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43화
폐가의 촛불이 반쯤 줄었을 때, 서화연은 은비녀 탁본을 다시 펼쳤다.
『진실은 반드시 기록에 남는다.』
손가락으로 획을 하나씩 더듬었다. 끊긴 자리, 흐려진 자리. 폐비의 숨결이 멈춘 지점마다 먹의 농도가 달랐다.
이 문장을 청원지 기록과 대조해야 한다. 사흘 뒤 내명부 약방. 그러나 그전에 삼중 기록 중 하나라도 먼저 확인할 수 있다면——
이현이 구금되기 전 알려준 이름이 떠올랐다. 규장각 서리, 민가. 폐비 사건 당시 기록 정리를 담당했던 자의 조카. 윤공의 감시망에서 약간 벗어난 인물.
연락법은 간단했다. 규장각 후문 주변의 돌담, 아래서 세 번째 돌틈에 대나무 잎을 끼워두면 해질녘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서화연은 평민 여인의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었다. 검시관 복장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은비녀 원본은 가슴께 품에 넣고, 탁본 사본은 소매 안쪽에 접어 넣었다.
함을 열어 증거 꾸러미를 확인했다. 심수련의 진술서, 약주머니, 폐비 유언 기록. 손바닥으로 마룻바닥을 두 번 눌러 헐거워진 틈이 없는지 확인한 뒤 판자를 덮었다.
동녘 하늘은 이미 완전히 밝아 있었다. 안개가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안개 낀 골목을 따라 규장각 후문 쪽으로 걸었다. 장에 나온 아낙네들 사이에 섞여 걷는 평민 차림은 낯설었지만, 어깨의 힘을 빼자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규장각 후문 돌담. 아래서 세 번째 돌틈.
서화연은 주변을 한 번 훑고 허리를 굽혀 대나무 잎을 끼웠다. 약속된 신호.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물러나 길 건너 찻집으로 들어갔다. 창가 자리는 아니었다. 구석에 앉아 문 쪽을 볼 수 있는 자리.
찻물이 식을 때쯤, 민 서리가 나타났다.
회색 도포에 손에는 장부 한 권. 이현의 묘사와 일치했다. 나이 오십 정도, 소매가 닳았지만 옷은 깨끗했다. 그가 돌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대나무 잎을 확인하는 순간——
골목 양쪽에서 검은 옷차림의 남자들이 몰려나왔다.
허리띠의 금박이 안개 속에서도 선명했다. 대비전 표식.
“민가. 규장각 서기실 서리.”
선두에 선 자가 단문으로 읊조렸다.
“역모 연루 혐의로 연행한다.”
민 서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장부가 땅에 떨어졌다.
“내, 내가 무슨——”
“네 숙부가 폐비 사건 기록을 불법 열람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의금부로 가서 직접 진술하라.”
서화연의 손이 찻잔을 감쌌다. 숙부의 기록 열람. 이현이 민 서리를 연락책으로 삼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대비전은 이미 그 연결고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민 서리가 끌려갔다. 떨어진 장부는 순찰대원이 주웠다. 찻집 안으로 시선을 돌린 자가 한 명 있었다.
서화연은 찻값을 탁자 위에 올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등 쪽으로 뒷문이 있었다.
뒷문 너머는 좁은 골목이었다. 세 걸음 만에 오른쪽으로 꺾고, 곧장 빨랫줄이 걸린 담장 아래로 몸을 숙였다.
발소리가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이쪽인가?”
“아니다. 저긴 막다른 길이야.”
발소리가 멀어졌다.
서화연은 담장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규장각은 막혔다. 삼중 기록 중 하나. 그리고 그녀를 연결해줄 유일한 궁내 조력자가 방금 사라졌다.
같은 시각, 의금부 지하 심문실.
이현은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곧은 등. 탁자 위의 등잔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쇠창살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했다.
윤공이었다.
손에 문서 한 묶음. 허리춤에는 의금부 도사(都事)의 인장이 달려 있었다.
“밤은 편히 보냈느냐.”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공이 탁자 건너편에 앉았다. 문서 묶음을 탁자 위에 펼쳤다. 이현의 얼굴에서 손목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수갑 자국이 검붉게 남아 있었다.
“내 요구는 단순하다.”
윤공이 첫 장을 밀었다.
“네가 은닉한 목격 기록을 제출하라. 그러면 역모 혐의는——”
“없던 일이 되겠습니까.”
윤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화연과 내통한 정황은 이미 충분하다. 하지만 기록을 제출하고 그녀의 소재를 알린다면——”
“소재는 모릅니다.”
“알더라도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이현은 묵묵히 윤공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테이블 아래에서 접혔다 폈다. 세 번.
“내일 공개 심리. 거기서 모든 기록을 제출하겠다고 했소.”
“공개 심리?”
윤공이 짧게 웃었다.
“네가 서 있는 심문실은 공개 심리가 열리는 전당(殿堂)이 아니다. 여긴 지하다. 지하에서는 누구도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문서 한 장을 들어 이현 앞으로 밀었다. 역모 혐의 공식 기록.
“서명하라.”
이현은 읽지 않았다.
“무엇에 대한 서명입니까.”
“네 출생을 알았다는 확인이다. 폐세자의 서자. 왕실 혈통을 숨기고 의금부에 잠입한 죄. 그리고 폐비 사건 재심을 빌미로 현 왕실의 권위를 훼손하려 한 역모——”
“사실이 아니오.”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
윤공이 붓을 내밀었다.
“대비마마께서 그렇게 기록하라 하셨다. 네가 거부하면 서화연에게도 동일한 혐의가 적용된다. 폐비의 마지막 혈육이 꾸민 역모. 이거 하나면 서 씨 일족의 남은 핏줄까지 뿌리째——”
이현의 눈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대비마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소?”
“직접 들은 명이다.”
윤공은 붓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먹물이 종이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
“칠 년 전, 유배지에서 너를 거둔 것은 내 선택이었다. 네 출생을 알고서도. 세상에 빚보다 단단한 굴레는 없으니까.”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탁자 아래에서 접혔다.
“하지만 그 빚은 오늘로서——”
“끝내겠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윤공이 일어났다.
“마지막 기회다. 서명하라. 그러면 서화연의 사지를 공개 심리 이전에 내가 직접 확인해 주겠다. 대비마마께서 허락하셨다.”
이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등잔 불빛이 회색 기운 도는 눈동자를 스쳤다.
“그 말은, 대비마마께서 서화연의 생사를 조건으로 저를 통제하려 하신다는 뜻이겠군요.”
윤공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절하겠소.”
이현이 붓을 탁자 반대편으로 밀었다.
“서명하지 않을 테니 절차대로 하시오.”
윤공의 턱 근육이 움직였다. 붓을 집어 문서를 접었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문 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의금부 감찰 두 명이 들어왔다. 손에는 수갑.
“의금부 전 경력 이현을 역모 혐의로 정식 체포한다. 독방에 수감하고, 모든 소지품을 압수하라.”
이현이 일어났다. 감찰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검붉은 자국 위로 쇠가 조여들었다.
끌려가기 직전, 그가 윤공을 돌아봤다.
“한 가지만 묻겠소.”
윤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저를 거둘 때부터, 오늘을 계산하셨소?”
윤공의 손이 잠시 멈췄다. 대답 대신 등잔을 입김으로 껐다.
이현은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안개는 완전히 걷혔다.
서화연은 내명부 약방 후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심수련이 알려준 벽돌 틈새. 작은 흰 돌을 박아둔 자리. 위급할 때만 확인하는 비밀 표식.
약방 후문 일대는 평소보다 고요했다. 지나가는 궁녀들의 걸음이 빨랐다. 서화연은 몸을 낮춰 담장을 따라 벽돌 틈새에 다가갔다.
흰 돌이 없었다.
대신 작은 천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뽑아보니 세저포. 내명부에서만 쓰는 천.
매듭이 한 개.
'진퇴양난(進退兩難), 기다려라.'
매듭 수는 기다려야 하는 날짜가 아니었다. 하나. 즉시 물러나라는 뜻.
발소리.
서화연은 천을 품에 넣고 뒤로 물러났다. 약방 정문 쪽에서 대비전 상궁 두 명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심 상궁께서 오늘 약방에 들르지 않으셨소.”
“네, 대비마마 처소에 계속——”
한 상궁의 시선이 골목 쪽으로 향했다.
서화연은 이미 몸을 돌려 뒷길로 접어든 뒤였다.
내명부도 막혔다. 규장각도, 의금부도.
삼중 기록 모두 손에 닿지 않았다.
해질녘. 폐가 은신처.
서화연은 벽 아래 함을 열었다. 증거 꾸러미는 그대로였다. 심수련의 진술서 위에 은비녀 탁본을 포개고, 그 위에 약주머니를 올렸다.
세 가지 증거. 그러나 기록과 대조할 청원지가 없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간격. 세 번, 한 박자.
정보원이었다. 의금부 하급 서리. 이현이 윤공과 대치하기 전 미리 심어둔 또 다른 연락책.
서화연이 문을 열자, 젊은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소식입니까.”
“이현 경력께서——”
남자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역모 혐의로 공식 체포되셨습니다. 독방 수감. 외부 접촉 전면 차단. 그리고 의금부 전역에 대비전 감시 인원이——”
“그 혐의의 근거는.”
“폐세자의 서자 출신을 숨기고 의금부에 잠입한 것. 그리고 폐비 재심을 빌미로——”
“알겠습니다.”
서화연이 말을 끊었다. 손이 문틀을 움켜쥐었다.
“더 전할 말이 있습니까.”
“……민 서리가 연행되었습니다. 규장각 쪽도 완전히——”
“그것도 이미 압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물러나시오.”
서화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여기 더 오래 머물면 당신도 위험하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발소리가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서화연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탁자 앞으로 돌아왔다. 촛불을 켰다. 은비녀 탁본을 펼쳤다.
『 진실은 반드시 기록에 남는다 』
이제 이 열 글자만이 남았다.
의금부도, 규장각도, 내명부도 닿지 않았다. 이현은 독방에 갇혔고, 민 서리는 연행됐으며, 심수련은 감시 속에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삼중 기록을 대조할 길은 사라졌다.
그러나 은비녀는 여기 있었다.
서화연은 천천히 품에서 은비녀 원본을 꺼냈다. 촛불에 비친 은빛 표면. 그 안쪽에 새겨진 각인.
폐비가 마지막 숨결로 새긴 진실. 궁중의 모든 기록을 대신할, 단 하나의 증거.
은비녀를 두 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금속에 손바닥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사흘 뒤 내명부 약방. 심수련이 도구를 준비하겠다고 약속한 그 자리. 대비전의 감시가 궁 전체를 덮고 있지만, 그곳만은——
문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규칙적이지 않았다. 두 명. 한 명은 절뚝이는 듯 걸음이 불규칙했고, 다른 한 명은——
발소리가 멈췄다.
바로 문 앞에서.
서화연의 손이 은비녀를 움켜쥐었다. 촛불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