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11화
전날 밤 메모가 아직 눈에 박혔다.
'B4 원본 보고서, 박중호 팀장님 금고.'
신우진은 검수고 철제 책상 앞에 앉아 수첩을 덮었다. 왼쪽 집게손가락 유압유 흉터가 형광등 아래 반짝였다. USB 두 개는 그대로였다.
하나는 기능복 안주머니, 하나는 확대경 케이스. 사무실엔 밤새 식은 금속 냄새와 종이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고여 있었다. 벽면 환풍기가 낮은 음을 울렸지만 바람은 거의 없었다.
시계는 보지 않았다. 해가 이미 창밖 유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갓길 쇄석들이 옅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지원이었다.
“금정차량기지 인근 카페로 오시죠. 아침 9시.”
“이유는.”
“제보 라인 자료를 받았습니다.”
“알겠다.”
통화 종료. 신우진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통화 시간 14초.
이지원이 먼저 끊었다. 이례적이었다. 자료 무게를 짐작하게 하는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
확대경을 목에서 풀어 책상 위에 올렸다. 렌즈가 떨어질 때 살짝 온기가 남았다. 기능복 주머니를 두드려 USB 위치를 확인하고 문을 나섰다. 복도 창으로 아침 햇살이 길게 깔렸고, 먼지가 느리게 떠돌았다.
카페는 금정차량기지 정문에서 도보 5분. 평일 오전 9시, 손님은 없었다. 에스프레소 머신 압력 게이지 바늘만 미세하게 떨고 있다.
카운터엔 직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지원이 구석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열고 있었다. 흰 셔츠.
왼쪽 소맷자락에 커피 얼룩이 말라 있었다. 테이블 위 커피 두 잔이 식어가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크레마는 이미 다 가라앉았고, 얼음도 흔적 없이 녹아 투명한 갈색 액체만 남았다. 이지원이 스푼을 만지작거리다 신우진이 들어서자 손을 멈췄다.
신우진이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 타일을 긁는 소리가 빈 카페 안에 울렸다.
“자료.”
이지원이 노트북을 돌렸다. 화면엔 이메일 사본. 발신자명은 앞부분이 별표 처리돼 있었다. 제보 라인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사고 당일 구매처 과장의 내부 일정표입니다.”
신우진의 시선이 화면을 훑었다. 그 순간 글자들이 망막 위에 정렬됐다.
“오전 10시 30분. 윤태호와 면담. 예정 시간 40분.”
“그렇습니다.”
마우스 클릭음이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다른 창이 떴다. 사고 보고서 결재 로그. 캡처 가장자리에 시간 정보가 선명하게 남았다.
“사고 접수 11시 9분. 구매처 과장 결재 11시 47분.”
“38분.”
“면담 직후 결재입니다.”
세 번째 창. 구매처 과장의 미팅 요청 메일 원본. 수신인 윤태호.
발신 시각 사고 전날 오후 3시 15분. 제목 'KD-2037 계열 납품 일정 조율 건'. 하단에 '회의실 3번 예약 완료'라는 자동 문구까지 보였다.
“미팅은 사고 전에 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사고 당일 윤태호가 면담 직후 결재한 시점이 정확히 겹칩니다.”
신우진은 대답 대신 노트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손가락 끝이 액정에 닿을 듯 말 듯 멈췄다.
“'납품 일정 조율'.”
“사고 이전이에요. 그런데도 아젠다가 KD-2037이었습니다.”
이지원이 탁자 위를 짚었다. 손톱 끝이 나무에 닿아 작은 소리를 냈다.
“우연으로 보기엔 시점이 너무 정확합니다.”
신우진은 잠시 침묵했다. 검지가 탁자 위에 글자를 그리다 멈췄다. 낙서처럼 보였지만, 손끝으로 연결점을 짚고 있었다.
“금정차량기지로 가자.”
“지금이요.”
“내 사무실에서 문서 체인을 합친다. 이 메일은 프린트해.”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으며 일어났다. 커피 잔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손은 노트북을 백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검수고 사무실 도착은 오전 10시 30분. 유도로에는 점검 일정이 잡힌 열두 대 중 네 대가 이미 입고돼 있었다. 차량 하부에서 올라오는 금속성 메아리와 정비 인원들의 공구 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렸다. 공기가 진동했다.
신우진은 철제 책상 위에 문서들을 펼쳤다. 정비 일지 대조표, 날인 역순 증거 출력본, 선임의 노트 사본. 종이들이 저마다 다른 질감으로 바스락거렸다. 이지원은 프린트한 메일 사본을 바로 옆에 배치했다. 출력된 용지엔 아직 프린터 열기가 남아 약간 말려 있었다.
책상 위에 다섯 줄이 생겼다. 형광등 불빛이 서류 위에 고르게 내려앉아 그림자 하나 없었다.
“왼쪽부터 정리한다.”
신우진이 대조표를 짚었다. 손끝이 지그시 눌린 자리가 종이에 살짝 패였다.
“첫째. KD-2037-114 부품 교체 주기 3회 연기. 모든 연기 결재자는 윤태호.”
손가락이 날인 역순 증거로 옮겨갔다. 잉크 날짜들이 역순으로 배열된 페이지에서 한 칸씩 짚어 내려갔다.
“둘째. 도장 날인 순서 역전. 교체 시기와 결재 시점이 실제 흐름의 역순.”
이지원이 메일 사본을 가리켰다. 검지가 발신 시각 위를 정확히 누르고 있었다.
“셋째. 사고 당일 윤태호와 구매처 과장 면담. 아젠다 '납품 일정 조율'. 종료 39분 후 사고 보고서 결재 완료.”
“넷째.”
선임의 노트 사본을 폈다. 페이지 끝 접힌 자국이 낡은 결을 따라 번져 있었다. 7년 전 TH-1187 계열 부품 결함 기록. 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종이 뒷면까지 도드라졌다.
“7년 전 같은 납품사, 동일한 패킹·밀봉 결함. 결재자도 윤태호.”
“다섯째.”
이지원이 마지막 서류를 펼쳤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9년 전 B4 계열 부품 첫 납품 시점 구매 내역서 사본.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납품사 대영산업. 승인란에 윤태호의 이름. 글씨체는 지금보다 덜 굳었지만, 'ㅎ' 받침을 길게 빼는 버릇은 그대로였다.
“B4 계열 첫 입고 때부터 결함이 있었다는 박중호 팀장의 증언. 그 납품 건 결재자도 윤태호.”
책상 위 서류들이 가로로 연결됐다. 신우진의 손가락이 첫 장 모서리를 짚고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훑었다. 선 하나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수첩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 가운데 놓았다. 찢어지는 소리가 짧고 날카롭게 울렸다.
“'기록 다발 경고선'. 9년, 7년, 작년. 세 시점의 동일 패턴.”
이지원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무능이 아니라 의도입니다.”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지가 허공에서 잠시 멎었다. 먼지 한 점이 손끝 근처를 떠다니다 방향을 바꿨다. 그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주먹이 만들어지기 직전의 느린 동작.
“감사 청구서를 쓴다.”
“양식을 가져왔습니다.”
이지원이 메신저백에서 서류 한 묶음을 꺼냈다. 감사 청구 표준 양식. 상단에 '철도안전법 제61조 및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27조에 근거'가 인쇄돼 있었다. 딱딱한 활자체의 서식이었다.
“오전 11시 40분입니다. 지금 작성해서 오늘 중 등록 가능합니다.”
양식을 받아 책상 위에 펼쳤다. A4 용지 네 장이 차가운 철판 위에서 미끄러졌다.
시간이 흘렀다. 벽시계 초침이 규칙적으로 각을 그었다.
신우진은 감사 청구 사유 항목에 차례로 기입했다. 검은 볼펜이 종이를 지날 때마다 마찰음이 났다. 부품 교체 주기 조작, 결재 날인 역순, 사고 당일 비정상 결재 시간, 동일 납품사의 장기간 동일 결함 패턴. 각 항목마다 첨부 증거 번호를 적었다. 필체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지원이 옆에서 증거 목록을 정리했다. 문서 번호를 부여하고 증거 능력을 검토했다. 서류 더미를 넘길 때마다 손목시계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회의록은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노트북을 열었다. 키보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타이핑 리듬이 고르고 빨랐다.
“오늘 회의. 참석자 신우진, 이지원. 안건: 내부 감사 청구 증거 체인 확정.”
청구서 마지막 항목을 채우고 펜을 내려놓았다. 펜이 철제 책상에 닿으며 작은 금속음을 냈다.
“완료.”
이지원이 노트북을 돌려 보여줬다.
“회의록입니다. 검토 부탁합니다.”
화면을 훑었다. 회의록 하단.
'쌍방이 확인한 바, 9년-7년-작년 3개 시점에 걸친 부품 결함 은폐 정황은 구매처 과장 윤태호의 의도적 결재 조작과 일치한다. 이는 철도안전법 제61조의 감사 개시 요건을 충족하며, 현 시점에서 감사 청구가 타당하다는 데 합의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턱이 한 번 아래로 움직이고 멈췄다.
“문제없다.”
회의록을 저장하고 출력 버튼을 눌렀다. 구석 프린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터 소리가 낮게 깔리고 용지 이송음이 뒤를 이었다.
“서명하겠습니다.”
이지원이 먼저 펜을 들었다. 회의록 하단 참석자란에 이름과 날짜를 기입했다. 또렷한 서명이 마지막 획에서 살짝 위로 올라갔다. 신우진이 그 옆에 서명했다. 각진 글자들이 좁게 모여 있었다.
프린터에서 청구서 초안도 함께 나왔다. 감사 청구 사유 네 쪽. 증거 목록 별지 두 쪽.
회의록 한 쪽. 총 일곱 쪽. 종이들이 포개어져 이지원의 손에 들렸다.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지금 전산 등록하겠습니다.”
노트북 화면에 감사 시스템 메인 페이지가 떴다. 좌측 메뉴에서 '감사 청구 등록' 탭 클릭. 페이지 전환과 함께 청구서 번호가 자동 발번됐다. 상단에 숫자와 문자 조합이 길게 생성됐다.
서류를 스캔해 첨부 파일로 올렸다. 스캐너가 페이지를 한 장씩 삼키며 불빛을 반복했다. 텍스트 요약란에 청구 사유를 간략히 입력했다.
'무정차 통과 사고 관련 부품 결함 및 결재 조작 정황. 증거 체인 5종 첨부.'
등록 버튼을 누르기 직전.
이지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커서가 버튼 위에서 깜빡였다.
“잠깐.”
다른 창을 열었다. 검수 기록 DB 조회 화면. 로그인 화면이 순간 깜빡이고 대시보드가 떴다.
“어젯밤 제보 라인에서 하나 더 받았습니다. 감사실 내부 감사관 계정으로 검수 기록 접근이 있었다는 첩보. 혹시 몰라 로그를 확인합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접속 로그 리스트가 주르륵 떴다. 타임스탬프, 계정명, IP 주소가 줄지어 내려갔다.
스크롤이 내려갔다. 오후 6시 15분. 오후 7시 40분. 오후 9시 22분. 이지원의 손가락이 계속 스크롤을 밀었다.
멈췄다.
“오후 9시 22분.”
접속 계정: auditor_minks. 접속 IP: 내부망 192.168.45.107. 민경수 실장의 계정. 이지원의 숨소리가 잠시 끊겼다.
“업무 시간 외 접속입니다.”
로그 항목이 펼쳐졌다. 화면이 한 번 깜빡이고 실행 쿼리 목록이 나타났다.
SELECT. SELECT. SELECT.
그리고.
DELETE FROM inspectionlog WHERE partcode LIKE 'B4%';
입술이 굳어졌다. 쿼리 문자열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그 아래 삭제된 레코드 건수가 작은 글씨로 표시돼 있었다. 47건.
“삭제 쿼리입니다.”
화면에 찍힌 쿼리 로그가 형광등 불빛에 비쳤다. 신우진의 얼굴에도 같은 빛이 얹혔다. 삭제 쿼리 문자열이 동공 안에서 하얗게 반사됐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