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46화

의금부 임시 구금실. 촛불 한 자루가 벽감 속에서 기울어져 탔다.

이현은 바닥에 앉은 채 손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쇠고리에 연결된 사슬 길이는 벽에서 두 뼘 남짓. 오른손으로 붓을 잡았지만 팔을 뻗으면 사슬이 당겨져 먹물이 번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는 붓을 들었다. 윤공이 두고 간 빈 진술지가 아니라, 규장각 서리가 옷소매에 숨겨 들여온 청원지였다.

“경력 나리.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규장각 서리 이공이 구금실 문 옆에 쭈그리고 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 쉰이 넘은 문서 담당 서리로, 20년 동안 규장각에서 기록만 다뤄온 사람이었다.

이현은 대답 없이 붓을 먹물에 찍었다. 손목이 떨려도 획은 반듯했다.

나, 이현은——.

그는 쓰기 시작했다. 전 왕세자의 서자라는 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공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구금실 창살 너머로 의금부 하급 서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순찰이었다.

“공개 심리에서 이 문서를 제출하면…… 나리의 관직은 끝입니다.”

이현의 붓이 멈추지 않았다.

“알고 있소.”

“그리고 윤 도사께서 나리의 출생을 폭로할 경우, 의금부는 물론——”

“이 서리.”

이현이 붓을 놓지 않은 채 말을 끊었다. 먹물이 번져 첫 번째 장을 다 채우고 있었다.

“그대는 규장각 기록 담당이오. 내 진술서를 의금부 정식 문서로 접수하는 것—— 가능하겠소.”

이공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규장각 서리에게 의금부 문서 접수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규장각과 의금부 사이에는…… 긴급 심리 시 상호 기록 접수 절차가 있소이다. 심리 개최 하루 전까지, 규장각 명의로 증거 문서를 접수할 수 있습니다.”

“그 절차대로 하시오.”

이현이 마지막 장에 서명과 날인을 찍었다. 손가락을 인주에 찍어 청원지 위에 붉은 지장 하나. 쇠사슬이 딸랑거렸다.

이공은 두 손으로 진술서를 받아 들었다. 세 장의 청원지. 글씨는 비뚤지지 않았다.

“나리. 이것이 심리장에 제출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이키려고 쓴 것이 아니오.”

이현이 붓을 내려놓았다. 왼쪽 손목에 쇠사슬이 다시 무거워졌다. 이공이 진술서를 품 안 깊숙이 넣고 일어섰다. 순찰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는 재빨리 구금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 이공이 뒤돌아보지 않고 낮게 물었다.

“사본은 어디로.”

“은신처.”

이현의 짧은 대답에 이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금실 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촛불이 반쯤 줄었다.

이윽고 복도 저편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군화 소리가 아니었다. 목화 신발이 돌바닥을 밟는 소리—— 대비전 내관의 걸음걸이였다.

철컥.

구금실 문이 열렸다. 장내관이 문지방 밖에 서 있었다. 등 뒤로 대비전 호위 무사 두 명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전하. 대비마마께서 경력 나리를 대비전으로 옮기라 하셨소이다.”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장내관의 얼굴에서 어떤 빈정거림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건조한 전달.

“공개 심리 전까지 대비전 별실에서 대기하시라—— 그런 분부이십니다.”

이현은 일어서지 않았다. 쇠사슬이 바닥을 긁었다.

“지금이 해시가 넘은 시각이오. 대비전으로 옮기려면 절차가——”

“절차는 이미 갖추었사옵니다.”

장내관이 반쯤 허리를 숙이며 말을 끊었다. 예를 갖춘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의금부 도사 윤공께서 서면으로 동의하셨소이다. 이 시간 이후 경력 나리의 신병은 대비전에서 관할하신다—— 그리 적혀 있소.”

무사 한 명이 구금실 안으로 들어와 이현의 쇠사슬을 풀었다. 왼쪽 쇠고리가 먼저 풀리고, 오른쪽 채비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현은 천천히 일어났다. 왼쪽 손목에 쇠사슬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장내관이 뒤돌아서며 낮게 말했다.

“대비마마께서는 심리 전까지 나리를 대비전 곁에 두고자 하시오.”

별실. 감금이되 대비의 시야 안에 두겠다는 뜻이었다. 구금인지 연금인지 경계가 흐릿한 조치.

“가시지요.”

이현은 대꾸 없이 장내관의 뒤를 따랐다. 무사 두 명이 좌우로 붙어 걸었다. 복도를 지나 의금부 정문을 나서자 밤공기가 소매 속으로 파고들었다. 대비전을 향하는 길. 동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밤중. 대비전에서 백 보 밖 폐가 은신처.

서화연은 등잔불 아래에서 폐백 천 위에 세 가지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은비녀 원본. 청원지 탁본 세 장. 그리고 심수련에게서 받은 약주머니에서 꺼낸 은엽초 마른 잎사귀 하나.

그녀의 손가락이 은비녀 끝에서 잠시 멈췄다. 금속편의 각인—— 은엽초. 획이 가늘고 마지막 획이 떨려 있었다. 심수련의 말대로, 폐비의 손끝 힘이 다하기 전에 새긴 글자였다.

서화연은 탁본 위에 얇은 한지를 덧대고 숯으로 각인을 따라 문질렀다. 세 번째 복사본. 이번에는 글자마다 번호를 적었다. 은비녀 각인에 있는 글자와 청원지 아래 숨은 원본 기록의 글자를 짝짓기 위해서였다.

청원지 탁본을 등잔불 비스듬한 각도로 기울이자 푸른 기름기가 드러났다. 위조된 ‘백미초’ 글자 아래로, 원래 기록되었던 ‘은엽초’의 묵 흔적이 신문지처럼 배어 있었다.

서화연은 두 글자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하나는 은비녀 속 금속편에서—— 폐비가 죽어가며 새긴 것. 하나는 대비전 기록고의 청원지에서—— 누군가 백미초로 고쳐 쓰려다 묵 반응으로 되살아난 것.

같은 글자. 같은 물질.

그녀의 손이 약주머니에서 마른 은엽초를 집어 세 번째 자리에 놓았다.

은비녀. 청원지. 은엽초.

셋은 같은 지점을 가리켰다. 대비전에서, 대비의 명으로, 폐비에게 은엽초가 올랐다. 공식 기록은 백미초로 위조되었고, 진짜 은엽초는 독초 도감에조차 없는 궁중 비공식 독이었다.

서화연은 붓을 들었다. 증거판 중앙에 한 줄을 긋고, 세 가지 증거의 연결 고리를 적어 내려갔다. 오른쪽 끝에는 한 칸을 비워 두었다. 그 칸에는 증인의 진술이 들어갈 자리였다.

심수련.

등잔불이 깜빡였다.

문밖에서 흰 천 조각이 바람에 날려 문틈으로 들어왔다. 서화연이 천을 집었다. 세저포—— 가장자리에 매듭 하나가 묶여 있었다. 내명부의 약속 표시.

일어나 문을 열기도 전에, 그림자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왔소이다.”

심수련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낮았다. 서화연은 손을 내밀어 심수련의 소매를 잡아 안으로 들였다. 손끝이 차가웠다.

“어떻게 나오셨소. 대비전 감시——”

“감시는 해시 이후 두 갑절로 늘었사옵니다.”

심수련이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등잔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변색된 피부가 불빛에 더 짙어 보였다.

“하오나 폐비 마마께서 사셨던 처소 뒤편—— 그곳에는 아직 통로가 남아 있소이다. 대비전에서는 그 길을 모르오. 지밀상궁만 드나들던 길이었으니.”

서화연은 심수련을 증거판 앞으로 이끌었다. 심수련의 눈이 증거판의 빈 칸에 닿았다. 그 칸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그녀는 묻지 않고 알았다.

“서리 나으리.”

심수련이 서화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사흘 뒤 공개 심리. 그 자리에서—— 제가 말씀드리겠소이다.”

서화연은 숨을 들이쉬었다.

“무엇을.”

“대비전 서화각.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밤. 대비마마께서 폐비 처소로 상궁을 보내시며 하신 말씀.”

심수련의 눈동자가 등잔불빛에 흔들렸다.

“‘이 탕약은 은엽초 탕약이니, 반드시 두 시간 안에 올리도록 하라.’ 그리 명하셨소이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서화연은 손을 빼지 않았다. 심수련의 손을 그대로 쥔 채 물었다.

“상궁께서 직접——”

“들었소이다. 문 밖에서요.”

그 한 마디에, 20년 동안 묻어둔 침묵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심수련이 곧바로 덧붙였다.

“대비전으로 돌아가지 않겠소이다. 오늘 이곳에서부터—— 공개 심리까지, 그리고 심리장에서도. 증언하기로 하였소이다.”

서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놓고 증거판 앞으로 돌아서서, 빈 칸에 심수련의 이름을 적었다. 붓끝이 멈추지 않았다.

그 이름이 쓰인 순간, 세 방향의 증거가 하나의 구조로 수렴되었다. 은빛 금속편·푸른 묵 흔적·말린 약초.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 선 증인.

동트기 직전. 하늘이 짙은 남색에서 회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누군가 폐가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규장각 서리의 신호.

서화연이 문을 열자, 이공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소매 깊숙한 곳에서 청원지로 만든 문서 하나를 꺼냈다.

“이현 경력 나리의—— 진술서 사본이오.”

서화연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이공이 문서를 그녀의 손에 올려주었다.

“출생 비밀을 스스로 기록하였소. 정식 문서로 의금부에 접수되었소. 다만——”

이공이 숨을 한 번 가다듬고 덧붙였다.

“경력 나리께서 이 시간부터 대비전 별실에 계시게 되었소. 대비마마께서 직접 옮기라 명하셨소이다.”

서화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문서를 폈다. 세 장. 첫 장 첫 줄—— 나, 이현은 전 왕세자의 서자로 태어나——. 글씨는 단정했고 서명과 지장이 찍혀 있었다.

“경력 나리께서 전하라 하셨소. 이 문서가 공개 심리장에서 필요할 거라.”

서화연은 문서를 접어 증거판 옆 네 번째 자리에 놓았다. 은비녀. 청원지 기록.

은엽초. 심수련 증언. 그리고 이현의 진술서—— 폐비가 열한 살 이현의 상처를 지혈해주었다는 증언.

다섯 번째 증거는, 그날 밤 아이의 몸에 남은 상처 자체였다. 이현의 왼쪽 옆구리 검흔. 폐비 검시 기록의 상처와 같은 위치에, 같은 각도로.

서화연은 증거판에 마지막 선을 긋고 옆에 적었다. 생체 증거. 공개 심리에서 직접 확인.

“이제.”

서화연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물리적 증거, 기록 증거, 증인 증언—— 삼중 검증이 완성되었소.”

심수련이 증거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폐비의 마지막 각인—— ‘진실은 반드시’에서 멈췄다. 끊긴 마지막 획. 그 아래로 서화연이 기록을 이어 써 두었다.

——기록에 남는다.

새벽 안개가 폐가 문 앞까지 내려앉은 무렵,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길게, 천천히.

장내관의 그림자가 문틈에 드리웠다. 그는 혼자였다. 등 뒤로 무사들이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손에는 대비전 서화각의 나무 패 하나만 들고 있었다.

서화연은 증거판을 천으로 덮고 일어섰다. 심수련이 방 안 깊숙이 물러났다.

“들어가도 되겠나.”

장내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서화연이 문을 열어주자 그는 방 안으로 들어와 등잔불 앞에 섰다. 덮인 증거판을 한 번 내려다보고, 천에 손대지 않았다.

“대비마마의 말씀을 전하러 왔네.”

“들으시오.”

서화연의 목소리도 낮았다.

“지금 그대가 손을 떼면——”

장내관이 잠시 말을 멈췄다.

“의금부 서리 신분 위장 건은 불문에 부치신다. 관직은 잃을지언정, 역모죄는 적용하지 않겠다는—— 그런 뜻이네.”

서화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덮었던 천을 한쪽으로 젖혔다. 증거판의 다섯 줄 연결선과 그 위의 증거물들이 등잔불 아래 드러났다.

장내관의 눈이 증거판 위를 천천히 훑었다. 은비녀가 놓인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사흘 뒤 공개 심리는 열릴 것이네. 그대가 물러나도, 물러나지 않아도.”

서화연이 손을 뻗어 은비녀 옆 청원지 탁본을 가리켰다.

“이것은 위조된 기록이오. 위조된 기록 아래에는 원본의 묵 흔적이 푸른 기름기로 남아 있소. 심리장의 촛불을 여러 각도에서 비추면, 누구라도—— 의금부 도사라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소.”

장내관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이것.”

서화연이 은비녀를 집어 들었다. 금속편을 빼내어 바늘처럼 생긴 각인 도구를 들어 보이지 않고, 그저 비녀의 무게를 손바닥에 올렸다.

“이 안에는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대비전 서화각에서 폐비 처소로 전달된 탕약의 진짜 이름이 새겨져 있소. 공식 기록에 없는 이름이오. 하지만——”

서화연이 증거판 가장자리의 은엽초 마른 잎을 손끝으로 밀며 가운데로 옮겼다.

“이 독초는 실물로 존재하오.”

장내관의 시선이 은엽초에서 은비녀로, 은비녀에서 청원지 탁본으로 번갈아 움직였다. 그의 손에 쥔 나무 패가 살짝 떨렸다.

“대비마마께 전하시오.”

서화연이 증거판을 다시 천으로 덮었다.

“물러날 생각은 없소.”

장내관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등잔불이 한 번 깜빡인 뒤에야, 그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 말씀—— 그대로 전하겠네.”

발소리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화연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동녘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화연은 증거판과 이현의 진술서 사본을 두 겹의 천으로 싸서 품 안에 넣었다. 은비녀 원본은 따로 작은 나무 상자에 담아 소매 깊숙이 밀어 넣었다.

심수련이 그녀의 등 뒤로 다가왔다. 변색된 손가락으로 서화연의 소매를 가볍게 잡았다.

“이제 물러날 수 없소이다.”

서화연이 고개를 돌려 심수련을 보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새벽빛을 받아 옅게 빛났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소.”

폐가 뒤편, 대비전 감시를 피해 은밀하게 이어지는 통로 입구. 폐비 처소 터를 가로질러 대비전 후원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심수련이 앞장서서 통로로 들어서려는 순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무거운 군화 소리. 하나가 아닌, 적어도 세 명.

대비전 호위 무사의 발소리였다.

심수련이 걸음을 멈췄다. 서화연은 품 안의 증거판을 한 번 더 눌러 확인하고, 앞으로 걸었다. 안개 속에서 검은 옷자락의 그림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통로 입구. 서화연이 선 곳에서 열 걸음 앞.

그녀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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