼다. 이현이 뒤따라 내려왔다. 착지할 때 왼발이 살짝 비틀렸지만 곧장 균형을 잡았다.

두 사람은 물살을 따라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록고 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세 번 짧게 울렸다.

폐정자 옆, 반쯤 무너진 석축 너머로 헌종루 지하창고 입구가 드러났다.

서화연이 먼저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곰팡내 섞인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이현이 천천히 뒤따랐다. 왼쪽 옆구리를 감싼 천이 젖어 있었다.

서화연이 돌아보았다.

“앉으시오.”

이현이 흙바닥에 등을 기댔다. 서화연이 그의 상의를 젖혔다. 봉합 부위가 일부 찢어져 핏물이 번졌다. 피는 검붉게 식어 있었다.

이현이 입을 열었다.

“깊지 않다. 움직임 탓이오.”

서화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낭에서 은침을 꺼냈다. 상처 주변 삼 곳에 침을 놓았다. 손끝이 일정한 깊이로 침을 밀어 넣었다. 이현의 복부 근육이 한 번 수축했다가 풀렸다.

몇 호흡 뒤 출혈이 느려졌다. 서화연이 품에서 기름종이 꾸러미를 꺼냈다. 안에서 접은 천 조각을 집어 상처 위를 덮고 단단히 눌렀다.

“금패.”

서화연이 허리춤에서 작은 금속 조각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희미한 촛불에 대비전 문양이 드러났다.

“심수련과의 접선에 쓰겠소.”

“방법은.”

“이것을 남쪽 폐사 대웅전 서쪽 기둥 아래 두겠소.”

이현이 금패를 보았다. 숨을 한 번 고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를 알 만한 사람은 그 상궁뿐이오. 좋소.”

서화연이 은침 케이스를 열었다. 내부 칸막이 아래 청원지 세 장을 꺼내 무릎 위에 펼쳤다. 첫 장은 폐비의 사약 조제 기록에서 ‘독초 혼합 탕약’을 ‘사약’으로 덧쓴 부분. 두 번째 장은 을미년 시월 초이튿날 최상궁의 빈 전각 출입 전표. 세 번째 장은 백미초 반출과 용뇌향 잉크 사용 대조 기록이었다.

이현이 세 장을 차례로 훑었다.

“청원지 묵 흔적은 각도에 따라 남소. 덧쓴 먹물과 원래 먹물의 기름기가 다르다.”

그가 두 번째 장을 집어 불빛에 비스듬히 기울였다. 푸른 기름기가 옅게 떠올랐다.

“원본의 흔적.”

서화연이 받았다.

“이 세 장이면 대비전의 독초 전표, 최상궁의 출입 시각, 백미초 반출 기록이 한 줄로 연결되오. 독침 장인 도록과 은침 균열을 함께 제출하면 폐비 독살 지시의 전모를 의금부 심리 절차에서 입증할 수 있다.”

이현이 옆구리를 짚고 몸을 바로 세웠다.

“증거 사이에 빈틈은.”

“독침 발주서. 대비전 기록고 서쪽 서가.”

“내일 밤.”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이현의 이마에 얇은 땀이 배어 있었다. 통증 때문이었지만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당신의 상처가 문제요.”

“봉합만 유지되면 된다.”

서화연이 지혈 천을 들어 확인했다. 출혈이 멎었다. 그가 은침을 뽑아 천으로 닦은 뒤 케이스에 넣었다. 청원지 세 장과 금패를 다시 기름종이로 싸서 케이스 아래 칸에 밀어 넣었다.

이현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케이스 하나에 모든 증거가 있군.”

“은침도.”

서화연이 케이스를 닫으며 말했다.

“독침과 동일 장인의 작품이오. 이것도 물증이다.”

이현이 허리춤에서 청동 술병을 빼 한 모금 마셨다. 통증을 누르는 약주였다. 술병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윤공이 내 출생을 빌미로 나를 움직이려 했소. 실패했지만, 같은 수가 다시 나올 수 있소.”

서화연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당신의 출생이 심리 절차에서 공개될 위험.”

“그렇소. 대비전이 나를 공격할 지점이다.”

“그렇다면.”

서화연이 케이스 위에 손을 얹었다.

“당신이 먼저 증언하는 것이 낫소. 의금부 기록으로. 전 왕세자의 서자 신분을 스스로 밝히고, 폐비가 열한 살 소년의 상처를 지혈해주었다는 사실을 생체 증거와 함께 제출하시오.”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폈다.

“그건 빚이 아니라 진술이 되는군.”

“그렇소.”

서화연이 짧게 답했다.

“진실은 숨길수록 흠이 되오. 조건이 아니라 증거로 내놓으면 대비전도 건드리지 못한다.”

긴 침묵. 촛농이 흘러내려 바닥에 굳었다.

“알겠소.”

이현이 말했다.

“증언문 초안은 내가 쓰겠소. 생체 증거는 당신이 기록하시오.”

서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어 촛불 심지를 돋웠다. 불빛이 두 사람 사이의 증거 꾸러미를 비췄다.

그때였다.

위쪽 환기구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철갑이 돌 바닥에 스치는 마찰음이 뒤섞였다.

서화연이 은침 케이스를 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현이 검자루를 쥐고 천천히 몸을 세웠다.

발소리가 환기구 바로 위에서 멈췄다. 흙먼지 몇 알이 천장 틈새로 떨어졌다.

지상 쪽에서 무언가를 바닥에 끌던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멎었다.

이현이 먼저 나갔다. 걸음은 빠르고 소리는 없었다.

첫 번째 추적대원이 그를 발견하기도 전에 이현의 왼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오른손 단검이 옆구리와 어깨 사이를 찔렀다. 칼끝이
은비녀 아래 진실3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