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13화
새벽 3시.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형광등 두 개 중 하나가 나간 채였다. 신우진은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삭제된 데이터베이스 화면을 더 들여다볼 이유는 없었다.
책상 위에 수첩을 펼쳤다. 선임의 조사 노트 사본. 정비 일지 대조표 사본. 접속 로그 출력물. 세 묶음을 가로로 배열했다.
왼손이 대조표를 짚었다. B4-112, B4-118, B4-203, B4-207. 네 대의 부품 번호 옆에 납품일이 찍혀 있었다. 2년 전 3월. 교체 주기 만료일은 올해 3월.
선임의 노트 사본을 펼쳤다. 2007년 불량 의심 로트 번호 DSL-0703-11. 그 아래로 TH-1187 계열 부품 세 건의 긴급 교체 기록이 메모되어 있었다. '정상 마모'로 종결되었다는 일자와 결재자 이니셜까지.
신우진은 수첩에 두 시기를 나란히 적었다. 9년 전 TH-1187. 2년 전 B4 계열. 납품사는 둘 다 대영산업. 결함 양상은 패킹·밀봉·마모.
중간에 7년의 간격이 있었다.
접속 로그 출력물을 집어 들었다. 이지원이 확보한 기록. 민경수 감사실장 계정으로 삭제된 B4 검수 기록 47건. 삭제 시각은 사고 접수 이후, 감사 청구 직전.
수첩에 선을 그었다. 삭제된 기록 → 복원 불가. 남은 것 → 대조표, 정비 일지 원본, 선임 노트, 박중호 쪽지, 접속 로그.
증거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방향을 가리켰다.
대영산업이 납품한 부품은 최초 입고 시점부터 결함이 있었다. 구매처는 교체 주기를 3회 연기했다. 감사실은 검수 기록을 삭제했다. 9년 전에도 같은 패턴이 있었다.
신우진은 수첩 새 페이지에 우회 입증 시나리오 초안을 적었다.
'1. B4 계열 부품 납품일과 교체 주기 연기 이력 대조.' '2. 9년 전 TH-1187 계열 유사 결함 사례와 납품사 일치 확인.' '3. 삭제 쿼리 접속 로그로 감사실 개입 입증.' '4. 물리 증거(정비 일지 원본·박중호 금고 보고서) 확보.'
네 번째 항목에 밑줄을 그었다. 박중호 금고. 선임 노트 마지막 페이지에 연필로 적힌 메모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박중호 검수팀장 금고 — B4 원본 보고서 보관 중.'
신우진은 수첩을 덮었다. 유성 매직을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의자 등받이에 걸린 기능복 상의를 집어 들었다.
아침 7시. 금정차량기지 정비 대기실.
박중호가 먼저 와 있었다. 작업 점퍼 차림으로 탁자 앞에 앉아 종이컵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신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을 들었다.
“눈이 반쯤 까졌구나.”
신우진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수첩을 탁자 위에 올렸다.
“기록이 삭제됐습니다. B4 계열 검수 기록 47건.”
박중호가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언제 알아냈나.”
“어젯밤. 이지원 감사관이 접속 로그에서 확인했습니다.”
“누군지는.”
“감사실 내부.”
박중호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종이컵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빈 대기실에 울렸다.
“자네, 하룻밤 새 기록이 사라졌다고 기록 싸움을 포기할 참인가.”
“포기 안 합니다. 다만 경로를 바꿔야 합니다.”
신우진이 수첩을 펼쳤다. 우회 입증 시나리오를 적은 페이지를 보여줬다.
“대조표는 살아 있습니다. 정비 일지 원본도. 9년 전 TH-1187 계열 사례도 확보했습니다.”
박중호의 시선이 수첩의 네 번째 항목에서 멈췄다.
“내 금고.”
“예.”
“누구한테 들었나.”
“7년 전 선임이 조사 노트에 남겼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에.”
박중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종이컵 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확실하냐. 그 노트에 내 금고라고 적혀 있었나.”
“박중호 검수팀장 금고. B4 원본 보고서 보관 중. 연필 메모였습니다.”
박중호가 종이컵을 구겼다.
“그 선임, 떠나기 전까지도 포기 안 했어. 아무도 안 믿어줬는데.”
신우진이 기다렸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획을 그었다.
박중호가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조사가 공식 궤도에 오르면 그때 열겠다. 그 전에는 안 된다.”
“공식 궤도 조건이 뭡니까.”
“감사실이 정식으로 감사에 착수하든지. 아니면 외부 기관이 개입하든지.”
박중호가 일어섰다. 작업 점퍼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냈다.
“두 가지 중 하나는 확보하겠습니다.”
“확보하고 와. 그때 열어 줄 테니.”
박중호가 문 쪽으로 걸었다. 문고리를 잡고 잠시 멈췄다.
“그리고.”
신우진이 돌아봤다.
“9년 전 결재 묵살 때도 똑같은 패턴이었어. 기록 사라지고, 책임은 현장으로 넘어가고. 다른 점은 이번엔 자네가 있다는 거다.”
문이 닫혔다. 복도 저편으로 작업화 소리가 멀어졌다.
신우진은 수첩을 펼쳤다. 박중호의 발언을 요약해 적었다. '공식 감사 착수 또는 외부 기관 개입 시 금고 개방 약속.'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9년 전과 동일 패턴 — 기록 삭제, 현장 책임 전가.'
유성 매직으로 별표를 치고 수첩을 접었다.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검수고 사무실로 향했다.
철도공사 본사 감사실. 오전 10시.
이지원은 모니터 앞에서 세 번째 제보 라인 로그를 열었다. 왼손은 메탈 시계의 밴드를 한 번 만졌다.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첫 번째 제보. ‘구매처 과장, 사고 접수 38분 만에 결재. 통상 4시간 20분 대비 이상.’
두 번째 제보. ‘해당 결재 건, 감사실 실무자 확인 요청에도 즉시 승인됨.’
세 번째 제보는 어젯밤 들어온 메시지였다. ‘서버실 단독 출입. 출입 카드 기록과 실제 출입자 불일치 가능성.’
이지원은 세 로그를 시간 순서로 정렬했다. 구매처 과장이 감사실에 통화한 시각 11시 47분. 서버 로그의 DELETE 쿼리 실행 시각 12시 4분.
차이는 17분.
통화 상대는 내선 번호만 남아 있었다. 감사실 내선 번호 블록 중 하나. 개인 번호는 아니었다. 부서 공용 회선에서 발신됐다.
이지원은 이의 제기 기록을 검색했다. 구매처 과장의 결재 속도에 대해 내부적으로 제기된 이의는 없었다. 조치 요청도 없었다. 묵인했거나, 방조했거나.
통신 기록과 서버 로그를 한 장에 정리했다. 시각 차이를 빨간색 형광펜으로 표시했다. 그 아래에 내부 접근 권한 보유자 목록을 적었다.
민경수 감사실장. 구매처 접점 있음. 결재 라인 최종 승인권자.
팀장급 두 명. 구매처 감사 경력 보유. 이의 제기 기록 없음.
실무자 네 명 중 한 명은 구매처 파견 근무 경력자.
이지원은 펜을 내려놓았다. 세 명으로 압축됐다.
메모를 한 번 접었다. 신우진에게 공유할지 저울질하며 서랍을 열었다. 내부 메모는 신우진의 증거 체인과 합쳐지면 위력이 배가된다. 하지만 유출 경로가 특정되기 전에 메모가 밖으로 나가면 선수를 뺏긴다.
서랍에 넣고 밀어 닫았다. 시계를 다시 한 번 만졌다. 호박색 눈이 모니터의 로그 캡처 화면을 훑었다. 파일을 암호화해 별도 폴더에 저장했다. 폴더명은 ‘계약 갱신 검토 참고자료’.
금정차량기지 직원 휴게실. 점심시간.
최명식이 휴대폰 화면을 신우진 앞으로 밀었다. 게임 길드 채팅창이 열려 있었다. 스크린샷이었다.
“형, 어젯밤 거 다시 확인했는데.”
길드원의 메시지가 여러 줄 이어져 있었다.
‘대영산업 시험 성적서, 10년 넘게 건드린 얘기야. 규격 맞춰서 발급하는 게 기본’
‘지난주에 폐기 예정 문서 목록 갱신됐다고 들었어. B4 계열 부품 관련 서류들.’
‘법무팀에서 직접 지시 내렸다고 하더라.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구매처랑 연결돼 있다는 얘기도 있었어.’
신우진은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 수첩을 펼쳐 박중호의 쪽지를 펼친 쪽에 놓았다. ‘B4 계열 부품은 입고 첫날부터 문제였다’는 문장 옆에 볼펜으로 ‘성적서 조작 10년↑’이라고 적었다.
“폐기 예정 목록 갱신.”
신우진이 짧게 확인했다.
“어제 오후 갱신됐대요. DB 삭제된 거랑 시점이 거의 겹쳐요.” 최명식의 말이 빨라졌다. “이게 우연일까요, 아니면.”
“우연 아니다.”
신우진은 수첩을 접었다. ‘대영산업 성적서 조작 10년↑ 관행’ 아래에 ‘폐기 목록 갱신 – B4 문서 – 법무팀 – 구매처 연결’이라고 한 줄 더 추가했다.
“길드원 신상은 안전하냐.”
“네, 그분도 불안해하고 있어요. 혹시 나중에 연락 오면 저라고 말 안 해주실 수 있죠?”
“익명 보장한다. 증거 체인에 아이디는 안 넣는다.”
최명식이 안심한 듯 뒷목을 만졌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감사실 쪽에는 이 정보 올라가요?”
“이지원에게 공유한다. 문서 목록 정리해서.”
신우진은 휴대폰을 들어 이지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영산업 성적서 조작 관행 10년 이상 지속. 법무팀 관여 정황. 폐기 목록 갱신 시점 DB 삭제와 근접. 문서 목록 별도 전달 예정.’
답장이 바로 왔다. ‘확인했습니다. 저도 전달할 게 있습니다. 저녁 7시 검수고에서 뵙겠습니다.’
신우진은 큼지막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빈 도시락 뚜껑이 덜컹거렸다.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저녁 7시.
형광등이 여전히 미세하게 깜빡였다. 신우진은 책상 위에 증거 체인 초안과 문서 목록을 펼쳐두고 있었다. 노트 사본은 왼쪽, 접속 로그 출력물은 오른쪽에 놓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
이지원이 들어왔다.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상태였다. 메신저백에서 폴더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내부 제보 라인 분석 결과입니다. 구매처 과장의 감사실 통화와 서버 로그 DELETE 시각이 17분 차이입니다.”
신우진이 폴더를 열었다. 시각 대조표와 접근 권한 보유자 명단이 정리돼 있었다. 세 명으로 압축된 부분을 짚었다.
“세 명 확정인가.”
“통신 기록과 권한 보유자 교차 분석 결과입니다. 특정은 아직 안 됩니다.”
“이걸 공유하는 이유는.”
이지원이 잠시 시계를 만졌다. “저 혼자 잡으려면 함정 문서를 투입해야 합니다. 그 전에 우리 쪽 증거가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유합니다.”
신우진은 수첩을 폈다. “여기도 추가분 있다. 대영산업, 성적서 조작이 10년 넘은 관행. 법무팀에서 폐기 예정 문서 목록 갱신까지 지시했다. 시점은 DB 삭제와 거의 겹친다.”
“법무팀까지.”
“폐기 목록에 B4 문서가 포함돼 있다. 입고 첫날부터 결함이 있었던 부품의 증거를 조직적으로 지우고 있어.”
이지원은 신우진의 문서 목록을 훑었다. 대조표, 날인 역순 증거, 성적서 조작 정황, 폐기 목록 갱신 시점. 네 갈래 체인이었다.
“공식 감사는 무산됐지만, 감사실 바깥에서 감사실을 감사할 수밖에 없겠군.”
“박중호 검수팀장 금고에 9년 전 원본 보고서가 있다. 이걸 공식 경로로 열람하려면 감사 청구가 필요한데, 지금은 반려 상태다.”
“우회 경로가 있습니까.”
“정보공개청구다. 사고 조사 보고서는 10년 보존 의무가 있다. 금고에 보관된 보고서도 공공기록물관리법 적용 대상이다. 정식 청구로 절차를 열 수 있다.”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구권자는 해당 부서 소속 직원이나 이해관계인. 박중호 검수팀장 본인에게 청구를 요청하는 게 빠릅니다. 대신 우리가 청구서 초안을 써주고.”
“내가 한다.” 신우진이 선임의 노트 사본을 집었다. “선임이 남긴 메모와 금고 증거의 연결 고리를 문서화해서 청구 근거로 만든다.”
“저는 감사실로 돌아가서 함정 문서를 준비합니다. 유출 경로가 특정되는 대로 바로 확보할 수 있게요.”
“함정 문서 내용은.”
“B4 계열 부품의 감사 일정을 가짜로 잡은 내부 메모입니다. 유출자만 알 수 있는 세부 사항을 포함해서, 밖으로 흘러가면 그 시점부터 경로가 좁혀집니다.”
신우진은 서류 가방에서 USB 하나를 꺼냈다. “이건 문서 체인 사본. 분산 보관 중인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당신도 한 벌 가져라.”
이지원이 USB를 받아 메신저백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함정 문서가 작동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보공개청구 초안은 내일 오전까지 완성한다.”
이지원이 폴더를 챙겨 일어섰다. “그럼 그때 다시.”
문이 닫혔다. 신우진은 책상 위 네 갈래 체인을 차례로 정렬했다. 대조표 위에 날인 역순 증거를 포갰다.
성적서 조작 정황을 그 옆에 놓았다. 폐기 목록 갱신 시점은 맨 아래에 배치했다. 선임의 노트 사본을 펴서 금고 보고서의 보존 근거 조항을 찾기 시작했다.
박중호의 자택 거실. 자정 무렵.
박중호는 잠들지 못했다. 티셔츠 차림으로 금고 앞에 앉아 있었다. 거실 불은 켜지 않았다. 부엌 쪽 작은 조명 하나만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다이얼을 돌렸다. 금고 문이 열렸다.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9년 전 내부 보고서 사본. 표지가 누렇게 바랬다.
첫 장을 폈다. ‘품질 의혹 제기 건 — 검토 보류 결정 통보’라는 상부의 회신 스탬프가 붉게 찍혀 있었다. 문서 우측 상단에는 ‘보존 기한: 10년’이라는 작은 글씨.
손가락으로 스탬프를 짚었다. 검토 보류. 9년 전에도 같은 말로 묻혔다.
“이번에는, 묵살되면 안 되는데.”
박중호의 목소리는 거실 공기 속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금고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