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48화

징소리가 심리청을 채운 뒤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화연이 증거 제출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상석의 대비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예법보다 조금 더 깊은 절이었다.

“의금부 검율——”

말을 끊었다. 어깨를 한 번 더 곧게 폈다.

“폐비 서씨의 조카딸, 서화연이 재심을 청원하나이다.”

좌중이 술렁였다. 배석석에서 종친 하나가 좌우를 돌아보았다. 의금부 쪽 관료 둘이 얼굴을 마주쳤다.

대비의 손이 의자 팔걸이를 짚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네가——”

“본명을 밝혔소이다.”

서화연이 허리를 곧추 세우며 대비의 말을 끊었다. 대비전 최상궁이 벌떡 일어서려 했으나, 민 판사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움직임을 멈췄다.

“그날 밤. 폐비 마마께서 사약을 받으셨다고 기록되었사오나——”

서화연이 증거 꾸러미 위에 손을 올렸다.

“‘사약’은 위조된 기록이었소이다. 폐비 마마께서 드신 것은 은엽초 독초 탕약. 궁중 《독초 도감》에 등재되지 않은 독이옵니다.”

대비의 입가가 경련하듯 움찔했다.

“재심을 받아들이겠다.”

목소리는 낮았다. 그러나 심리청 구석까지 닿았다.

“허나 네 신분이 서씨 집안의 마지막 생존자라면, 너는 역모 가문의 잔여 세력이다. 이 심리가 끝난 뒤——”

“재판장이신 마마.”

민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개 심리의 순서는 피고발인 증거 제출이 우선입니다. 신분 심문은 증거 심리 이후로 미루시지요.”

대비의 눈이 민 판사에게 꽂혔다. 민 판사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두 호흡쯤 침묵이 흘렀다.

“좋다.”

대비가 손가락을 풀며 상반신을 뒤로 기댔다.

“증거를 보아라.”

서화연이 증거 꾸러미를 열었다. 가장 위의 은비녀 상자를 꺼내 증거 제출대 중앙에 두고 뚜껑을 열었다. 햇살이 은비녀 표면을 때려 청백색 빛이 번졌다.

민 판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것이——”

“폐비 마마의 은비녀이옵니다. 내명부 제조상궁 심수련이 이십 년간 보관한 물증.”

서화연의 손이 증거 꾸러미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작은 가죽 주머니에서 확대경을 꺼냈다. 둥근 유리 테두리는 오래된 놋쇠—— 박 장인의 공방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속은 비어 있사옵니다.”

서화연이 은비녀를 들어 올렸다. 중공 부분을 동쪽 창으로 비추자 가느다란 빛줄기가 비녀 안쪽을 통과해 증거 제출대 위에 바늘처럼 떨어졌다.

“속에 금속편이 들었사옵고, 폐비 마마께서——바늘로 찌르듯 글자를 새기셨소이다.”

확대경을 오른손에 쥐고 은비녀 중공 부분에 가져다댔다. 햇빛이 렌즈를 통과하며 금속편 표면의 미세한 홈을 한 획씩 벌려 보였다.

“첫 글자. 은. 은銀.”

민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증거 제출대 쪽으로 걸어왔다. 서화연은 비녀 각도와 확대경 초점을 조금 틀어 판사가 볼 수 있게 했다.

“다음 글자. 엽. 잎 엽葉.”

입회 진행관이 붓을 들었다. 기록지에 한 획씩 옮겨 적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글자. 초. 풀 초草.”

상석에서 대비의 팔걸이 쥔 손이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가 팔걸이 모서리를 반복해서 문지르기 시작했다.

“은엽초—— 《독초 도감》에 없는 이름이옵니다.”

서화연이 확대경을 내려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궁중에서 관리되는 모든 독초는 내의원 기록에 등재되어야 하옵니다. 은엽초는 등재되지 않았사오니, 이 독을 쓴 자는 공식 독초 관리 체계 밖에서 은밀히——”

“증거 조작이다.”

대비가 손을 들어 휘둘렀다. 팔걸이를 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은비녀는 가짜다. 진짜 폐비의 은비녀는 이십 년 전 대비전에서 회수하여 보관 중이다. 저것은 서화연이——”

“대비전에서 보관 중인 은비녀라면.”

서화연이 대비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는 이미 떨림이 없었다. 조용하고 단단했다.

“그 가짜를 만든 장인을 아시나이까.”

대비의 손가락이 팔걸이에서 미끄러졌다.

“무슨——”

“대비전 서화각 소속 김 씨 장인. 그가 만든 가짜 은비녀의 은 순도는 폐비의 신분에 맞지 않을 정도로 높사오며, 문양은 대비전 최고의 은장이 솜씨로 일반 장인이 모방할 수 없소이다. 진짜를 감추려고 정성을 들여 가짜를 만든 까닭은——”

서화연이 은비녀를 한 번 더 쳐들었다.

“진짜 은비녀 속에 담긴 이 각인이 대비전의 존립을 흔들기 때문이옵니다.”

심리청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종친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몸을 돌려 대비 쪽을 힐끗 보았다. 대비의 얼굴 근육이 굳어졌다.

“허튼소리.”

말은 그렇게 했으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최상궁. 저것을 압수하라.”

최상궁이 증거 제출대를 향해 움직이자 민 판사가 몸을 틀어 길목을 막았다.

“증거 심리 중 증거물 압수는 심리 방해로 간주되옵니다.”

“이것은——”

“삼중 기록을 대조하십시오.”

서화연이 증거 꾸러미에서 청원지 묶음을 꺼내며 말했다. 세 장—— 의금부 소장 원본, 규장각 소장 원본, 그리고 대비전에서 확보한 위조본이었다.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밤, 폐비 마마께 드려진 탕약의 조제 기록이옵니다.”

의금부 소장본을 들어 올렸다.

“‘독초 혼합 탕약.’”

규장각 소장본을 나란히 올려놓았다.

“‘독초 혼합 탕약.’ 같은 날짜, 같은 조제 내용.”

대비전 위조본을 세 번째로 올렸다. 두 원본 바로 옆.

“‘사약.’”

민 판사가 고개 숙여 청원지 세 장을 번갈아 살폈다.

“이 차이는——”

“위조된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원본 청원지의 묵 반응은 완전히 지울 수 없사옵고—— 위조된 글자 아래에 원본의 흔적이 푸른 기름기로 남아 있소이다.”

서화연이 대비전 위조본을 집어 동쪽 창 아래로 들었다. 오른쪽에서 스며드는 빛이 청원지 표면을 얇게 비추자, ‘사약’이라는 글자 밑으로 희미한 푸른 그림자처럼 이전 묵 자국이 떠올랐다.

“여기 보이시나이까. ‘사’ 자 아래 ‘독’ 자의 흔적. ‘약’ 자 아래 ‘탕’ 자의 흔적.”

민 판사가 다가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종친 중 한 명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목을 뺐다.

“위조자는 이 푸른 기름기를 감추기 위해 위에 새 먹으로 덧썼소이다. 그러나 청원지 고유의 묵 반응—— 완전히 없앨 수 없었사옵고.”

서화연이 손끝으로 위조본의 글씨 한 획을 가리켰다. ‘을’ 자의 첫 획이 유난히 길게 빠져 있었다.

“이 필체 소인은 알고 있사옵니다.”

고개를 들어 대비전 쪽을 똑바로 보았다.

“최상궁. 마지막 획을 안으로 꺾는 습관, ‘을’ 자의 첫 획을 길게 빼는 버릇, 그리고 옥편에도 없는 획 하나를 더하는 집착—— 대비전 서화각 문서를 대조하시면 지금 이 글씨가 최상궁의 것임이 확인될 것이옵니다.”

최상궁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입을 열었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입회 진행관의 붓이 멈춘 채 허공에 떠 있었다.

대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석에서 내려오는 움직임에 심리청 전체가 얼어붙었다.

“네놈의 발언권을——”

“마마.”

민 판사가 막았다. 배석석에서 조용히 걸어나와 대비와 서화연 사이에 섰다.

“증거 심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등 뒤로 이현이 손목의 수갑 자국을 내리누르며 한 걸음 나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 한 걸음에 최상궁 하나가 무심결에 뒷걸음쳤다.

햇살이 증거 제출대 위 세 장의 청원지를 똑같이 비추고 있었다. 어떤 먹은 스며들고, 어떤 먹은 그 위를 덮고, 어떤 먹은 여전히 푸르게 남아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리청의 동쪽 문이 열렸다.

햇살이 아닌 그림자 속에서 이현이 걸어 들어왔다. 호송 무관 둘이 따라붙었으나 손을 대지는 못했다. 검은 관복 어깨에 먼지가 앉았고, 왼쪽 소매 끝이 찢어져 있었다. 손목의 수갑 자국은 선홍색으로 부풀어 올랐다.

상석에서 대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민 판사가 일어섰다.

“경력. 어찌 된 일이오.”

이현이 증거 제출대 앞에 멈춰 섰다. 소매 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민 판사에게 건넸다.

“산대청 별감의 목격 기록 원본이오.”

심리청 안이 술렁였다. 대비전 측 배석석에서 최상궁 하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민 판사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청원지 특유의 푸른빛이 동쪽 창 햇살에 반사됐다.

“이것은……”

“그날 밤. 산대청에서 폐비 처소로 향하는 인영을 목격한 기록입니다.”

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목격자는 당시 산대청 야간 당직 별감. 인영의 복색과 이동 방향, 시간까지 기록되어 있소.”

대비가 손을 들었다.

“경력은 지금 역모 혐의로 구금 중인 자다. 그런 자의 증거 제출을——”

“구금된 자의 증거라도 진실이면 채택하는 것이 의금부의 절차입니다.”

말을 자른 것은 민 판사였다. 그가 두루마리를 들어 배석석 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대비전 최상궁의 처소 출입이 기록된 시각은 해시 말각. 경수소 순찰이 폐비 처소 정문을 지난 시각과 일치하오.”

서화연은 증거 제출대 위의 은비녀를 바라보았다. 금속편의 각인과 이 기록이 같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비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 별감이란 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

“사망했습니다. 이 건과 무관한 사고로.”

이현이 말했다.

“죽은 자의 기록이라면 신빙성을——”

“청원지 묵 반응 검증은 가능하오.”

이현이 말을 이었다. 대비를 보지 않았다. 민 판사에게만 향하는 시선이었다.

“기록 용지가 청원지임을 확인해주십시오. 을미년 의금부 공문 용지와 동일한지 대조하시오.”

민 판사가 입회 진행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관이 증거 제출대에서 삼중 청원지 대조본을 집어 들었다. 청원지 두 장을 나란히 놓고 창가로 가져갔다. 햇살이 두 장을 동시에 비추자, 같은 결의 푸른 기름기가 떠올랐다.

“용지 일치. 을미년 의금부 공문 용지와 동일한 청원지입니다.”

민 판사가 기록을 다시 읽었다. 눈이 한 구절에서 멈췄다.

“‘대비전 표식 허리띠를 착용한 최상궁이 남쪽 골목에서 북쪽 처소 방향으로 걸어갔다’……”

심리청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대비전 측 배석석에서 누군가 자세를 고쳐 앉는 옷깃 소리가 났다.

“이 최상궁이 누군지는 이 기록만으로 특정되지 않소.”

이현이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시선이 대비전 측 배석석 구석, 가장 어두운 자리에 멈췄다. 심수련이 거기 앉아 있었다. 수수한 남색 당의, 은색 장식 없는 비녀. 최상궁 패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증인이 있습니다.”

이현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수련이 일어섰다.

일어서는 기척은 예상보다 가벼웠다. 치마 밑자락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최상궁 패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한 번 쥐었다가, 배석석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대비의 눈이 심수련에게 꽂혔다. 입술이 움직였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심수련이 대비전 측을 등졌다. 세 걸음.

증인석으로 걸어가는 동안 누구도 숨소리를 내지 못했다. 서화연 앞을 지날 때, 옅은 호박색 눈동자가 잠시 마주쳤다. 웃지 않는 눈이었다. 서화연은 고개를 숙여 깊은 목례를 올렸다.

심수련이 증인석에 섰다.

민 판사가 의자에서 허리를 곧추 세웠다.

“신원을 밝히시오.”

“전 내명부 지밀상궁 심수련이옵니다.”

심수련의 목소리는 나이보다 높고 맑았다. 어린 소녀 같은 음색이 심리청 구석구석까지 닿았다.

“을미년 시월 초사흗날 밤, 대비마마의 명을 받들었사옵니다.”

그녀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대비께서 폐비께 은엽초를 올리라 명하셨——”

“저 최상궁은 역모다!”

대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잡아들여라!”

상석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대비전 무관 넷이 일제히 움직였다. 검은 옷차림에 대비전 표식 허리띠—— 칼집에서 칼을 뽑지는 않았으나 손은 칼자루에 올라가 있었다. 증인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심리청이 술렁였다. 배석석에서 몇몇 관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선가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서화연이 증인석 앞으로 나섰다. 양팔을 벌려 심수련 앞을 가로막았다. 검시용 침낭도, 어떤 무기도 손에 없었다. 그녀는 다만 두 발을 심리청 바닥에 붙이고 서 있었다.

이현이 그 옆으로 붙었다. 왼쪽—— 심수련을 향하는 무관들의 진로를 반쯤 막는 위치였다. 그의 오른손이 허리띠의 은장식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손목의 수갑 자국이 붉게 번져 있었다.

“증인을 보호하시오.”

이현이 말했다. 민 판사를 향한 목소리는 건조했다.

“공개 심리에서 증언 중인 자를 체포할 권한은 대비전에도 없소.”

서화연이 증거 제출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 판사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법대로 증언을 속행하십시오.”

무관들의 걸음이 멈췄다. 선두에 선 자가 대비를 돌아봤다. 대비는 숨을 몰아쉬며 심리청을 내려다보았다. 일어선 그녀의 손가락이 의자 등받이를 파고들었다.

“이것이 역모가 아니면 무엇이냐……”

대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나 민 판사는 상석을 보지 않았다. 입회 진행관에게 손짓했다.

“증언 속행. 기록을 계속하라.”

진행관이 붓을 들었다. 심리청 동쪽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증거 제출대 위의 은비녀와 청원지, 그리고 증인석의 심수련을 동시에 비추었다.

서화연이 증인석 앞으로 나섰다.
양팔을 벌려 심수련 앞을 가로막았다.
검시용 침낭도, 어떤 무기도 손에 없었다.
그녀는 다만 두 발을 심리청 바닥에 붙이고 서 있었다.

이현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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