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14화
윤태호의 사무실. 해 질 무렵.
책상 위 모니터 하나가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구매처 과장과의 영상 통화 창이 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반쯤 비워진 커피잔. 왼쪽 서류철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윤태호가 커프링크스를 손목에서 풀며 말했다.
“신우진. 그 검수 주임 말이죠.”
“예, 과장님.”
화면 속 구매처 과장은 40대 초반. 와이셔츠 소매를 걷은 채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인사 기록을 열람해보니, 이번 건 말고도 쌓인 게 좀 있더군요.”
“구체적으로.”
구매처 과장이 화면 밖을 한 번 훑었다. 인사 시스템 창을 열고 마우스를 굴렸다.
“2년 전 정기 검수에서 부품 교체 주기 준수 태만으로 구두 경고 한 건. 작년에는 검수 보고서 지연 제출로 1차 서면 경고. 두 건 모두 고영호 팀장의 결재가 있습니다.”
윤태호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래요. 그 팀장 결재를 이번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고영호 팀장은 신우진에게 유독 관대하다는 인사 평정이 있습니다. 같은 부서원들 인터뷰에서도 확인됐습니다.”
“관대함이 아니라 방조죠.”
구매처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위 보고와 품질 검수 태만. 두 가지로 혐의를 구성하면 징계 사유로 충분합니다.”
“근거는.”
“이번 B4 검수에서 교체 이력을 임의로 뒤엎은 행위 자체가 허위 보고에 해당됩니다. 거기에 최근 7건의 검수 기록 대조표에서 검수 소요 시간이 내규보다 평균 38% 짧았습니다. 품질 검수 태만으로 몰기에 충분하죠.”
윤태호가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두드렸다.
“인사팀에는 언제 올릴 예정입니까.”
“내일 오전 중으로 초안을 뽑겠습니다. 팀장 결재 받고 바로요.”
“법무 검토는요.”
“징계 사유 목록을 뽑은 뒤 법무팀에 병행 검토 요청할 겁니다.”
윤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 아래로 퇴근길 차량들이 붉은 미등을 켜고 늘어서 있었다.
“한 가지만 더. 그가 소지한 개인 검수 노트, 사본이라도 확보할 수 있나요.”
구매처 과장이 잠시 멈칫했다.
“개인 노트는 공식 문서가 아니라서 징계 절차로는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럼 인사 청문회에서 제출 명령을 받아내면 되죠. 가능합니까.”
“징계 청문회 위원회 구성 후 가능합니다. 다만 인사팀장의 승인이 먼저 필요하고요.”
“인사팀장은 내가 직접 연락하지요.”
구매처 과장이 목록을 저장하며 물었다.
“혹시 노트에 이미 대비하고 있을 가능성은.”
윤태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남자, 기록을 남기는 버릇이 있더군요. 버릇은 고치기 어려우니까요. 지금쯤 어딘가에 또 적고 있겠죠.”
차량기지 정비고 사무실.
신우진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전산실 서버 접속 창이 떠 있었다. 삭제 로그를 열고, B4 부품 검수 기록의 백업 경로를 따라갔다. 백업 서버 IP 주소. 동기화 시점.
커서가 깜빡였다.
백업 파일의 타임스탬프는 오늘 오전 4시 12분. DELETE 쿼리 실행 시점보다 4시간 47분 빨랐다. 동기화가 완료되기 전의 시점이었다.
신우진은 백업 파일을 열었다.
디렉터리 구조만 남아 있었다. 인덱스 파일은 비어 있었다. B4 계열 부품 검수 데이터가 들어 있던 테이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백업 소프트웨어는 텅 빈 디렉터리를 충실히 덮어씌운 것이었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전체 동기화 전에 디렉터리만 살려뒀군.”
모니터를 끄지 않았다. 창을 하나 더 열었다. 전산실 접속 로그.
민경수 계정 외에 서버실 출입 기록이 남아 있었다. 지난밤 11시 50분. 시스템 관리자 계정, 접속 시간 4분.
백업 설정을 변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신우진은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디지털 복구는 불가능했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을 감았다 떴다. 화면은 여전히 텅 빈 디렉터리였다.
일어나서 책상 옆 서류철을 집었다. 개인 검수 노트를 펼쳤다. 최근 6개월간의 B4 계열 부품 검수 기록.
직접 측정한 마모 수치. 교체 주기 연기 사유. 팀장 고영호의 구두 지시 사항까지.
데이터베이스가 사라져도 이 노트는 남아 있었다.
책상 오른쪽 서랍을 열었다. 선임의 조사 노트 사본을 꺼냈다. 책상 위에 나란히 펼쳤다. 왼쪽이 7년 전 선임의 글씨. 오른쪽이 자신의 글씨.
신우진이 선임의 노트를 넘겼다. 빛바랜 원고지에 검은 볼펜 글씨. 부품 번호 TH-1187.
작동유 누출 의심. 유압 계통 이상. 날짜는 7년 전 9월.
눈이 멈췄다.
작동유. 유압 계통.
왼손을 내려다봤다. 집게손가락의 흉터. 7년 만에 만져도 여전히 올록볼록했다.
손끝으로 흉터를 문질렀다.
그날은 야간 근무였다. TH-1187 계열 유압 밸브가 누출을 일으켰다. 신우진은 유도로에서 밸브를 직접 열었다.
작동유가 분사됐다. 왼손 장갑이 찢어졌다. 고온의 유압유가 손가락을 적셨다.
3도 화상. 피부 이식은 하지 않았다. 흉터가 남았다.
당시 사고 보고서에는 부품 고장이 아니라 작업자 과실로 기재됐다. 선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고서를 읽던 신우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선임의 입은 이미 닫혀 있었다.
신우진이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KD-2037 계열. 유압 밸브. 제조사 대영산업.
B4 차량군의 작동유 계통 부품. TH-1187 계열. 유압 밸브. 제조사도 대영산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도 납품사는 하나였다.
신우진이 선임의 노트를 앞으로 넘겼다. TH-1187 관련 페이지를 펼쳐놓고 자신의 검수 노트에서 KD-2037 페이지를 찾았다. 두 페이지를 나란히 놓았다.
부품 구성도. 작동유 흐름 방향. 패킹 규격. 밀봉 방식.
구조가 비슷했다.
신우진이 볼펜을 집었다. 검수 노트 빈칸에 선임의 부품 번호를 적었다. TH-1187. 그 옆에 물음표 하나.
7년 전 유압유 사고의 원인 부품과 현재 B4 부품이 같은 설계 계통일 가능성. 그렇다면 결함은 부품 자체가 아니라 설계에서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7년 동안 고쳐지지 않은 결함. 세 번의 납품 교체 주기마다 반복된 문제.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TH-1187 — KD-2037. 두 부품 번호를 연결했다.
서랍에서 대영산업 납품 목록표 사본을 꺼냈다. 펼쳤다. 7년 전 납품 이력. TH-1187 계열 부품이 포함돼 있었다. 납품사는 대영산업.
신우진이 목록표 표면을 손끝으로 짚었다.
같은 납품사. 7년 동안 이어져 온 계약.
전화벨이 울렸다.
사무실 전화기. 액정 화면에 ‘감사실 이지원’이라고 떴다.
신우진이 수화기를 들었다.
“신우진이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신우진 주임님. 구매처 과장이 오늘 오후 주임님의 인사 기록을 전면 열람했습니다. 경고 이력, 검수 보고서 지연 제출 건, 최근 근태까지 전부입니다.”
신우진이 볼펜을 놓았다.
“징계 준비로군.”
“네. 목록을 뽑아 법무팀과 병행 검토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내일 오전 중 인사팀에 접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혐의 구성은.”
“허위 보고와 품질 검수 태만. 두 가지로 잡고 있습니다. 주임님의 최근 검수 기록 대조표에서 검수 시간 내규 미달 건까지 확보된 상태입니다.”
신우진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
“내 검수 노트. 그건 공식 문서가 아니니까 아직 확보하지 못했을 거다.”
“맞습니다. 다만 청문회 위원회가 구성되면 제출 명령이 가능해집니다.”
“그 전에 정리한다.”
이지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청문회 절차 대비 자료를 준비해 두십시오. 제가 법적 대응 방안을 검토해 두겠습니다.”
“알겠다.”
신우진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검수 노트를 펼쳤다. TH-1187과 KD-2037을 연결한 선을 다시 한 번 따라 그었다. 그 옆에 대영산업이라고 적었다.
그때 사무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액정 화면. 발신자 표시 — ‘본사 인사팀’.
신우진이 수화기를 내려다봤다.
벨이 두 번 더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