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7화

내의원 약재 창고는 땅속보다 서늘했다. 벽면을 빙 둘러 닫힌 약장들이 줄지어 서 있고, 천장 가까이 낸 작은 환기창으로 진시의 엷은 햇살이 먼지 낀 빗살무늬로 떨어졌다.

탁자 위에는 《독초 도감》이 펼쳐져 있었다. 청원지로 제본된 두꺼운 첩이었다. 서화연은 은엽초 항목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었다.

“복용 후 한 시진 이내 호흡 마비… 콧등과 눈 아래 푸른 실핏줄.”

이현은 탁자 건너편에서 검시 기록 사본을 펼쳐 들었다. 두 장을 나란히 놓고 시선을 옮겼다.

“다르오.”

“무엇이 말입니까.”

“사망까지의 시간. 시신 발견은 인시 말. 유시쯤 마지막 식사로 추정했소.”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유시에 독을 넣었다면 인시 말까지 견디지 못합니다. 은엽초라면 자정 전에 죽었어야 합니다.”

이현은 말없이 기록을 다시 살폈다. 오른손 검지가 한 번 접혔다 폈다.

“도감의 기록을 수정할 수 있소?”

서화연은 청원지의 담청색 바탕을 가볍게 쓸었다. 실처럼 가는 섬유들이 고르게 깔린 표면이 손끝에 닿았다.

“불가합니다. 청원지는 묵 반응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사실이오.”

이현은 도감의 은엽초 항목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다른 독초다.”

서화연이 말을 받았다.

“생각은 같습니다. 은엽초와 증상은 유사하되, 사망 시간이 더 긴…”

“찾으시오.”

서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에 침을 묻혀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약장 사이로 씁쓸한 약재 냄새가 밀려들었다.

초오, 부자, 천오…

서화연의 손이 느려졌다. 촛불이 한 차례 흔들렸다.

“백미초.”

지정된 두 글자가 좌측 하단에 붓글씨로 적혀 있었다. 서체는 내의원 제조의 딱딱한 해서였다.

“추출물 복용 시 오장에 열독. 증상은 은엽초와 유사하나… 사망까지 반 시진. 콧등에 미세한 청색 반점이 남는다.”

이현의 손이 검시 기록 위에서 멈췄다.

“반 시진.”

“그렇습니다. 은엽초의 절반.”

서화연은 손가락으로 기록의 한 줄을 더듬었다.

“그리고 청색 반점.”

이현은 검시 기록 사본을 탁자 위에 평평하게 밀었다. 시신 검안 항목을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

“콧등… 미세한 청색 변색. 초검 시 사후 경직에 가려 간과함.”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환기창 바깥에서 먼 발치의 발소리가 스치듯 들렸다가 사라졌다.

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미초 확정이오.”

서화연은 도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백미초 항목 아래 주석 한 줄이 잉크가 바랜 세필로 적혀 있었다.

'내명부와 내의원 이중 인장 전표 필수.'

심수련의 약주머니가 소매 안에서 옆구리를 눌렀다. 서화연은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시선을 이현에게 돌렸다.

“누가 이 독초를 다룰 수 있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의원 약재 출입 전표를 열람하겠소.”

이현의 검은 눈동자가 회색 기운을 띠며 촛불을 반사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나 시선은 평소보다 한 박자 길게 서화연에게 머물렀다.

서화연은 그 시선을 받으며 도감을 천천히 덮었다. 청원지 표지가 탁자에 닿으며 낮은 마찰음을 냈다.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이현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창고 문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발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기 직전, 어깨 너머로 짧게 말했다.

“필요하오.”

내의원 약재 창고의 공기는 한낮인데도 서늘했다. 약재 냄새가 벽 틈새까지 배어 있었다.

서화연은 《독초 도감》의 백미초 항목을 펼쳐둔 채 이현의 옆에 섰다. 내의원에서 건넨 약재 출입 전표 네 장이 탁자 왼편에 놓여 있었다.

문이 열렸다.

심수련이었다. 손에 푸른 표지의 장부를 들고 있었다. 걸음 소리는 없었다.

“내명부 약재 출입 장부를 가져왔사옵니다.”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심수련은 이현과 서화연의 중간쯤에 멈춰 섰다. 옅은 호박색 눈동자가 서화연에게서 이현에게로 천천히 옮겨갔다.

“의금부 경력께서 열람을 청하셨다 하시기에.”

이현이 손을 내밀었다.

“수고를 끼쳤소.”

심수련은 장부를 건네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에 펼쳐진 내의원 전표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손끝으로 표지를 두드리지도 않았다.

“백미초는 최근 반 년간 내명부를 통한 출입이 없었사옵니다.”

이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확실하오.”

“장부가 그리 말하고 있사옵니다.”

심수련의 목소리는 어린 소녀처럼 맑았다. 그 맑음이 서늘한 약재 냄새 속에서 오히려 이질적으로 울렸다.

서화연은 시선을 장부에 고정했다. 푸른 표지 모서리가 약간 닳아 있었다. 여러 번 펼쳐본 자리의 흔적이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심수련이 서화연 쪽으로 반 걸음 다가섰다. 당의 소매 끝이 살짝 움직였다.

“작년 겨울, 폐비 마마의 옛 거처 근처에서 백미초가 자생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사옵니다. 규장각의 옛 실록 초안에 적혀 있더이다.”

서화연의 호흡이 한 박자 멎었다.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현의 검은 눈동자가 심수련에게서 서화연에게로 움직였다. 회색 기운이 한 번 일렁였다.

“폐비의 옛 거처.”

“경복궁 서북쪽 빈 전각이옵니다. 지금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사오나——”

심수련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서화연이 고개를 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서화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다시 장부로 내렸다. 표지의 푸른색이 촛불 아래서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현이 장부를 집어 들었다. 첫 장을 넘겼다. 종이 마찰음만이 짧게 났다.

“내의원 전표 마지막 입고 시점이 언제요.”

“석 달 전이오. 하지만 내명부 기록에는 같은 시점에 백미초 입고가 없소.”

이현이 내의원 전표 한 장을 집어 심수련의 장부 옆에 나란히 놓았다. 검지로 두 기록의 날짜를 가리켰다.

“이틀.”

심수련이 미소를 띠었다. 입술 끝만 살짝 올라갔다.

“경력께서 눈썰미가 좋으시옵니다.”

“설명하시오.”

“내의원에 백미초가 마지막으로 입고된 지 나흘 뒤, 내명부 장부에는 그 약재가 출입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사옵니다. 그러나 이틀 뒤——”

심수련의 손가락이 장부의 다른 항목을 짚었다. 감초, 작약, 당귀 같은 평범한 약재들이 줄지어 적혀 있었다.

“내명부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약재의 이동은, 오직 대비전 직속 지밀상궁만이 가능하옵니다.”

서화연의 소매 안에서 은침이 차갑게 피부에 닿았다. 심수련이 일부러 저 말을 꺼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폐비의 거처를 말하던 입으로, 지금은 대비전의 지밀상궁을 말하고 있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폈다. 한 번.

장부를 덮었다.

“이 공백 동안 누군가가 외부에서 백미초를 들여왔다는 말이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사옵니다.”

심수련이 장부를 이현 쪽으로 밀었다. 손이 잠시 탁자 위에 머물렀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변색 자국이 촛불에 드러났다.

“장부는 경력께서 보관하시옵소서. 의금부의 공식 수사에 필요하실 터.”

이현이 장부를 받아 품에 넣었다. 동작은 느렸다. 눈은 심수련에게서 떼지 않았다.

“대비전 지밀상궁의 명단을 요청하겠소.”

“필요하시다면야. 다만——”

심수련이 뒤로 물러섰다. 걸음 소리는 여전히 없었다.

“대비전의 일은 내명부의 일이기도 하옵니다. 경력께서 가시는 길이 곧 내명부의 길이기도 하옵고.”

돌아서서 문 쪽으로 두 걸음.

서화연의 옆을 지나는 순간, 심수련의 소매가 살짝 서화연의 손목에 닿았다. 바람 한 점보다 가벼운 접촉이었다.

심수련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서화연의 귀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췄다.

“필요하시거든 은비녀에 대해 물어보시지 그러셨소.”

속삭임이 아니라 숨이었다. 말이 형체를 갖기도 전에 사라지는.

심수련은 그대로 문을 나섰다. 복도로 사라지는 뒷모습은 당의 자락도 흔들리지 않았다.

서화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품 안. 왼쪽 옷깃 안쪽의 은비녀가 심장 바로 위를 누르고 있었다.

심수련이 알고 있었다. 폐비의 은비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까지.

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이었소.”

서화연은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사적인 전언입니다.”

이현은 한 박자를 기다렸다. 서화연이 더 말하지 않자, 장부를 품에서 꺼내 탁자에 펼쳤다. 손가락이 이틀 간의 공백이 있는 행을 다시 짚었다.

“내일까지 대비전 지밀상궁 전원의 명단과 최근 삼 년간의 약재 취급 기록을 요청하겠소.”

서화연은 심수련이 건넨 장부를 바라보았다. 푸른 표지가 촛불 아래서 마치 심수련의 당의와 같은 색으로 빛났다.

폐비의 거처에 백미초가 자랐다. 대비전 지밀상궁만이 기록 없는 약재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두 정보 사이에 심수련이 놓여 있었다.

“윤공께 보고하겠소.”

이현이 장부를 접어 품에 넣으며 말했다.

“대비전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소.”

서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수련의 약주머니가 소매 안에서 은침 옆에 있었다.

이현이 서화연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회색 기운이 옅게 번졌다. 뭔가를 묻고 싶은 눈빛이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검율께서도 준비하시오. 수사 범위가 넓어질 것이오.”

“알겠습니다.”

이현의 발소리가 문을 나서 복도로 향했다. 한 박자 머물렀다 이어지는 걸음걸이.

서화연은 혼자 남았다.

복도로 나왔다. 약재 창고 앞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창문 없는 돌벽이 양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소매 안에서 약주머니를 꺼냈다. 자색 끈이 손가락에 감겼다.

은비녀.

심수련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숨처럼 가벼웠던 그 말이, 복도의 적막 속에서 오히려 더 크게 울렸다.

심수련은 왜 지금 그것을 꺼냈을까. 백미초와 대비전의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서화연은 약주머니를 만지작였다. 작고 단단한 잎사귀들이 손끝에 잡혔다. 은엽초.

그리고 그 잎들 사이로, 종이의 감촉이 스쳤다.

서화연의 손이 멈췄다.

약주머니 입구를 벌렸다. 은엽초 잎을 조심스럽게 헤치자, 작은 종잇조각이 드러났다. 세로로 두 번 접힌, 손톱 두 개 크기의 쪽지였다.

펼쳤다.

글씨는 세 글자뿐이었다.

경복궁 서북쪽 빈 전각.

폐비의 옛 거처였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쪽지를 움켜쥐었다. 종이가 손바닥 안에서 구겨졌다.

복도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약주머니는 왼손에, 쪽지는 오른손에.

심수련은 알고 있었다. 서화연이 이 쪽지를 언제 발견할지까지.

복도 끝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촛불 하나가 심지 끝에서 파르르 떨렸다.

서화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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