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5화
내명부 기록고 앞 복도는 오전부터 공기가 달랐다. 서화연은 이현이 건넨 열람 허가 문서를 왼손에 쥔 채 걸음을 멈췄다.
하급 상궁 한 명이 길을 막아섰다.
“심 상궁 마마께서 다실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기록 열람이 먼저입니다.”
“마마께서 기다리십니다.”
말투에 물러설 여지가 없었다. 서화연은 허가 문서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내명부 다실은 예상보다 좁았다. 찻상 하나와 대나무 발로 구획된 창가 좌석이 전부였다. 벽장에는 약재 보관함 서너 개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공기에는 오래된 차 향과 함께 묽은 약 냄새가 배어 있었다.
심수련은 이미 앉아 있었다. 찻잔 두 개를 앞에 두고 첫 잔을 따르던 손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서 검율께서 피로하신 모양이옵니다. 어젯밤 경수소까지 다녀오셨다 들었습니다.”
듣지 않았으면 모를 말이었다. 경수소 조사는 의금부 내부 건인데, 내명부 상궁에게 아침부터 전달될 사안이 아니었다.
서화연은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열람 허가를 받아 왔습니다. 우선 기록부터 보겠습니다.”
“차 한 잔 식기 전까지요.”
심수련은 찻잔을 서화연 쪽으로 밀었다. 손가락이 찻잔 귀를 떠나는 순간 손끝이 살짝 떨렸다. 서화연은 그 손끝을 보았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변색된 자국. 내명부 시절 독초 도감을 관리하며 생긴 흔적이었다.
“경수소 순찰 기록이 어젯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사옵니까.”
질문이 아닌 확인이었다. 서화연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일부가 찢겨 있었습니다. 기록지도 청원지가 아니었고요.”
심수련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박색 눈동자에 이른 아침 빛이 비껴 들었다.
“찢긴 기록에는 누구의 손이 닿았겠습니까.”
서화연은 잠시 상대의 호흡을 살폈다. 지금 이 순간 심수련이 모르는 게 있을까.
“향묵이었습니다.”
“용뇌향.”
심수련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마치 그 단어가 대화의 끝자락인 양 느릿했다.
“내명부 상궁 이상 사용하는 먹이지요.”
서화연이 말을 이었다.
“기록을 위조한 자가 내명부 소속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먹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가능하겠지요.”
심수련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마치 검시 기록을 완벽한 필체로 작성하는 일처럼.”
서화연의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심수련은 빙그레 입술을 올렸다. 웃는 눈이 아니었다.
“내의원 기록을 열람하러 오셨다지요. 독살 사건의 약재 출입처를 추적하시는 모양이옵니다.”
“네. 이 경력께서 지시하셨습니다.”
“그분의 지시를 거스를 마음은 없으나.”
심수련이 벽장에서 작은 약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색 끈이 감긴 낡은 주머니였다. 천 위에 올려놓자 은은한 풀 향이 풍겼다.
서화연은 숨을 들이마셨다. 은엽초 냄새였다. 「독초 도감」에서 표본 봉지를 열었을 때와 같은, 달콤하고도 비릿한 냄새.
“받아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건 이중 인장 전표가 필요한 물품입니다. 함부로 건네실 수 없습니다.”
“전표가 있고 없고는 제 소관이옵니다.”
심수련이 주머니 끈을 풀었다. 안쪽에서 마른 잎 조각과 은침 한 개가 굴러나왔다. 침 끝은 거뭇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의도적 부식의 경계가 울퉁불퉁했다. 서화연이 검시에 쓴 침의 균열과 같은 양상이었다.
“내의원 독초 도감과 세 곳 기록은 덮어도 흔적이 남습니다. 지금 이 침처럼.”
심수련의 손가락이 은침을 한 번 굴렸다.
“잘 간수하셔야 하옵니다. 증거란, 기록이 사라진 자리에서 더 강하게 말을 하니까요.”
서화연은 약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심수련이 이 물건을 꺼낸 이유는 하나였다. 상대가 사건의 윤곽을 이미 짚었음을, 아니면 그 이상을 알고 있음을 알리는 것.
“왜 저에게 줍니까.”
“검시 현장에서 본 침의 균열을 잊지 않고 추적한 분께 드리는 예의옵니다.”
심수련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폐비 마마를 모셨던 지밀상궁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찻물이 천천히 식고 있었다. 서화연은 심수련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폐비 마마께서 가장 아끼시던 상궁이, 어느 날 기록 하나를 손에 쥔 채 사라졌습니다. 기록은 찾지 못했고 상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수련이 찻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남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남았지요. 보신 것만으로도 오래 살기 어려운 것이 내명부의 법도이니까요.”
“그 이야기를 제게 왜.”
“서 검율의 발걸음이 그날 밤 지밀상궁의 행보를 닮았기 때문이옵니다.”
심수련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더 덧붙이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서화연의 손이 천천히 약주머니 위로 올라갔다. 은엽초 냄새가 손끝에 달라붙었다. 이 주머니를 받는 순간, 심수련은 그녀를 거래의 장 안으로 들인 셈이었다. 정체를 아는 듯 암시하면서도 명시하지 않는 이 거리. 바로 그 거리가 서화연이 내명부에서 본 가장 위험한 태도였다.
“주머니만 받아도 저는 이 약재를 불법 소지하게 됩니다.”
“이미 경수소 찢긴 기록의 향묵 냄새를 맡으신 이상, 서 검율께서 깨끗한 바깥에 설 방법은 없었습니다.”
심수련이 일어섰다.
“기록 열람은 바로 옆 방이옵니다. 차가 식기 전에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치맛자락 소리 하나 없이 심수련이 대나무 발을 젖혔다. 마지막으로 잠시 멈추더니 어깨 너머로 말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사옵니다.”
서화연은 약주머니를 쥔 채 숨을 참았다.
“폐비 마마의 지밀상궁은, 기록을 손에 쥔 채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지금 서 검율께서 계신 바로 그 다실이었습니다.”
내명부 복도는 오전인데도 어둑했다. 높은 벽과 좁은 폭 탓에 빛이 바닥까지 닿지 못했다.
서화연은 복도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등 뒤로 심수련의 발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왼쪽 소매 안쪽. 약주머니가 손목에 닿아 있었다. 천 너머로도 거친 촉감이 올라왔다.
주변을 확인했다. 복도 양끝에 사람은 없었다.
소매를 걷어 약주머니를 꺼냈다. 자색 끈을 풀어 입구를 벌렸다. 약간 습한 냄새가 났다. 말린 잎사귀 몇 조각과 작은 검은 씨앗들이 섞여 있었다.
잎사귀 하나를 골라 손바닥에 올렸다. 빛에 비춰 보자 투명한 톱니 모양의 가장자리가 빛났다.
서화연은 숨을 짧게 들이켰다.
잎 가장자리의 톱니 배열이 선명했다. 앞서 내의원 약재 창고에서 본 독초 도감의 삽화와 일치했다. 은엽초. 접근을 위해 내의원과 내명부의 이중 인장 전표가 필요하다는, 바로 그 독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심수련이 이 약주머니를 건네며 했던 말들이 다시 떠올랐다. 내 명부의 기록 보관소. 검시 도구의 훼손 가능성. 모두 서화연이 다음 걸음을 옮기게 한 단서들이었다.
정보를 은밀히 흘린 것이다. 대놓고 말하지 않고 흔적을 앞에 흘려놓는 방식으로.
왜.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시에 답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서화연은 약주머니를 다시 자색 끈으로 조여 소매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식은땀이 손바닥에 배어 있었다.
내명부 출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외전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내명부 출구 앞 작은 마당. 햇빛이 마당 절반을 덮고 나머지는 회랑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서화연이 문을 나서자 오른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리듬이 일정하고 보폭이 길었다. 굽 낮은 관화 소리. 들을수록 가까워졌다.
돌아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서 검율.”
이현이 회랑 기둥 옆에서 걸어나왔다. 검은 관복 소매가 조금 접혀 있었다. 손에는 어떤 서류도 들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서화연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이현의 눈이 서화연의 얼굴을 짧게 훑고선 내려갔다. 소매. 그가 입을 열었다.
“내의원에서 무슨 기록을 보셨소.”
“내의원이 아니라 내명부 다실에서 오셨습니다.”
“결과를 묻고 있소.”
서화연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소매 안쪽으로 약주머니가 다시 손목을 건드렸다.
“은침의 부식 상태를 확인할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확정할 만한 단서는 아직입니다.”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한 번 접혔다 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러 내명부까지 오시오.”
“필요한 절차였습니다.”
“심수련 상궁을 만난 것도 말이오.”
서화연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알고 왔다. 이현은 이미 심수련의 접근을 인지하고 있다.
“심 상궁께서 검시 도구에 관해 조언을 주셨습니다.”
“무슨 조언이오.”
“도구 훼손의 전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현이 반 박자 늦게 눈을 깜빡였다. 관찰하던 눈빛이 냉정해졌다.
“말을 아끼고 있군요.”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검율의 몫이 아닙니다.”
“그 검증을 혼자 한다?”
서화연이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숙였다. 예의를 갖춘 회피였다.
이현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림자가 서화연의 소매 끝을 덮었다. 그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 검율. 짚이는 바가 있으면 공유하시오.”
하는지 모르게 소매를 뒤로 당겼다. 약주머니의 부피가 드러나지 않게 하는 동작이었다.
“확인되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현의 시선이 서화연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잠시 머물렀다.
“손을 다쳤소?”
“아닙니다.”
한 호흡 침묵. 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심하시오. 검시 대필 의혹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길 바라오.”
서화연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몸을 돌려 마당 반대편으로 걸었다.
등 뒤로 시선이 꽂혀 있었다. 의금부 숙직실까지 걸어가는 이현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질 때까지 서화연은 소매를 풀지 않았다.
그날 밤. 서화연의 숙소는 좁았다. 벽을 등지고 탁자 하나, 침상 하나. 창 밖으로 달빛 한 줄이 들어와 탁자 위를 가로질렀다.
서화연은 촛불 하나를 켜고 탁자 위에 천을 깔았다.
먼저 약주머니를 꺼내 천 위에 올렸다. 자색 끈을 풀었다. 내용물을 천 한쪽에 조심히 쏟아냈다.
말린 은엽초 잎 세 조각. 검은 씨앗 다섯 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잎 하나를 골라 작은 사기 그릇에 옮겼다. 은침을 꺼냈다. 아홉 개의 침 중에서 세 번째 침. 심수련이 손톱으로 튕겼던 침의 가장자리는 여전히 울퉁불퉁했다. 부식 경계가 불규칙하게 패여 있었다.
서화연은 은침을 촛불에 살짝 가까이 대 천천히 돌렸다. 빛이 침의 길이를 따라 흘렀다. 균열 속에 어둠이 고여 있었다.
은엽초 잎을 손가락 끝으로 비볐다. 단단했지만 몇 번의 마찰에 부서져 내렸다. 보라색 빛이 도는 가루가 그릇 바닥에 쌓였다.
서화연은 씨앗 하나를 더 으깨어 가루 위에 떨어뜨렸다. 두 가루를 섞자 미세한 향이 올라왔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냄새.
숨을 가다듬었다.
세 번째 은침의 균열 부분을 섞은 가루에 살짝 눌러 담갔다. 들어 올려 촛불 앞에 놓았다.
처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화연은 침을 돌리며 불빛 각도를 바꾸었다. 균열 가장자리에 가루가 들러붙어 반짝였다.
그때였다.
칫—
작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은침 표면에서 미세한 기포가 올랐다. 촛불 빛 아래, 균열이 뻗기 시작했다. 기존의 울퉁불퉁한 경계를 따라 은색 표면이 벗겨지듯 번져갔다.
서화연의 손이 멈췄다.
균열은 직선이 아니었다. 휘고, 꺾이고, 교차했다. 세 가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다가 다시 만났다.
마디가 생기고, 또 갈라졌다.
서서히 형태가 드러났다.
잔가지를 닮은 굴곡. 그 굴곡들이 모여 중심에서 바깥으로 번지는 배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궁중 문양.
모란.
서화연은 숨을 멈췄다.
폐비 서씨를 상징하던 문양이었다. 내명부 양식과 다른 세밀한 잎맥 표현. 어릴 적 기억 속에서 본, 은비녀에 새겨져 있던 그 문양.
다시 은침을 촛불 가까이 들었다. 빛이 균열 사이를 지나며 더 선명하게 패턴을 드러냈다. 나뭇잎 하나하나에 해당하는 굴곡이 의도적이라는 듯 뻗어 있었다.
균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했다.
은침을 천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심수련이 이 침을 손톱으로 튕겼다. 은엽초 가루를 만지게 했다. 그 결과가 이 문양이었다.
정보를 흘린 정도가 아니었다. 심수련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은침의 균열 패턴이 폐비의 문양으로 드러날 것까지.
서화연은 천천히 침통을 닫았다. 약주머니를 자색 끈으로 조여 소매에 넣었다. 모든 것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은침에 남은 모란 문양은 닦아내지 않았다.
물증이었다. 그 동시에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조차 손을 뻗어 이 사건의 향방을 조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등 뒤로 닫힌 문.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탁자 위의 은침을 비췄다. 균열이 만든 그림자가 천 위로 떨어져 있었다. 모란의 어둠.
서화연은 숨을 내쉬었다. 긴 침묵 끝에, 심수련의 이름을 입술 안에서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