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40화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규장각 후원, 폐쇄된 지 오래된 서고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서화연은 담장을 따라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듯 걸음을 옮겼다. 손끝이 품 안의 은비녀를 짚었다.
서고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서가 너머로 희미한 촛불 하나가 떠 있었다. 심수련이었다. 그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오셨소이다.”
심수련의 목소리가 촛불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서화연의 발소리조차 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서화연이 촛불 앞으로 걸어갔다. 심수련의 손이 탁자 위로 올라왔다. 펼쳐진 손바닥 위에 은비녀 한 점이 놓여 있었다. 서화연의 품에 있는 것과 같은 문양, 같은 길이.
“이것이…”
“단지 추억의 물건이 아니오.”
심수련이 은비녀를 들어 촛불 아래로 가져갔다. 은빛 표면에 불꽃이 미끄러지며 번들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누렇게 말라 있었다.
“자세히 보셨소니까. 이 비녀의 속은 비어 있소.”
서화연은 숨을 멈췄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동일한 은비녀를 꺼내 촛불 곁으로 가져갔다. 두 개의 은비녀가 나란히 불빛을 받았다.
“속이 비었다는 것은…”
“들어 있소. 아주 작은 금속편이.”
심수련의 손가락이 은비녀의 머리 부분을 짚었다. 장식이 달린 그 부분을 손톱으로 살짝 두드렸다. 속이 빈 금속 특유의 맑은 울림이 정적을 깨고 일어났다.
“폐비 마마께서 마지막 순간, 이 안에 진실을 새기셨소.”
촛불이 흔들렸다. 서화연의 눈동자에 불꽃과 은빛이 동시에 맺혔다. 그녀는 은비녀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금속의 온도가 스며들었다.
“마마께서 직접… 이것에?”
“사약이 들기 전이었소. 손끝에 힘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을 오직 이것을 위해 쓰셨소.”
심수련의 목소리는 어린 소녀처럼 맑았으나, 그 맑음이 오히려 말의 무게를 더했다. 그녀는 상대가 충격을 소화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이 무렵, 의금부 기록고에도 촛불 하나가 홀로 타고 있었다.
이현은 윤공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도 뒤돌지 않았다. 그의 손은 청원지 뭉치 위에 얹혀 있었다. 기록고의 고요는 촛농 떨어지는 소리마저 삼킬 듯 깊었다.
“늦은 밤, 무슨 일이냐.”
윤공의 음성은 무거웠다. 그가 문을 닫았다. 걸쇠가 제자리에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산대청 별감의 목격 기록.”
이현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펴졌다.
“원본이 아직 존재하오.”
윤공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곧 사라졌다. 그는 수염을 한 번 쓰다듬으며 이현을 향해 두 걸음 다가왔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아실 것입니다.”
이현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더 낮았다. 울림이 없는, 단단한 돌을 굴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20년 전 폐비마마 사건 당시, 대비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언할 수 있는 기록. 아직 남아 있소.”
“네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게냐.”
“가지고 있소.”
촛불이 또 한 번 흔들렸다. 윤공의 그림자가 서가 위로 길게 번졌다 사라졌다.
“네 출신을 알면 누구도 네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윤공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협박이었다. 그는 더 다가서지 않았다. 대신 탁자 모서리에 손을 얹고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너를 거둔 것을 잊었느냐.”
“기억하오.”
이현의 왼손이 관복 소매를 내렸다. 손목의 수갑 자국이 촛불에 드러났다. 검붉게 피부를 긁은 흔적이 선명했다.
“나를 거둔 것은 제 출신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기 때문이오. 그 빚을 쥐고 있기 위해서였소.”
윤공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무사하길 바라지 않소.”
이현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키가 윤공보다 반 뼘은 더 컸다.
“다만 묻겠소. 폐비마마의 사약 조제 기록을 ‘백미초’로 위조하도록 지시한 것이 대비전이었소, 아니면 윤도사께서 직접.”
정적.
촛농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식으며 굳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윤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구분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네놈이 감히——”
“감히 묻는 것이 아니오.”
이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접고 펴는 버릇이 딱 한 번, 그리고는 완전히 멈추었다.
“증거를 확보했소. 청원지의 원본 흔적은 완전히 지울 수 없소. 위조된 기록 아래 원본의 묵 반응이 그대로 남아 있소.”
“네 출생을 의금부 전체에 공표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냐.”
윤공이 탁자를 내리쳤다. 촛불이 기울었다 넘어질 뻔했다가 다시 타올랐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청원지 뭉치를 들어 올렸다. 접힌 모서리가 촛불을 받아 푸르게 반짝였다.
“이 기록은 내일 공개 심리에 제출하겠소.”
“네 목숨을 걸겠다는 거냐.”
“이미 걸었소.”
이현이 물러서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윤도사께서 폐비 사건 당시 증거를 은폐하신 일. 이 기록과 함께 심리장에서 밝혀지길 바라오.”
“네놈……!”
윤공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는 다가서지 않았다. 이현의 손목에 남은 수갑 자국을 보며,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곤 몸을 돌려 기록고 문을 열어젖혔다.
“후회할 것이다.”
윤공이 문 밖으로 나가며 내뱉었다. 그의 발소리가 회랑을 따라 점점 멀어졌다.
이현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촛불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청원지 뭉치를 내려놓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희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규장각 서고의 촛불은 반쯤 줄어 있었다.
서화연은 심수련의 말을 다 듣고도 한동안 은비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금속편이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 폐비가 마지막 순간에 진실을 새겼다는 증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대비마마께서는…”
서화연이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은비녀가 사라진 것만 알고 계시오.”
심수련이 서화연의 질문을 가로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시오.”
“그럼 아직——”
“아직 안전하오.”
심수련이 촛불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손이 움직여 탁자 위의 은비녀 두 개를 나란히 정렬했다.
“다만 안전은 길지 않을 것이오. 대비전의 추적대는 이미 그대의 은신처를 샅샅이 뒤지고 있소.”
서화연은 품 안의 은비녀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천 안쪽으로 차가운 금속이 갈비뼈에 닿았다.
“이 안의 금속편을 확인하려면…”
“도구가 필요하오.”
심수련의 손가락이 자신의 은비녀를 가리켰다.
“내명부 약방에 비녀의 중공을 열어줄 도구가 있소. 사흘 후, 해가 지기 전에 준비해 두겠소.”
“사흘.”
서화연이 숫자를 되뇌었다. 심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그 은비녀를 절대 손에서 놓지 마시오. 대비전은 가짜를 만들 만큼 이 비녀를 두려워하오. 진짜가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을 걸고 빼앗으려 들 것이오.”
“심상궁께서는 왜…”
서화연이 물으려다 멈추었다. 심수련의 얼굴이 촛불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옅은 호박색 눈동자가 웃고 있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흘 뒤 약방에서 듣게 될 진실과 같은 무게요.”
심수련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남색 치맛자락이 촛불을 스치며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내명부를 향한 발걸음이 서고 바깥으로 사라져 갔다.
“기다리겠소. 그 약속 하나만은 꼭——”
“약속이 아니오.”
심수련이 문지방에 걸친 채로 짧게 대답했다. 발소리는 없었다. 그림자만 잠시 머물다 내명부 방향으로 흩어졌다.
서화연은 촛불이 완전히 타서 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둠이 서고 전체를 삼켰다.
그녀는 은비녀를 들어 올렸다. 빛은 없었지만, 손끝에 닿는 은의 무게와 차가움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흘 후, 내명부 약방.
그리고 내일, 의금부 공개 심리.
두 개의 시간이 가슴 속에서 나란히 박혔다. 서화연은 은비녀를 다시 품 안 깊숙이 밀어 넣고,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금부 기록고의 촛불도 꺼지고 있었다.
이현은 마지막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서화연의 은신처. 대비의 감시. 윤공의 다음 행보.
그는 청원지 뭉치를 소매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손목의 수갑 자국이 소매에 스치며 통증을 되살렸다.
그 자국을 바라보며 잠시 멈칫했다. 서화연이 이 자국을 보았을 때의 눈빛이 떠올랐다 말하지 않았다. 서화연의 눈이 그랬다. 묻지 않고 기다리는 눈.
관복 소매를 내렸다. 수갑 자국이 천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문을 열고 회랑으로 나섰다. 동녘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은 멀었다.
발걸음은 서화연의 은신처 쪽을 향하려다 멈추었다. 대비전의 감시가 따라붙을 수 있었다. 이현은 잠시 서 있다가, 반대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만날 수 없는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품에는 각각 은비녀와 청원지가 안겨 있었다. 증거는 제각각이었으나, 가리키는 진실은 하나였다. 그리고 그 진실을 향한 길은 이제 각자 걸어가야 하는 밤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