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10화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저녁 8시.

형광등이 깜빡였다. 안정기 교체 사흘 만이다.

신우진은 책상 위에 노트 사본을 펼쳐놓고 있었다. 7년 전 선임의 조사 기록. 오른손 검지가 마지막 페이지를 짚었다. '시험법 개정 이전 사양'이 적힌 자리다.

복도 쪽에서 발소리.

최명식이 문간에 섰다. 평소보다 어깨가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선배님, 아직 안 퇴근하셨네요.”

“할 게 남았다.”

최명식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오른손이 뒷목을 두 번 문질렀다.

“저, 어제 게임하다 들은 얘기가 있는데요.”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게임 길드에 대영산업 품질관리팀 직원이 하나 있어요. 어제 레이드 뛰다가 말이 나왔는데, 자기네는 시험 성적서 조작이 10년 넘은 관행이래요. 신입 들어오면 제일 먼저 배운다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제가 가만있다가 은근슬쩍 물어봤어요.”

“뭐라고 하던가.”

“웃으면서 말 돌리더라고요. 굳이 부인은 안 했어요.”

신우진의 시선이 다시 노트로 내려갔다.

'시험법 개정 이전 사양'

7년 전 노트의 문구와 최명식의 제보가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선배님. 이거 맞는 거죠? 7년 전 선임님 노트랑 똑같은 내용이잖아요.”

신우진은 수첩을 꺼내 적었다. '성적서 관행 10년 이상'

“게임 길드원한테 더 캐묻지 마라.” “네?”

“네 제보 경로가 노출되면 곤란하다.”

최명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근데 선배님, 이거...” “가라.”

최명식이 입을 다물었다. 한 걸음 물러서다 멈춘다.

“선배님. 저는 선배님이 옳다고 생각해요.”

대답은 없었다. 최명식이 돌아서서 걸어나갔다.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다.

9시.

사무실은 텅 비었다. 유도로 쪽 견인차 소리도 멎었다.

신우진은 노트 사본과 수첩을 나란히 놓고 둘 사이의 간격을 눈으로 쟀다. 7년 전 문구와 방금 적은 메모.

복도에서 또 발소리. 무겁고 느렸다.

박중호였다. 작업 점퍼 차림 그대로. 왼쪽 소매의 유압유 얼룩이 형광등 아래서 번들거렸다. 빈 사무실을 한 번 훑는 동작이 짧았다.

책상 앞으로 걸어온 그가 손가락 두 개로 작은 종이쪽지를 밀어 넣었다. 부품 입고 박스 안쪽에 쪽지를 숨길 때와 똑같은 손동작이다.

“신 주임.”

의자에서 일어난 신우진이 말했다.

“야간입니까, 팀장님.”

박중호는 대답 대신 돌아섰다.

쪽지를 펴는 순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B4 계열 부품은 입고 첫날부터 문제였다.'

하단에 한 줄 더.

'개인 금고.'

“팀장님.”

박중호가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 노트. 잘 갖고 있어라.”

문을 열고 나간 발소리가 복도로 이어진다. 열 걸음쯤 가서 멎더니 주머니에서 토크 렌치를 만지작거리는 금속음. 이내 다시 발소리.

신우진은 쪽지를 수첩 옆에 놓았다.

두 개의 메모. 두 개의 제보 경로. 같은 B4 계열.

10시.

노트 사본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겼다. 7년 전 기록과 9년 전 첫 입고 시점을 비교하고, 중간에 2년 간격 교체 주기 데이터를 대입한다.

수첩에 펜을 댔다.

'B4 차량군 로트 번호: 2년 전 3월 일괄 납품' '7년 전 TH-1187 계열 - 동일 납품사 - 동일 패킹 결함'

박중호의 쪽지를 들었다. '입고 첫날부터 문제였다'

최명식의 제보를 메모지에서 확인했다. '시험 성적서 조작 10년 넘은 관행'

세 개의 정보가 한 줄로 연결됐다.

신우진은 새 문서를 열었다. USB에 저장할 파일 하나. 수첩에도 같은 내용을 옮겨 적는다.

제목: '기록 다발 경고선'

9년 전 B4 계열 부품이 최초로 입고됐다. 현장 확인으로 결함을 인지했으나 보고서는 종결 처리다.

7년 전 TH-1187 계열에서 유사 결함 발생. 선임이 조사했고 시험소 인가 취소로 중단됐다.

작년 KD-2037-114. 동일 패턴. 교체 주기 3회 연기. 결재자는 윤태호.

마지막 줄을 추가했다.

'3개 독립 제보 경로: 최명식(길드원·시험 성적서 관행), 박중호(B4 부품 입고 초기 결함), 선임 노트(7년 전 동일 패턴).'

문서를 USB에 저장하고 수첩을 접어 기능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USB는 둘로 나눠 확대경 케이스 안과 책상 서랍 안쪽에 각각 밀어 넣는다.

밤 11시.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지원. 전화였다.

수첩을 접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우진 주임님.”

차분한 목소리지만 배경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말해라.”

“감사실 내부 제보 라인 두 곳에서 같은 방향을 지목했습니다. 구매처 과장의 결재 속도를 알고도 조치하지 않은 인물이 있다고요. 이의 제기 기록도 없습니다.”

신우진이 수첩을 펼쳤다.

“누군지 특정 못 했나.”

“현재로선 두 명으로 압축됩니다. 결재 라인 접근 권한 보유자예요. 민경수 실장, 또는 그 아래 팀장급 한 명. 실무자는 아닙니다.”

“결재 권한 접근 가능 위치.”

“그렇습니다. 묵인했거나 방조했거나. 어느 쪽이든 기록은 없어요. 정보 누설 경로가 감사실 내부에 있다는 건 확인했습니다.”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가로선을 그었다.

“감사실 내부 제보 라인은 안전한가.”

“현재까지는요. 하지만 계속 쓸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정보원이 저를 추적할 가능성이 있어요.”

이지원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신우진 주임님. 오늘 밤 통화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분산 보관.”

전화기 너머, 작은 정적.

“알고 계셨군요.”

“나도 오늘 세 개의 경로에서 같은 지점을 확인했다. 7년 전, 9년 전, 작년. 전부 B4 계열이다.”

이지원이 잠시 멈춘다.

“세 개의 경로요.”

“최명식. 납품사 직원에게서 시험 성적서 조작이 10년 넘은 관행이라는 제보를 들었다.”

“게임 길드원을 통해서요?”

신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고 있던 건가.”

“최명식 주임님이 게임 커뮤니티에서 대영산업 직원과 접촉한 건 어젯밤입니다. 제가 내부 제보 라인으로 확인했어요. 그 경로가 안전한지 검증하느라 말씀 안 드렸습니다.”

신우진은 수첩에 한 줄 추가했다. '이지원, 독자적 관찰망 가동 중.'

“두 번째 경로가 남았다.”

“알겠습니다. 계속하시죠.”

“박중호 팀장이 오늘 밤 쪽지를 전달했다. B4 부품은 처음 입고됐을 때부터 문제였다는 내용이다. 쪽지 하단에 '개인 금고'라고 적혀 있다.”

“개인 금고.”

“박중호 팀장의 사물함인지 자택인지는 확인 안 됐다.”

“9년 전 첫 입고 때 보고서일 가능성이요.”

“추측은 맞다. 확인 전이다.”

이지원의 호흡이 가다듬어졌다. 목소리 톤이 한층 내려간다.

“감사실 정보 누설 건과 박중호 팀장의 쪽지 건을 포함해, 지금부터 기록 분산 보관을 제안합니다.”

“받아들인다.”

“제가 지금 작성한 문서를 암호화해서 전송하겠습니다. 물리적 복사본도 각자 보관합시다. 한 곳이 털려도 기록이 살아남게.”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USB 두 개를 책상 위에 올렸다.

“보안 메신저로 보내라. 나도 방금 '기록 다발 경고선'이라는 문서를 완성했다.”

“'기록 다발 경고선'.”

“7년, 9년, 작년. 세 시점의 부품 결함 정황을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묶었다.”

“좋습니다. 교환하죠.”

신우진이 파일을 암호화해 전송했다. 이지원 쪽에서 수신 확인 메시지가 짧게 울린다.

“확인했습니다. 제 문서도 전송합니다.”

휴대폰에 새 메시지 떴다. '내부 누설 경로'라는 제목의 파일. 신우진은 다운로드만 완료하고 열지 않았다.

“받았다.”

“주임님.”

이지원의 말투가 다소 빨라진다.

“감사실 정보원 색출은 제가 계속합니다. 주임님은 B4 계열 부품의 물리적 증거를 확보해 주십시오.”

“둘 다 할 거다.”

“...네?”

“정보원 색출은 네 몫이다. 나는 개입하지 않는다. 물리적 증거와 문서 증거는 내가 책임진다.”

잠시 정적.

“알겠습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그렇다.”

“그럼 내일 아침 뵙죠. 7시. 금정차량기지 인근.”

전화가 끊겼다.

신우진은 USB 하나를 기능복 안주머니에, 다른 하나를 확대경 케이스에 밀어 넣고 수첩을 집었다.

박중호의 쪽지를 다시 펼친다.

'B4 계열 부품은 입고 첫날부터 문제였다.' '개인 금고.'

형광등 불빛 아래서 종이가 반투명하게 비쳤다. 뒤집어 봤다. 빈 종이.

다시 앞면.

선임의 노트 사본을 덮으려다 멈춘 손끝이 마지막 페이지 오른쪽 아래 구석에 닿았다. 본문에 가려져 있던 자리. 연필로 쓴 글씨가 불빛에 드러난다.

'B4 원본 보고서, 박중호 팀장님 금고.'

손가락이 멈췄다.

필기는 희미했다. 오래된 흔적. 선임이 남긴 마지막 메모였다.

무정차 통과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