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44화
촛불이 흔들렸다.
서화연은 은비녀를 품 깊숙이 밀어 넣고 숨을 멈췄다. 왼손은 탁자 위 탁본을 뒤집어 감췄다.
문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서 검율.”
여자였다.
“심 상궁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내명부 약방 후문으로——”
서화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비전 순찰이 이 근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나오시지 않으면——”
발소리. 절뚝이는 쪽이 먼저였다. 이어서 다른 한 명도 따라 움직였다.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소리.
서화연은 빗장을 풀지 않았다.
대비전 순찰이 근처에 있다면 이미 알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문을 두드린 것은——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촛불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창틈으로 빛이 새지 않도록 천을 덧대고, 탁자 위 탁본을 말아서 품에 넣었다. 은비녀 원본은 따로 주머니에 싸서 옷깃 안쪽에 고정시켰다.
증거 꾸러미를 열었다.
약주머니. 은침이 든 침낭. 청원지 탁본 여러 장. 봉인해둔 협박 서신 사본.
그리고 깨진 도자기 조각.
서화연은 그 조각을 집었다. 여덟 번째 화에서 입수한 물건. 폐비의 옛 거처 바닥에 박혀 있던 파편. 표면에 새겨진 글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또렷했다.
『……사사로운 독초로 숨을 거두게 하리라……』
대비의 협박 서신이었다.
그동안 이 도자기 조각은 단독 증거로서 한계가 있었다. 협박자가 대비라는 것을 입증할 다른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은비녀 각인. 『은엽초』라는 독초의 이름. 그리고 심수련이 증언한 대비의 직접 명령.
서화연은 도자기 조각을 탁본 옆에 놓고 촛불을 가까이 당겼다.
사흘 뒤 내명부 약방에서 심수련이 준비하겠다고 한 도구. 청원지와 은비녀 각인의 대조.
그러나 그 자리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미 대비전 순찰이 은신처 근처까지 좁혀오고 있었고, 규장각 민 서리와의 연락은 끊겼으며, 이현은 독방에 갇혀 있었다.
서화연은 증거 꾸러미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폐가 주변에 빈 공방 세 개가 더 있었다. 이현이 알려준 예비 은신처. 해가 뜨기 전에 옮겨야 한다.
짐을 챙기려는 순간——
문틈으로 작은 천 조각이 밀려 들어왔다.
흰 세저포. 매듭 하나.
서화연의 손이 멈췄다. 내명부의 약속 표시. 매듭 하나는 하루——내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당장 내일은 심수련과의 약속이 없는 날이었다.
매듭 하나. 이것은 날짜 표시가 아니었다.
한 번 만나자는 신호였다.
서화연은 천 조각을 집어 들고 문을 열었다.
바깥은 어둠뿐이었다. 골목 초입에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절뚝이는 걸음은 사라지고, 가벼운 발소리만이 가까워졌다.
젊은 여자였다. 내명부 하급 상궁 복장.
“심 상궁마마께서 기록고 서쪽 폐서고에서 기다리십니다. 지금 바로.”
“무슨 일인가.”
“대비전에서 내명부 기록 열람 전면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오늘 밤을 넘기면 모든 기록——
상궁은 말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모든 관련 기록이 서화각으로 이송됩니다. 내일이면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서화연은 은비녀를 품에 확인했다.
“안내하시오.”
규장각 폐서고 앞은 처음 왔을 때와 같았다. 먼지 쌓인 책장, 습기로 눅눅한 공기. 그러나 이번에는 촛불이 한 자루 켜져 있었다.
심수련은 서가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왼손에 종이 뭉치를 쥐고.
“오셨소이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서화연이 다가서자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내명부 소장 청원지 기록 중——폐비 사건 관련 세 페이지의 사본이옵니다.”
서화연은 받아 들었다. 촛불 아래 첫 장을 폈다.
청원지 특유의 푸른빛이 종이 결을 따라 번져 있었다. 공식 기록 용지였다.
“어떻게.”
“청소 궁녀가 서화각에서 빼낸 문서철 속에 들어 있었사옵니다. 대비께서 감춰두신 내명부 기록 원본.”
심수련의 오른손 검지가 종이 위를 짚었다.
“원본은 이미 서화각으로 옮겨진 뒤였소이다. 그러나 청원지는 옮기기 전에 내명부에서 작성된 까닭에——사본이라도 묵의 흔적은 남아 있소.”
“대비께서 왜 내명부 기록을.”
“대비전 기록과 내명부 기록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심수련은 말을 끊고 문 쪽을 돌아봤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순찰이었다.
“시간이 없소이다. 이 사본을 받은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서화연은 종이 뭉치를 품에 넣었다. 심수련은 고개를 숙였다.
“증언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소이다. 부디——”
“그날까지 무사히.”
서화연이 말을 받았다. 심수련의 입술이 움직였다. 웃는 듯, 그러나 웃지 않았다.
“대비전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렇소이다.”
촛불을 끄자 폐서고는 다시 어둠에 잠겼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문으로 나갔다.
두 번째 은신처. 공방 서쪽의 빈 집.
서화연은 탁자 위에 내명부 기록 사본 세 장을 펼쳤다. 은비녀 탁본을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첫 번째 불일치는 사망 시각이었다.
내명부 기록에는 폐비의 사망 시각이 축시 초각(丑時初刻)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은비녀 각인에 언급된 은엽초의 약효——심장을 멈추게 하되 동공만 오래 열어두는 독——은 복용 후 정확히 두 시진 만에 치사한다는 기록이 서화연의 기억 속 의서에 있었다.
폐비가 사약을 받은 시각은 술시 말각(戌時末刻). 은엽초의 발효 시간을 역산하면 사망 시각은 해시 말각(亥時末刻)에서 자시 초각(子時初刻) 사이여야 했다. 축시 초각은 최소한 한 시진 이상 늦었다.
누군가가 사망 시각을 조작했다.
두 번째 불일치는 사약 조제 기록이었다.
내명부 청원지에는 백미초(白薇草)가 기록되어 있었다. 공식 기록과 동일한 약재명. 그러나 은비녀 각인은 은엽초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백미초와 은엽초는 전혀 다른 약성을 가진 독초였다. 백미초가 서서히 호흡을 멈추게 하는 반면, 은엽초는 심장을 먼저 멈추게 했다.
서화연은 손가락으로 각 문자의 획을 짚었다.
청원지의 ‘백미초’라는 글자. 마지막 획이 안으로 꺾여 있었다. 심수련의 증언으로 익숙해진 필체——최상궁의 습관.
동일인이 기록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아래에 남은 흔적이었다.
촛불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각도가 변하자 청원지 표면 아래서 푸른 기름기가 일어났다. 원래 적혀 있던 글자——‘은엽초’의 흔적이었다.
위조된 기록 아래에 원본의 묵 반응이 살아 있었다.
세 번째 불일치는 야간 순찰 기록의 공백이었다.
내명부 기록에는 폐비 사망 당일 밤 대비전에서 폐비 처소로 이동한 인원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다. 그러나 서화연이 이전에 확보한 경수소 야간 순찰 기록에는, 그날 밤 자시 무렵 대비전 쪽에서 세 명의 인영이 폐비 처소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목격이 남아 있었다.
기록 한쪽에서는 존재하고, 다른 쪽에서는 삭제된 행적.
서화연은 먹을 갈아 이 세 지점을 한지에 옮겨 적었다.
사망 시각 조작. 약재명 위조. 이동 기록 삭제.
모두 같은 날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증거 꾸러미에서 깨진 도자기 조각을 꺼냈다.
촛불을 가까이 당겼다. 여덟 번째 화에서 폐비의 옛 거처 바닥 타일 밑에서 찾아낸 파편. 표면에 날카로운 필체로 새겨진 문장——
『네놈이 끝까지 순종치 않으면 사사로운 독초로 목숨을 거두게 하리라』
서화연은 이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방금 적은 내명부 기록의 불일치 세 지점을 옆에 놓았다.
‘사사로운 독초.’
은엽초는 백미초와 달랐다. 백미초가 사약(賜藥)의 격식에 맞는 공식 독초라면, 은엽초는 궁중에서도 공식 기록에서 제외된——심지어 독초 도감에서조차 누락된——비공식 독초였다.
대비가 사용을 명령한 독초가 공식 사약이 아닌 ‘사사로운 독초’였기에, 이후 기록을 백미초로 위조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일치했다.
도자기 조각에 새겨진 협박 서신의 날짜는 을미년 구월 스무날 무렵. 폐비에 대한 사약 명령이 내려지기 열흘 전이었다.
대비는 사약이 내려지기도 전에 이미 은엽초 독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공식 사약은 나중에 덧씌워진 위장에 불과했다.
서화연은 도자기 조각을 은비녀 탁본 위에 올려놓았다.
은비녀 각인의 ‘은엽초’. 청원지 위조 기록 아래 숨은 ‘은엽초’. 도자기 협박 서신의 ‘사사로운 독초’.
세 개의 증거가 모두 같은 독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비가 스스로 명령하고, 스스로 은폐하고, 스스로 위조한 흔적. 물증과 기록과 유언이 서로 교차하는 삼중 구조.
서화연은 도자기 조각을 조심스럽게 증거 꾸러미에 넣었다. 이제 은비녀 원본과 함께 보관될 증거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의금부 지하 구금실.
이현은 쇠창살에 기대 앉아 있었다. 수갑을 찬 손목은 붓기 시작했지만, 숨은 고요했다. 바깥의 발소리가 한 번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
들어온 것은 간수 교대 시간의 틈을 탄 서리였다. 중년 남자, 손에 종이 한 장을 쥐고 있었다.
“경력 나리.”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규장각——”
“압니다. 민 서리가 연행됐다 들었소.”
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민 서리가 붙잡히기 전에 이것을 제게 건넸습니다.”
종이를 밀어 넣었다. 야간 순찰 기록의 필사본이었다. 날짜는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폐비 사망 당일 밤.
이현은 기록을 펼쳤다.
경수소 야간 순찰 기록 원본과 비교할 때 한 줄이 통째로 빠져 있었다. 해시 말각(亥時末刻), 대비전 서화각에서 폐비 처소로 향하는 인영 세 명에 대한 기록.
원본에는 존재하는데 이 필사본에는 없다.
“대비전에서 삭제한 건 이 대목이오.”
이현이 말했다.
“원본은 아직 경수소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 중으로 대비전에서 원본도 회수할 거라는 소문입니다.”
서리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엇을 원하시오.”
“원본을 내일까지——”
이현은 서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공개 심리에 제출하시오.”
“그러면 경력 나리의 혐의는.”
“지금은 내 혐의가 문제가 아니오.”
서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한 번 깊이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 필사본은——”
“서화연에게 전달하시오. 규장각 후문 폐서고의 옛 연락 경로로.”
서리는 놀란 눈으로 이현을 쳐다봤다.
“그 경로는 대비전에서 이미——”
“감시를 붙이지 못한 유일한 곳이오. 기록고 아래 물길이 지나는 까닭에 사람이 설 수 없소. 문서만 밀어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소.”
서리는 필사본을 접어 소매 깊숙이 넣었다.
“전달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폈다.
“공개 심리 날짜를 대비께서 하루 앞당기도록 압박하시오. 재판부에 정식으로 청원하면 대비전에서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경력 나리는——”
“내 수갑이 더 무거워질 뿐이오.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소.”
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구금실을 나갔다.
철문이 닫혔다.
이현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왼쪽 옆구리의 통증은 줄어들었지만, 수면 부족으로 눈이 무거웠다.
그러나 서화연의 손에 증거가 하나 더 쥐어질 것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화연이 세 번째 은신처로 옮긴 것은 새벽이 가까워진 무렵이었다.
빈 공방 한쪽에 증거 꾸러미를 풀었다. 은비녀 원본. 내명부 기록 사본. 도자기 조각. 위조 기록 증거 세 페이지.
그리고 규장각 후문 폐서고를 지나다 발견한 문서 한 장.
누군가가 바닥 틈새에 밀어 넣은 야간 순찰 기록 필사본이었다.
서화연은 종이를 펼쳤다. 날짜는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필체는 이현의 것이 아니었지만, 종이의 종류는 경수소 공식 용지였다.
한 줄이 삭제되어 있었다.
해시 말각. 대비전에서 폐비 처소로 향한 인영의 기록.
서화연은 이 삭제 흔적을 청원지 위조 페이지 옆에 놓았다. 같은 날짜. 같은 시각대. 같은 방향으로의 이동.
대비의 지시로 대비전 상궁이 폐비 처소로 이동했다.
도자기 조각의 협박 서신——『사사로운 독초로 목숨을 거두게 하리라』
은비녀 각인——『은엽초』
청원지 위조——백미초로 조작된 사약 기록
야간 순찰 기록——삭제된 상궁의 이동
네 개의 증거가 같은 시간을 향해 수렴했다. 대비가 을미년 구월에 이미 은엽초 독살을 계획했으며, 시월 초사흗날 밤 상궁을 보내 직접 집행하게 하고, 이후 모든 기록을 위조했음을 입증하는 구조.
서화연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은비녀를 두 손으로 감쌌다.
이것이 폐비의 유언이었다.
모든 기록이 위조되고 모든 증인이 침묵한 지 이십 년이 지났지만, 이 금속편에 새겨진 열 글자만큼은 누구도 지울 수 없었다.
『진실은 반드시 기록에 남는다』
서화연은 증거 꾸러미에 야간 순찰 기록 필사본을 추가했다. 그리고 입구를 단단히 묶었다.
내일이면 규장각 서리를 통해 공식 경로가 열릴 것이었다. 사흘 뒤면 내명부 약방에서 심수련이 도구를 준비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면——
서화연은 촛불을 바라봤다. 한동안 깜빡임조차 없이 타오르던 불꽃이, 어디선가 스며든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꺼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