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41화
은신처의 촛불이 심지 끝에서 마지막으로 타올랐다.
서화연은 품에서 은비녀를 꺼내 식탁 위에 내려놓고 촛불을 새 것으로 갈았다. 심수련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사흘 뒤, 내명부 약방. 그리고 내일의 공개 심리.
약속된 신호의 발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서화연이 문을 열자 이현이 어둠 속에서 들여놓으며 소매를 털었다. 그의 손목에는 아직 수갑 자국이 검붉게 남아 있었다.
“심수련을 만났소.”
이현의 시선이 탁자 위 은비녀로 향했다.
“이 안이 비어 있습니다. 금속편이 들었고, 폐비 마마께서 마지막 순간 거기에 진실을 새기셨다고 합니다.”
이현이 은비녀를 받아 촛불 아래서 기울였다.
“확인할 방법이 필요하오.”
“의금부에서 몰수품 감정을 하던 장인이 한 명 있소. 퇴직 후 도성 변두리에 작업실을 열었지. 미세 각인과 금속 단조의 동일인 여부까지 판별하는 자요.”
서화연은 은비녀를 조심스레 품에 넣고 검시용 침낭을 챙겼다.
“갑시다.”
“기다리시오.”
이현이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회랑 방향에서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빨라졌다.
“지금.”
촛불이 꺼지고 어둠이 밀려들었다. 서화연은 서고 쪽 비상구로 움직였고, 이현은 탁자 위 밀서 조각을 챙겼다. 두 사람이 뒷문을 빠져나간 지 반 호흡도 안 되어 앞문 너머로 여러 사람의 발소리와 낮은 지시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둘은 담벼락에 바짝 붙어 숨을 죽였다.
서화연이 담장 위로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폐가 방향에서 화톳불이 피어오르고 의금부 수색대의 흰 등불이 움직이고 있었다.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골목 끝까지 울렸다.
“윤공이 보낸 것이오.”
서화연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두 개의 등불이 폐가 안으로 들어가고, 셋이 바깥을 에워쌌다.
“폐가 주변 빈 공방. 셋이 더 있습니다. 사흘 동안 돌아가며 머물기로 했소만——”
“이미 알고 있소.”
이현이 골목 반대편을 가리켰다. 수색대의 진형이 아직 닿지 않은, 도성 변두리 외곽 길이었다.
“장인의 작업실도 그쪽이오.”
등을 구부리고 골목을 빠져나가자 흰 등불 하나가 담장 위로 비쳐 들었다. 서화연의 걸음이 빨라졌고 이현은 그녀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좁은 골목을 세 번 꺾자 의금부의 등불은 보이지 않았다. 성벽을 따라 난 오솔길로 접어들자 이현이 걸음을 늦추었다.
“다 왔소.”
작업실은 성벽 바깥 첫 민가 너머, 버드나무 고목 옆의 작은 석조 건물이었다. 창문 하나에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현이 문을 두 번 두드리고 한 박자 쉰 뒤 세 번째를 두드렸다. 느린 발소리가 다가와 문이 열렸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촛불을 든 채 서 있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는 굳은살이, 손톱 아래에는 은빛 가루가 박혀 있었다.
“이 경력.”
노인의 시선이 이현을 훑고 서화연의 왼쪽 옷깃 근처에서 잠시 멈추었다 올라왔다.
“밤이 늦었소이다, 박 장인.”
노인은 대답 없이 문을 활짝 열었다.
작업실 안은 은 냄새로 가득했다. 선반에는 확대경, 집게, 단조용 망치와 정, 숯불 화로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반쯤 완성된 은 합 하나와 가루 은 접시가 펼쳐져 있었다.
서화연은 품에서 은비녀를 꺼냈다. 노인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폐비 마마의 은비녀요.”
노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은비녀를 받아 탁자로 가서 촛불을 옆에 놓고, 두 겹의 렌즈가 포개진 특수 확대경을 선반에서 꺼냈다.
“내부가 비어 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일 뿐 확대경을 눈에 대고 은비녀의 이음새를 따라 천천히 돌렸다. 숨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중공 구조가 확실하오. 잠금쇠는 없고, 은 자체의 탄력으로 닫힌 구조. 개봉하려면——”
그는 서랍에서 납작한 은침을 꺼냈다. 은비녀 끝부분을 확대경 아래 고정하고 은침을 미세한 틈에 밀어 넣자, 은비녀가 가볍게 벌어지며 손톱만 한 금속편 하나가 벨벳 천 위에 떨어졌다. 은빛이었으나 촛불 아래 미세한 푸른 기운이 표면에서 반사되었다.
노인이 집게로 금속편을 확대경 아래로 옮겼다. 이현이 바짝 다가섰고 서화연은 숨을 멈추었다.
노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각인이 새겨져 있소.”
서화연의 손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읽을 수 있습니까.”
노인은 대답 없이 렌즈를 한 겹 더 추가하고 촛불을 당겼다.
“미세 침각. 은침 끝에 특수 합금을 입혀 금속 표면을 새겼소. 같은 재질의 은으로 덧씌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게——”
말이 끊겼다. 노인이 확대경을 내렸다가 심호흡 후 다시 들어 올렸다.
“은엽초.”
서화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은엽초 독침 제작자…’”
노인이 금속편을 회전시켰다.
“‘…김 씨 장인의…’”
서화연은 이현을 보았다. 이현의 얼굴은 이미 이 각인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 단호했다.
“단조 표식이 있소이다. 수은 과다 혼입 흔적. 열처리 균열 패턴까지 동일하오. 의금부에 독침 제작 발주서의 도면 열세 점 중 하나와 정확히 일치하는 필법이오.”
이현이 숨을 들이쉬었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희게 바래졌다.
노인이 금속편을 다시 돌렸다. 호흡이 한 번 끊어졌다.
“…마지막 부분.”
글자를 한 자 한 자 밀어 올리듯 읽었다.
“‘진실은… 반드시…’”
서화연의 눈이 확장되었다.
“뒤가 끊겼습니다.”
노인이 확대경을 내리고 서화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각인은 여기서 끝이오. 손이 멎은 듯한 흔적이 마지막 획에 남아 있소. 힘이 다한 자리.”
이현이 탁자 옆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손목의 수갑 자국을 소매로 덮었다. 서화연은 금속편에 손을 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선 채 숨결 한 번으로 작은 촛불을 흔들었다.
이 각인은 대비의 범행을 직접 가리키는 물증이었다. 김 씨 장인의 이름은 대비전 서화각에 속한 자. 그의 독침 제작 기술이 이 금속편에 증거로 남아 있었다.
“본래대로.”
이현의 낮은 목소리에 박 장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집게로 금속편을 은비녀의 중공 안으로 밀어 넣고 은침으로 이음새를 따라 압력을 가했다. 은비녀가 부드럽게 닫혔고 접합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은비녀를 벨벳 천으로 닦아 서화연 앞에 내려놓았다.
탁자 위 은비녀는 처음과 다름없이 고요했다. 서화연이 손을 뻗자 은에 닿은 손끝이 차가웠다.
“머물 공간이 있소.”
박 장인이 뒷문 쪽을 가리켰다. 작업실 뒤편에 요 두 개와 물 한 그릇이 놓인 작은 방이 딸려 있었다.
“의금부 수색대가 도성 안을 샅샅이 뒤질 것이오. 동트기 전까지는 여기가 안전하오.”
서화연이 은비녀를 품에 넣고 고개를 숙였고 이현도 짧게 허리를 굽혔다. 노인은 손을 들어 답례를 대신하고 촛불 하나만 남긴 채 안쪽으로 물러갔다.
작업실에 남은 불빛 하나가 숯불 화로 옆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서화연은 요 주변에 쭈그리고 앉아 은비녀를 다시 꺼냈다. 확대경 너머 진실은 반드시——거기서 끊긴 문장, 힘이 다해 멎은 마지막 획이 아직 눈에 선연했다.
이현이 맞은편 요에 앉아 청동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소매에 넣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벨벳 천이 깔린 탁자와 한 자 간격뿐이었다.
“내일 공개 심리에서——이 각인에 있는 김 씨 장인의 이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대비전께서 우길 여지가 있소이다.”
이현은 대답 없이 들으며 오른손 검지를 접었다 폈다 했다.
“하지만 심수련 최상궁의 증언과 검시 기록 숨은 글자가 결합된다면, 폐비 마마의 마지막 순간에 닿을 수 있소.”
이현이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흘. 그 안에 내명부 약방에서 금속편의 전문을 확인하오.”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촛불이 작게 박혔다.
“그리고 내일은. 청원지 기록과 검시 원본을 제출하오. 물증만으로 시작하는 것이오.”
서화연은 그 말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 사이의 촛불이 조용히 줄었다. 창밖으로 동녘 하늘은 아직 어두웠고, 은비녀와 청원지, 두 증거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주인 품에 들어 있었다. 내일과 사흘 뒤, 두 개의 시간이 숯불처럼 은근히 타오르고 있었다.
작업실 문이 열리기 전, 서화연은 장인이 건넨 은비녀를 품에 넣고 탁본 종이를 소매 속으로 접어 넣었다. 금속 냄새와 밀랍 냄새가 손끝에 배어 있었다.
이현이 허리띠의 검율패를 한 번 만졌다.
그때였다.
바깥 회랑에서 장화 밟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쇳소리가 섞인 발걸음. 의금부 포졸 특유의 박자였다. 이현의 손이 서화연의 소매를 짚었다.
“뒤로.”
문이 열렸다.
윤공이 먼저 들어왔다. 체포를 위한 검은 철릭에 가죽 보호대 차림이었다. 뒤로 의금부 포교 넷이 횃불을 들고 섰다.
“경력 이현. 네 놈이 여기 있을 줄 알았다.”
윤공의 목소리는 분노를 누른 톤이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공의 어깨 너머로 포졸들의 숫자를 세었다. 넷. 그리고 윤공.
“서화연을 넘겨라. 네 출생을 공개하겠다던 내 말. 아직 유효하다.”
이현이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니오.”
한 글자 한 글자가 보고하듯 단단했다.
윤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너를 유배지에서 거둔 지 칠 년이다. 네 출신을 숨겨준 것도, 관직에 올린 것도 나다. 그 빚을 지금——”
“빚은 없소.”
이현이 허리띠의 검율패를 뽑아 올렸다. 은빛이 횃불에 반사되어 천장을 쓸었다.
“이것으로 갚았습니다. 칠 년이면 충분합니다.”
검율패가 작업대 위에 내려놓아졌다. 금속이 나무에 닿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윤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산이 틀어진 당혹감이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묻겠습니다. 윤 도사께서는 대비전의 명으로 폐비마마의 검시 기록을 은폐하셨습니까.”
포졸 하나가 횃불을 움켜쥐었다. 나머지 셋은 시선을 바닥에 박았다.
“이현. 멈춰라.”
“멈추지 않겠습니다.”
이현이 품속에서 청원지 뭉치를 꺼내 작업대 위 검율패 옆에 올렸다.
“이것은 폐비마마 사약 기록의 원본입니다. 위에는 ‘독초 혼합 탕약’이라 적혀 있고, 그 위에 누군가 ‘사약’이라 덧썼습니다. 덧쓴 자는 대비전 서화각의 최상궁. 그리고 이 덧쓰기를 묵인한 자가——”
“닥쳐라!”
윤공이 칼자루를 쥐었다 놓았다. 손가락에 땀이 배어 있었다.
서화연이 작업대 앞으로 걸어나와 은비녀를 가슴 높이로 들었다.
“이 은비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윤공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폐비 서씨 사약 당일, 폐비마마께서 직접 안쪽 면에 진실을 새기셨습니다. 독초의 이름과, 대비전의 지시를.”
포졸들의 호흡이 한 박자 멎었다.
“지금 이 은비녀를 의금부 정식 증거로 제출합니다.”
“거짓이다!”
윤공이 소리쳤으나 칼은 뽑지 못했다. 포졸들의 발이 제자리에서 물러났다.
“대비전 서화각에 보관된 진품은——”
“가짜입니다.”
서화연이 은비녀를 횃불 아래로 내밀었다. 불빛에 은 표면의 미세한 각인이 드러났다.
“대비전에 보관된 것은 대비마마께서 따로 제작하신 모조품. 반면 이것은——”
“네 년이 무슨 근거로——”
“근거라면 여기 있습니다.”
서화연이 소매에서 탁본 종이를 반쯤 펼쳐 들었다. 각인 중 ‘은엽초(銀葉草)’라는 세 글자가 횃불 아래 드러났다. 나머지 행은 접혀 있었다.
“읽어드릴까요.”
윤공이 반 걸음 물러났다. 포졸들의 횃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이현이 작업대 위의 검율패를 다시 짚었다.
“윤 도사. 지금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단—— 이 자리에서 들은 것들은, 내일 공개 심리에서 모두 증언될 것입니다.”
윤공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칼자루에서 손이 떨어졌다.
“…철수한다. 전부, 철수.”
그는 등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포졸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발소리가 회랑 밖으로 사라졌다.
서화연이 탁본을 접어 품에 넣었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이현이 그 손을 잡지는 않고 시선만 짧게 머물렀다.
“장인. 오늘 여기서 본 일은——”
“내 입은 처음부터 닫혔소.”
장인이 풀무 옆에서 허리를 폈다.
“칠십 년 동안 궁중 장인의 일을 봐왔소. 어느 편에 서지 않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오.”
서화연이 허리를 숙여 깊은 목례를 했다. 장인은 손을 들어 뒷문을 가리켰다.
대비전 서화각. 동녘이 채 밝지 않은 시각이었다.
윤공은 대청 마루에 꿇어앉아 있었다. 열린 격자창 너머로 대비가 앉아 있었다.
“은비녀를 확인했다.”
대비의 목소리는 낮고 졸음기가 없었다.
“각인도.”
“예. 폐비마마의 수결과… 은엽초의 글자가.”
윤공의 음성은 무게를 잃고 바닥을 굴렀다.
격자창 안에서 찻잔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
“이현은.”
“검율패를 반납하고… 공개 심리에서 폐비마마의 사약 기록 원본을 제출하겠다고 했습니다.”
긴 침묵.
“서화연이라는 검시관은, 은비녀를 포졸들 앞에서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탁본도——”
“됐다. 더 이상 저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듣고 싶지 않구나.”
창문이 안쪽에서 닫혔다.
“최상궁. 의금부에 전하라. 검율대리 서화연, 전 경력 이현을 역모 혐의로 체포하라. 두 사람은 폐비의 유품을 사칭하고 궁중 기록을 위조하였으며 대비전을 거짓으로 모함한 죄를 물을 것이다. 체포령은 즉시 도성 전역에 발부하고, 윤 도사가 총괄 지휘하라.”
윤공의 이마가 마루 바닥에 닿았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최상궁이 붓과 종이를 가지러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대비전 바깥 회랑으로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윤공은 마루에 꿇어앉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손가락이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나뭇결을 따라 움직였다.
칠 년이었다. 이번 아침으로, 완전히 끝났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골목. 돌바닥에는 밤사이 이슬이 젖어 있었다. 서화연과 이현은 작업실 뒷문으로 나와 담장을 따라 걸었다.
이현이 골목 끝에서 멈췄다. 담장 너머로 포졸의 장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섯, 혹은 일곱.
“이쪽으로.”
그는 서화연의 팔꿈치를 짚어 골목 안쪽으로 밀었다. 골목이 둘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이현이 오른쪽을 가리키려다 멈췄다. 저편에서도 발소리가 났다.
서화연이 소매에서 탁본 종이를 꺼냈다. 이슬에 젖은 모서리가 구겨졌다.
“경력. 이걸 심상궁에게 전해주십시오.”
은비녀 각인의 일부가 먹으로 찍힌 탁본이었다. 이현이 말 없이 받았다.
그 순간.
“여기다!”
골목 입구에서 윤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장화 소리가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