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39화

환기구 너머로 동틀 녘 하늘이 빛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촛농이 나무판에 굳은 자국을 덧댄 시간, 장내관이 두드리고 간 밀서 한 통이 놓였다. 겉봉 없는 저마지를 뜯자 여섯 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서씨 집안의 마지막 아이는 살아있다.

서화연의 호흡이 멎었다. 마지막 획을 안으로 꺾고 '을'자의 첫 획을 길게 빼는 필체, 옥편에도 없는 획 하나를 더한 버릇까지 심수련이었다. 이어지는 구절은 더 짧았다.

은비녀 안. 진실이 남아 있다. 종이의 결이 고르지 않은 청원지 대신 평범한 저마지였다. 발각되어도 기록 대조로 추적되지 않도록 일부러 고른 것이다.

서화연은 증거 꾸러미에서 은비녀를 꺼내 촛불에 기울였다. 손끝이 중간쯤 이음새에 걸렸다. 좁은 구멍 안으로 불빛이 스며들자 은벽 안쪽에 금속 조각 그림자가 졌다.

표면에 긁힌 흔적이 빛의 각도에 따라 사라졌다 나타났다. 글자였다. 숨을 멈추고 비녀를 돌려 보았다.

각인은 촛불 하나로는 읽히지 않았다. 획 하나를 겨우 분간할 만한 크기로, '은' 자인 듯했다. 그다음 획은 끊겨 있었다.

각도를 두 번, 세 번 바꾸니 '은엽'까지는 읽히는 듯했다. 그 너머는 더 작고 깊었다. 마지막 순간에 떨리는 손으로 새겼을 흔적이 역력했다.

확대경이 필요했다.

서화연은 은비녀를 천에 감싸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의금부 검시실에는 놋쇠 테두리의 공용 확대경이, 고문서고에는 기록 필적 대조용이라 배율이 더 높은 청동 확대경이 있었다. 문제는 그곳이 지금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탄핵으로 관직을 박탈당한 그녀의 얼굴을 아는 서리들이 여전히 문서고 주변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옆구리 붕대 사이로 옅은 핏기가 번졌지만 이현의 호흡은 고르고 깊었다. 통증이 심해지기 전에 약기운이 든 모양이었다. 서화연은 구석에 쌓인 검은 두루마기를 집어 들었다.

남루했지만 어깨와 체구를 가릴 너비는 되었다. 소매 안 호신용 작은 칼 한 자루를 확인했다. 무술은 없었으나 검시관 시절 시신의 의복을 가르던 도구였다.

해시 순찰 이후 자시까지의 간격은 한 시진. 그 안에 문서고 서가 뒤편으로 들어가 청동 확대경을 찾고 은신처로 돌아와야 했다.

서화연은 증거 꾸러미 위에 편지를 올려놓았다. 심수련의 필체가 촛불 아래서 일렁였다. 서씨 집안의 마지막 아이. 그녀는 처음부터 서화연이 누군지 알고 은비녀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진실은 지금 품속, 은비녀 안쪽에 잠들어 있었다.

촛불을 끄고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환기구 너머 첫 새벽빛이 발끝을 비추었다. 이현의 고른 숨소리가 등을 밀었다. 열흘 전 이맘때라면 의금부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 제 명패를 내밀고 복도 끝 검시실로 향했을 것이다. 이제는 담을 넘고 그림자를 골라 걸으며 자물쇠를 피하는 길밖에 없었다.

두루마기의 옷깃을 여미며 중얼거렸다.

“폐비마마. 오늘 밤 안으로, 그 글자를 읽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의금부 고문서고의 공기는 차갑고 습했다. 서화연은 서가 사이 좁은 통로에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손끝으로 바닥의 석판 이음새를 더듬어 널빤지가 울리지 않는 곳만 골라 디뎠다.

확대경은 서쪽 구석 등록관의 집기함 안에 있다. 이현이 말한 대로였다. 서화연은 집기함 앞에 멈춰 서서 작은 놋쇠 자물쇠를 확인했다.

검시용 침낭에서 가장 가느다란 은침을 꺼내 자물쇠 구멍에 밀어 넣었다. 핀을 하나씩 밀자 세 번째 핀에서 자물쇠가 열렸다. 뚜껑을 열자 검은 벨벳 천에 싸인 확대경이 보였다. 손바닥만 한 청동 테두리 안에 두 장의 볼록 렌즈가 겹쳐 박혀 있었다.

확대경을 품에 넣고 집기함을 닫으려는 순간, 바닥에 놓인 문서철 한 묶음이 눈에 띄었다. 붉은 끈으로 묶인 표지가 살짝 벌어져 '경력 이현 귀속 문서'라는 필체가 드러나 있었다. 서화연은 끈을 풀고 세 번째 장을 펼쳤다.

윤공의 도장이 찍힌 서한이었다. 짙은 먹물, 날카로운 획.

'네놈의 태생을 알면 의금부 어느 누가 네게 고개 숙이겠느냐.'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 다음 행은 더 짧았다.

'폐세자 전하의 유일한 혈육이 살인자의 편에 서는 꼴이라. 기록은 내게 넘겨라.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서화연은 서한을 접어 소매 안쪽에 넣었다. 문서를 두 장 더 넘기자 마지막 장에서 이현의 필체가 나타났다. '목격 기록 원본, 산대청 방향에서 폐비 처소 쪽으로 향하는 인영—' 종이가 거기서 찢겨 있었다. 날카롭고 불규칙한 찢긴 자리. 누군가 일부러 찢은 흔적이었다.

바깥 복도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경비 초소에서 고문서고 쪽으로 오는 길목이었다. 서화연은 문서철을 원래대로 묶어 집기함에 되돌리고 뚜껑을 닫은 뒤 자물쇠를 걸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서가 가장 안쪽, 야간 순찰 기록 선반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문 앞에서 경비가 멈추고 등불 빛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해 뜨기 전이었다. 서화연은 몸을 일으켜 미리 풀어둔 환기창을 밀어 올렸다. 찬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소매 속 서한이 구겨지지 않도록 왼팔을 접은 채 창틀 위로 몸을 밀어 올렸다. 후원의 서쪽 담장 모퉁이. 착지할 때 발목에서 무릎까지 통증이 짧게 치솟았지만 곧 사라졌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후원을 가로질러 폐가로 향했다.

해가 중천에 가까워졌을 무렵, 서화연은 은신처 내실 바닥에 앉아 확대경을 눈높이에 맞춰 고정했다. 은비녀를 기름종이 위에 눕혔다. 이현은 약속대로 다른 빈 공방으로 이동한 뒤였다.

은비녀 내부의 금속 조각은 얇은 은판을 동그랗게 말아 비녀 몸체 안쪽에 밀어 넣은 구조였다. 맨눈으로는 은빛 실금처럼 보였던 그 조각을 확대경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촛불을 왼쪽으로 옮기고 각도를 비틀자, 은판 표면의 미세한 각인이 렌즈 속에서 희미하게 솟아올랐다. 한 획 한 획이 머리카락 굵기만 했다.

'銀葉草(은엽초)……'

서화연은 확대경 테두리를 움켜쥐었다. 은엽초. 《독초 도감》 아홉째 장에 실린 독초였다. 심장을 먼저 멈추게 하고, 맥박이 끊어진 뒤에도 동공만은 오래도록 열려 있다고 했다.

각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더 작은 글자가 이어졌다.

'진실을 아는 자……'

숨을 삼켰다. 렌즈를 살짝 돌려 초점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은판 표면이 긁힌 자국과 함께 왜곡되어 있었다.

바늘 끝으로 급하게 새기다가 미처 끝맺지 못한 듯 각인의 중간이 끊겨 있었다. '진실을 아는 자' 다음의 획은 '기록'이라는 글자의 첫 획처럼 보였지만, 그 너머는 더 이상 판독할 수 없었다. 은판 가장자리, 비녀 몸체 안쪽 곡면을 따라 구부러진 지점에서 각인의 깊이가 불규칙해진 탓이었다.

서화연은 확대경을 내려놓았다. 《독초 도감》의 해당 페이지가 떠올랐다. 은엽초는 궁중에서 관리되는 독초 중에서도 이중 인장 전표가 필요한 세 가지 중 하나였다. 폐비의 사약으로 쓰인 백미초와는 전혀 다른 독. 백미초는 서서히 장기를 마비시키지만, 은엽초는 즉시 심장을 멈추게 한다.

폐비가 사약으로 죽었다는 공식 기록은 백미초였다. 대비전 기록고에 보관된 청원지 조제 기록에도 백미초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왜 폐비는 은비녀 안에 '은엽초'를 새겼을까.

두 가지뿐이었다. 사약의 재료가 원래 백미초가 아니었거나, 폐비가 사약과는 별개로 이미 은엽초에 의한 독살 시도를 알고 있었거나.

서화연은 은비녀를 다시 기름종이에 올렸다. 각인은 확실히 끊겨 있었다. '기록'으로 추정되는 첫 획 이후의 글자는 표면의 긁힘과 부식 때문에 현재 상태로는 해독이 불가능했다. 더 높은 배율의 확대경이나, 은판의 곡면을 평면으로 펼쳐서 관찰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충분한 증거는 손에 있었다. 은엽초. 이 한 단어만으로도 폐비의 죽음에 사용된 독에 공식 기록과 다른 주장이 존재함이 입증된다. 그리고 이 은비녀가 단순한 유품이 아니라, 폐비가 죽음 직전에 남긴 법적 증언 매체라는 사실도 확정이었다.

서화연은 은비녀를 조심스럽게 천으로 감쌌다. 각인이 있는 내부 면이 마찰되지 않도록 부드러운 비단 안쪽을 덧대고, 증거 꾸러미에 다시 넣어 끈을 묶었다. 확대경은 《독초 도감》 필사본 옆에 두었다.

소매 속에서 윤공의 서한이 바스락거렸다. 서화연은 서한을 꺼내 반듯하게 펼쳤다. '폐세자 전하의 유일한 혈육이 살인자의 편에 서는 꼴이라'.

이현이 직접 말하지 않은 과거가 서한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목격 기록 원본을 찢어 숨긴 이유도, 윤공에게 취약했던 이유도 모두 이 한 문장으로 연결되었다. 이현은 지금 아무것도 모른 채 다른 은신처에 있다.

서화연은 서한을 접어 증거 꾸러미 아래 단단히 밀어 넣었다. 심리 전에 이 내용을 그에게 보여줘야 한다. 증인으로서 그의 증언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 정확히 알고 나서야 했다.

해질녘, 대비전 후원 폐가 담장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서화연은 이미 도착해 기둥 옆에서 손끝으로 은비녀의 끊긴 각인을 더듬고 있었다. 은엽초 세 글자를 확인한 뒤로 다른 글자가 이어질 것 같은데도 손톱이 걸리는 지점마다 획이 사라졌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바뀌었다는 느낌만으로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심수련이 담장 갈라진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남색 당의 자락이 벽돌에 스쳤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기다리셨소이다.”

심수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화연의 손에 쥔 은비녀를 보자마자 치마폭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었다. 눈동자가 비녀의 은빛 표면을 핥듯 훑고 지나갔다.

서화연이 은비녀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각인 일부를 읽었습니다. 은엽초. 폐비마마께서 직접 새기신 글자입니다.”

심수련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호흡 사이 간격이 한 박자 길어졌다.

“그 약초를 아시오.”

“예. 《독초 도감》에 기록된 독초입니다. 그런데 각인이…”

“끊겨 있지요.”

심수련이 서화연의 말을 받았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어린 소녀 같은 맑은 음색이 사라지고 내명부 최상궁 시절의 낮고 빠른 말투가 번져 나왔다.

“마마께서는 마지막 순간, 손끝 힘이 남아 있는 동안 최대한 새기셨소이다. 획이 흐려지고 끊긴 자리마다 마마께서 놓으신 숨결이 배어 있지요.”

심수련이 한 걸음 다가섰다. 변색된 검지와 중지가 은비녀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완전한 각인을 읽으려면 다른 기록이 필요합니다.”

“의금부 기록고.”

서화연의 대답에 심수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비마마의 검시 기록 원본. 두 장의 청원지 사이에 숨은 글자가 있소이다. 거기에 각인과 같은 단어가 적혀 있을 것이오.”

서화연은 숨을 들이쉬었다. 청원지 사이 숨은 글자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으나, 그것이 은비녀 각인의 해독 열쇠라는 사실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원본은 의금부에 있습니다. 이현 경력이…”

심수련의 표정이 굳었다. 손을 들어 서화연의 소매를 가볍게 붙잡았다.

“이현 경력께서 구금되셨소이다.”

서화연의 손에서 은비녀를 쥔 힘이 빠졌다. 심수련이 손목을 제대로 감싸 쥐었다.

“윤공이오. 역모 혐의를 씌웠습니다. 대비전 마마께서 서화연의 체포를 공식화하시고 의금부에 압력을 가하시는 중이오.”

심수련의 손가락이 서화연의 맥박 위에서 멈추었다.

“증거를 제출하기 전에 입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서화연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눈동자에 노을빛이 스며들었다.

“심상궁께서는 어떻게 그 사실을…”

“내명부에도 눈과 귀는 남아 있소이다. 윤공의 움직임은 오늘 낮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심수련이 서화연의 손을 놓았다. 대신 자신의 옷깃 안쪽을 짚었다. 은비녀를 꽂았던 자리, 지금은 비어 있는 그곳을 손가락이 스쳤다.

“나는 대비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감시가 소홀한 틈이 오늘 해질녘이 마지막이었소.”

한 걸음 물러서며 심수련이 덧붙였다.

“이현 경력을 도우시오. 그가 가진 기록과 그대가 가진 은비녀가 합쳐지지 않으면, 내일의 심리는 열리지도 못합니다.”

서화연이 은비녀를 품 안에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심수련은 이미 담장 틈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남색 치맛자락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발소리는 끝내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서화연은 잠시 그 빈 담장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폐정자 서북쪽, 은신처로 향하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한 숲길을 지나 천막이 쳐진 폐정자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림자가 움직였다. 한 사람의 체구가 어둠에서 떨어져 나오듯 앞으로 나섰다. 서화연의 걸음이 멈추었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품 안의 은비녀를 짚었다.

그림자가 완전히 드러났다. 이현이었다. 관복은 찢겨 있었고 왼쪽 소매 끝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손목에는 찢긴 수갑 자국이 검붉게 남아 피부를 긁은 흔적이 선명했다.

“더 이상 혼자 도망치지 마십시오.”

이현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소매 속에서 접힌 청원지 한 뭉치가 모서리를 드러냈다.

“내가 가진 기록과 당신이 가진 은비녀를 합쳐, 내일 의금부에서 대비에게 맞섭시다.”

서화연이 품에서 은비녀를 꺼냈다. 은빛에 걸린 마지막 노을이 이현의 손목 위 수갑 자국을 비추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은비녀를 이현이 든 청원지 곁으로 가져갔다. 두 물건 사이로 달빛이 막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화연은 증거 꾸러미에서 은비녀를 꺼내 촛불에 기울였다. 손끝이 중간쯤 이음새에 걸렸다. 좁은 구멍 안으로 불빛이 스며들자 은벽 안쪽에 금속 조각 그림자가 졌다.

표면에 긁힌 흔
은비녀 아래 진실3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