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8화

의금부 검안실은 초경을 앞두고 촛불 세 점만 피워 두었다. 검시대 옆 탁자에 한 점, 문 입구 벽걸이에 한 점, 이현의 왼쪽 서가 모서리에서 심지를 태우는 것이 마지막 한 점이었다.

서화연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왼손 소매 안쪽에는 약주머니와 쪽지를, 오른손에는 내의원에서 빌려 온 독초 도감 필사본을 쥐었다.

이현은 탁자 건너편에 앉아 손가락으로 내명부 약재 출입 장부를 접고 있었다.

“백미초로 확정됐소.”

물음이 아니었다. 필사본도 보지 않고 내뱉은 확인이었다.

서화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현은 알고 있었다. 내의원 복도를 벗어나기 전, 그가 장부를 접어 품에 넣던 순간부터.

“그렇습니다.”

탁자 앞으로 다가서며 필사본을 내려놓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책상 위에 똑같은 필사본이 이미 펼쳐져 있었다.

“내의원에서 한 부 더 받아오셨군요.”

“아니오.”

이현이 장부를 덮고 표지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필요 없소. 증상과 사망 시각이 검시 기록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백미초 한 가지. 이틀 전에 확인을 마쳤소.”

서화연의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이틀 전은 그가 홀로 은침 실험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그때 이미 이현은 독성 물질의 범위를 백미초까지 좁혀 두었다.

“알고 계셨다면 어찌하여 다시 내의원에….”

“심수련이 장부를 가져올 거라 짐작했소.”

검은 눈동자가 촛불을 받아 짧게 반짝였다.

“내명부 장부를 대조해야 했소. 대비전 지밀상궁 개입 여부는, 장부 없이 확인할 길이 없었소.”

서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초 확인보다 심수련의 움직임을 살피는 쪽이 이현의 진짜 목적이었다.

“대비전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소. 그러나.”

이현이 말을 멈추고 오른손 검지를 접었다 폈다. 한 번, 두 번.

“윤공께 보고하기 전까지 공식 수사 범위를 대비전으로 넓히지 않겠소.”

서화연의 시선이 이현의 손끝에 닿았다. 무언가 망설일 때 나오는 버릇. 이제는 안다.

“까닭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증거가 부족하오. 백미초가 대비전에서 나왔다는 직접 물증은 없소. 지밀상궁이 기록 없이 움직였을 가능성만으로는, 윤공이 나서지 않을 것이오.”

건조한 어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서화연의 귀에는 한 구절이 따로 남았다. ‘윤공이 나서지 않을 것.’ 스스로 수사를 밀고 나가려는 의지와 상관의 판단을 갈라 말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경수소 순찰 기록 누락 건을 먼저 처리하겠소. 장서윤 심문은 예정대로 계속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 장부를 품에 넣었다. 검은 관복 소매가 촛불 빛을 가리며 일렁였다.

“검율께서는….”

이현이 서화연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읽히지 않았지만 시선은 평소보다 반 호흡 더 길게 머물렀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조사는 계속하시오.”

말 끝이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허락과 지시, 그 경계에 정확히 걸친 어조였다.

“알겠습니다.”

서화연이 고개를 숙였다. 왼손이 소매 안에서 약주머니를 만지작였다. 쪽지가 손바닥 안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이현은 그 소리를 들었을까. 촛불 한 점이 심지 끝에서 타닥, 하고 가볍게 튀었다.

이현이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세 걸음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한 가지.”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증거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시오. 말로만 전해지는 증거는, 필요할 때 쓸 수 없소.”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복도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주저함 없는 걸음걸이였다.

검안실에 혼자 남은 서화연은 촛불 세 점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심지를 태우는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소매에서 약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자 자색 끈이 풀리며 은엽초 잎사귀 냄새가 희미하게 번졌다.

이현의 마지막 말이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증거는 반드시 기록으로.’ 심수련이 흘린 힌트도, 폐비의 은비녀도, 이 작은 쪽지도. 하나 같이 기록이 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이현은 공식 수사를 대비전으로 확대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그러고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조사는 계속하시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묵인.

탁자 위로 내려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현은 알고 있었다. 윤공과 대비전 사이에 얽힌 이해관계를.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공식 기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선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서화연은 쪽지를 펼쳤다. 세로로 두 번 접힌 종잇조각에 적힌 글자는 세 글자.

경복궁 서북쪽 빈 전각.

폐비의 옛 거처. 심수련이 약주머니에 숨겨둔 이 정보야말로 이현이 말한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의 정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이 몸으로 가서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는 단서.

검안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는 이미 완전히 저물었다. 초경이 머지않았다. 야간 순찰 교대는 초경 직후. 경수소 기록에서 배운 대로, 산대청과 대비전 사이를 도는 두 번째 순찰조가 교대할 때 서북쪽 통로는 약 반 각 동안 텅 빈다.

쪽지를 소매 안에 밀어 넣고 약주머니도 함께 집어넣었다. 검시대 옆 탁자 위 촛불을 입김으로 불어 껐다. 가느다란 연기가 올라왔다 흩어졌다.

검안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며 발소리를 죽였다. 의금부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궐 서북쪽 통로는 돌벽이 바람을 막아 고요했다. 초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멀리서 한 번 울렸다. 순찰 교대 시작. 벽에 붙어 숨을 가다듬자 왼쪽 복도에서 등불 두 개가 움직이며 순찰조가 지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오른쪽 순찰로가 통째로 비었다.

순찰 공백. 반 각.

벽에서 떨어져 빠르게 걸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소매 속 약주머니가 팔뚝에 닿았다. 서북쪽 담장을 따라 난 길은 차츰 폭이 좁아졌고 돌틈마다 잡초가 비집고 자라 있었다.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길.

마침내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무너진 담장 일부가 어둠 속 윤곽을 드러냈다. 그 너머로 폐비의 옛 거처가 버려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경복궁 서북쪽, 빈 전각으로 접어드는 길목은 야간 순찰 경로에서도 비껴나 있었다.

손에 든 작은 초롱 하나에 의지해 어둠을 헤치며 걸었다. 약주머니 속 쪽지의 세 글자가 발걸음을 이끌었다. 심수련이 일러준 그대로의 장소.

전각 문짝은 반쯤 삐걱이며 열려 있었고 경첩은 붉게 녹슬어 있었다.

안으로 들자 썩은 나무 냄새와 오래된 먼지가 코를 찔렀다. 초롱불이 벽면을 핥을 때마다 갈라진 벽지, 쓰러진 촛대, 깨진 찻잔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시야에 들어왔다.

중앙에 멈춰 섰다. 폐비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다는 이 공간은 치워지지 않은 채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심수련은 쪽지만 남겼을 뿐, 이곳에서 무엇을 보라 말하지는 않았다.

초롱을 바닥에 내려놓고 먼저 벽면을 살폈다. 찢긴 벽지 사이로 회벽이 드러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벽지를 조금 더 젖혀 보았으나 특별한 점은 없었다. 쓰러진 가구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서랍은 죄다 비어 있었고 옷장 안에는 좀먹은 비단 조각만 걸려 있었다.

뒤편 작은 방으로 발을 옮겼다. 지밀상궁이 머물렀을 처소였을 터.

방 한쪽에 낡은 책상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책상 다리 하나가 부러졌고 그 아래로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쪼그려 앉아 파편들을 살폈다. 흰 바탕에 푸른색 문양이 그려진 평범한 그릇 조각이 대부분이었다. 하나하나 집어 옆으로 치우다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달라졌다.

미세한 굴곡.

초롱을 바싹 끌어당겼다.

조각 하나가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 흰 바탕에 얇은 유약이 올라 있었고 깨진 단면이 아니라 안쪽 면에 무언가 파여 있었다.

숨을 멈추고 초롱 가까이 조각을 들었다.

안쪽 면에 음각된 글씨. 가는 칼날로 새긴 듯 섬세한 획.

글자 세 개가 읽혔다. “……하라. 그리하면……”

나머지는 조각이 깨지며 사라졌다. 앞뒤 문맥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획 끝에 남은 필법은 분명히 대비전 문서 서체였다. 내명부에서 훈련받은 자만이 구사하는 용필법.

도자기 안쪽 면에 음각한 서신.

대비가 폐비에게 보내는 말을 그릇에 새기게 하고, 폐비가 받았거나 폐비의 지밀상궁이 받았을 가능성. 그 뒤 누군가 일부러 깨뜨려 못 쓰게 만들었다.

서화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바닥에 흩어진 나머지 파편을 빠르게 살폈다. 같은 유약, 같은 두께의 조각이 몇 점 더 나왔다. 하나를 뒤집자 다른 글씨가 나타났다. “……비밀을……”

또 한 조각. “……대비 마마께서……”

파편 세 점을 손바닥에 모았으나 깨진 면이 맞물리는 부분은 없었다. 이 도자기는 완전히 산산조각난 뒤였다.

그럼에도 명백했다. 대비가 폐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경고한 내용이 도자기 그릇 안쪽에 새겨져 있었다. 폐비 실각 후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그릇을 깨뜨렸다.

서화연은 세 점의 조각을 소매 안쪽 깊숙이 밀어넣었다. 은침과 약주머니 옆, 천이 접히는 자리.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폐비 사건의 첫 물증. 대비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

초롱을 들고 일어나자 먼지가 발끝에서 소리 없이 일었다.

전각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진 책상, 깨진 도자기, 반쯤 열린 문짝.

이 공간은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심수련이 서화연을 이곳으로 보낸 것은 바로 이 조각 때문이었다. 심수련은 파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서화연의 손이 소매를 감싸쥐었다.

대비가 협박한 증거를 손에 쥐고도 이 조각들을 아직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이현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증거가 완성되기 전에 대비전의 눈에 띄면 조각은 사라지고 서화연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초롱불이 흔들렸다. 불을 낮추며 전각을 나서자 어둠 속에서 빈 전각의 그림자가 천천히 물러났다.

처소로 향하는 회랑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내의원에서 내명부 방향으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난 뒤 인적이 완전히 끊겼다.

서화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품 안에서 도자기 조각이 옆구리를 눌렀다. 은침은 소매 깊숙이 그대로였다.

처소 앞 작은 돌계단이 보였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그늘.

그 그늘 속에서 누군가 움직였다.

“늦으셨소이다.”

심수련의 목소리. 어린 소녀 같은 음색이 밤공기 속에서 더욱 이질적으로 빛났다.

서화연의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은침을 찾지는 않고 주먹을 쥐었을 뿐이다.

“제 상궁 마마께서 이 밤중에 이곳은 무슨 일이십니까.”

심수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치마 자락이 돌계단을 스치는 소리조차 없었다. 옅은 달빛이 그녀의 옥비녀 끝에 맺혀 한 점 반짝였다.

“검율께서 오신 곳을 떠올리면, 제가 여기 있을 까닭쯤은 이미 눈치채셨을 터인데.”

서화연은 답하지 않았다.

심수련의 시선이 서화연의 품 쪽으로 내려갔다. 도자기 조각이 놓인 자리에서 한 호흡 멈추었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갔다.

“산대청 별감의 죽음과 관련하여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별감의 죽음은 의금부 수사 사안입니다. 내명부에서 개입하실 일이 아니지요.”

“물으려던 것은 수사 건이 아니오이다.”

심수련이 반 박자 빠르게 말을 끊었다. 옅은 호박색 눈동자가 웃지도 않은 채 서화연을 응시했다.

“산대청 별감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 혹시 알고 계시옵니까.”

“……”

서화연은 대답 대신 손을 품 안으로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도자기 조각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더듬었다. 차가운 표면이 손끝을 눌렀다.

심수련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질문 하나를 공중에 남겨둔 채 치마 자락조차 흔들리지 않는 채 서 있었다.

서화연은 심수련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도자기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은비녀 아래 진실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