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16화

사무실 형광등이 윤태호의 도장을 비추고 있었다.

신우진은 보고서 초안을 책상 위에 펼쳤다. 박중호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윤태호 과장.”

박중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7년 전에는 과장이 아니었을 텐데.”

신우진이 초안의 날짜를 짚었다. 2007년 11월 14일.

“당시는 구매처 대리였습니다.”

“대리가 어떻게 사고 조사 보고서에 도장을 찍지.”

“결재 라인에는 없습니다.”

신우진이 종이를 가리켰다. 도장은 결재 란이 아니라 하단 여백에 찍혀 있었다.

“검토자 표시도 아닙니다. 그냥 도장만 있습니다.”

박중호가 초안을 집어 들었다. 빛에 비춰 봤다. 잉크 색이 옅었다.

“이건 정식 결재가 아니야. 그런데 왜 여기에.”

“고영호 선임이 보관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네.”

박중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된다는 듯이.

“보여줄 수가 없었겠군. 결재 라인도 아닌 사람이 도장을 찍었으니.”

신우진이 노트 원본에서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7년 전 부품 검수 기록이 빼곡했다.

“TH-1187 계열 부품 세 건. 긴급 교체 기록 없이 정상 마모 처리됐습니다.”

“그 부품들도.”

“대영산업 납품입니다.”

박중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패턴이 완전히 같군.”

“9년 전 보고서도 같은 납품사입니다.”

박중호가 금고에서 꺼낸 9년 전 보고서 사본을 떠올렸다. ‘검토 보류 결정 통보’ 스탬프.

“9년, 7년, 그리고 이번.”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일 설계, 동일 패킹 문제, 동일 납품사.”

“윤태호는 그 사이 과장이 됐고.”

“계약 갱신도 계속 윤태호 과장이 결재했습니다.”

박중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B4 계열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내 금고 보고서. 언제 꺼낼지 내가 정한다.”

“알겠습니다.”

“감사실의 정식 감사 착수. 또는 외부 기관 개입.”

박중호가 돌아섰다.

“그 두 가지가 충족되기 전에는 금고 문을 열지 않겠다.”

“약속은 지키셨습니다.”

신우진이 보고서 초안을 가리켰다.

“금고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만으로도.”

“네 선임의 노트가 그걸 증명한 거다.”

박중호의 시선이 초안으로 향했다.

“윤태호의 도장. 네가 찾아낸 거야.”

오전 9시. 차량기지 정비사무실.

신우진은 책상 위에 서류를 펼쳐 두고 있었다. 검수 일지, 부품 입고 기록, 사용 연한 연장 대조표. 세 묶음을 순서대로 정렬했다.

문이 열렸다.

인사팀 직원이었다. 검은색 정장에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30대 초반. 안경 너머 눈빛에 표정이 없었다.

“신우진 주임님.”

“네.”

“인사팀 김대리입니다.”

김대리가 봉투를 내밀었다. 신우진이 받았다.

“징계 청문회 소집 통보서입니다.”

신우진이 봉투를 뜯었다. 통보서를 꺼내 펼쳤다.

위반 혐의: 허위 보고 및 품질 검수 태만. 대상 부품: KD-2037-114. 청문회 일시: 내일 오전 10시. 장소: 본사 인사팀 청문회실.

신우진이 통보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혐의 근거가 뭡니까.”

“구매처에서 접수한 검수 기록 이상 보고입니다.”

“어떤 기록이 이상인지.”

김대리가 태블릿을 꺼냈다. 화면을 넘겼다.

“KD-2037-114 부품의 교체 일정 조정 결재 건입니다. 도장 날인 순서가 비정상적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해당 건은 구매처 과장 윤태호가 직접 결재했습니다.”

“그 부분은 청문회에서 다루시면 됩니다.”

김대리가 태블릿을 내렸다.

“통보서 수령 확인 서명 부탁드립니다.”

신우진이 통보서 하단에 사인했다. 볼펜을 내려놓았다.

“이의 제기 절차는.”

“청문회 개시 전까지 서면으로 제출하시면 됩니다. 오늘 오후 6시까지 접수된 건에 한해 심의에 포함됩니다.”

“서식은.”

“인사규정 별지 제7호입니다.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김대리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멈췄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청문회에는 노조 대표나 동료 직원의 방청이 가능합니다. 필요하시면 사전 신청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신우진은 통보서를 책상 위에 펼쳐 두고 일어섰다. 유도로 쪽 창가로 걸어갔다. B4 차량군이 그대로 서 있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최명식이었다. 검수복 차림에 안전모를 손에 들고 있었다.

“형. 인사팀에서 왔다면서요.”

“청문회 통보다.”

“뭐라고요?”

최명식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무슨 청문회요. 무슨 혐의로.”

“허위 보고. 검수 태만.”

“말도 안 돼. 형이 검수를 어떻게 하는지 내가 봤는데.”

“명식아.”

신우진이 책상으로 돌아왔다.

“자료 찾는다.”

“무슨 자료요.”

“B4 검수 일지. 내가 작성한 것 전부.”

최명식이 자기 책상으로 달려갔다. 서류 캐비닛을 열었다.

“여기 있어요. 2년 전부터 월별로 다 정리해 뒀어요.”

“입고 기록도.”

“입고 기록은 전산이고. 실물은 물류창고다.”

“물류창고 건은 내가 확인한다.”

신우진이 검수 일지 묶음을 받아 펼쳤다. 손가락이 페이지를 빠르게 넘어갔다.

“날짜별로 정렬해.”

“알겠습니다.”

최명식이 옆 책상으로 일지를 옮겼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형. 여기. 2년 전 3월 17일.”

최명식이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B4 첫 입고 검수. 형이 직접 했네요. 씰링 패킹 외경이 규격보다 0.3밀리 작다고 기록했어요.”

“그리고.”

“바로 아래. ‘사용 적합 판정’. 구매처에서 시험 성적서 보내왔다고.”

“성적서 번호가.”

“잠깐만요.”

최명식이 일지를 들여다봤다.

“TS-2018-1147.”

신우진이 수첩을 꺼내 번호를 적었다. 한국철도부품시험원 발행이었다.

“그 시험원은 5년 전 폐쇄됐다.”

“네? 그럼 그 성적서는.”

“허위 발급일 가능성이 높다.”

최명식의 동공이 커졌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럼 처음부터.”

“처음부터 가짜 성적서로 통과시킨 거다.”

최명식이 책상을 짚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걸 왜 기록만 하고 말았어요.”

“당시 팀장 결재에서 반려됐다. 시험 성적서가 있으니 문제없다는 이유로.”

“누가.”

“전임 팀장이다. 지금은 퇴직했고.”

신우진이 검수 일지의 다른 페이지로 넘어갔다.

“작년 9월. 2차 교체 예정이었는데 연기됐다.”

“연기 결재는.”

“윤태호 과장.”

“또 윤태호.”

최명식이 일어섰다. 복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앉았다.

“형. 과거 기록도 찾을게요. TH-1187 계열. 7년 전 거.”

“그건 이미 있다.”

신우진이 선임의 노트를 책상 위에 올렸다.

“고영호 선임 노트. TH-1187 부품 검수 기록이 전부 들어 있어.”

최명식이 노트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손가락이 베테랑 검수원의 필체를 더듬었다.

“이거… 선임이 남긴 거예요.”

“명식아.”

“네.”

“기록고에서 KD-2037 계열 부품 입고 기록 원본을 복사해 와.”

“원본이요. 전산 말고.”

“수기 입고 대장. 물류창고에 보관 중이다.”

최명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전모를 책상에 내려놓고 작업 점퍼를 걸쳤다.

“바로 갔다 올게요.”

“기록고 출입 권한은.”

“지난주에 갱신했어요.”

최명식이 문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뒤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형. 청문회.”

“말해.”

“내가 증인으로 나갈게요. 형이 어떻게 검수했는지 내가 다 봤고.”

“필요하면 요청한다.”

“꼭 불러줘요.”

최명식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사라졌다. 대신 단단한 무언가가 들어차 있었다.

“혼자 가지 마요.”

문이 닫혔다.

오전 11시. 감사실.

이지원이 모니터 두 대를 동시에 확인하고 있었다. 왼쪽 화면은 이메일 송신 로그, 오른쪽은 내부 메신저 트래픽 모니터였다.

책상 위에는 문서 한 부가 놓여 있었다. 표지에 ‘B4 계열 부품 시험 성적서 검증 요청’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품 번호는 실제와 달랐다. 시험 성적서 번호도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함정 문서였다.

이지원이 내부 메신저를 열었다. 수신자 목록을 세 명 지정했다. 구매처 담당자, 물류관리 담당자, 예산 담당자. 감사실 내부 유출 용의자 3명이었다.

메시지를 입력했다. ‘B4 계열 긴급. 중앙시험소 성적서 번호 검증 요청 건. 확인 부탁드립니다.’

파일을 첨부했다. 전송.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7분.

이지원은 모니터를 보며 기다렸다. 트래픽 모니터에는 이상이 없었다. 이메일 로그도 조용했다.

11시 14분. 메신저 알림. 구매처 담당자: ‘확인했습니다. 담당자에게 배정하겠습니다.’

11시 21분. 물류관리 담당자: ‘해당 번호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예산 담당자에게 이관합니다.’

11시 33분. 예산 담당자: ‘파일 확인. 검토 후 회신 예정.’

이지원이 트래픽 모니터를 다시 확인했다. 예산 담당자의 계정. 그 계정에서 외부 IP로 파일이 전송되는 흔적은 없었다.

아직.

이지원이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본사 건물 밖으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함정 문서는 작동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 문서를 클릭했다. 누군가 이 문서의 존재를 인지했다. 정보원이 움직이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유출 경로가 특정된다.

기다림만 남았다.

이지원이 자리로 돌아와 메모를 한 줄 적었다. ‘함정 문서 투입 완료. 반응 지연 중. 이중 경로 가능성 배제하지 않음.’

오후 2시. 태성정밀 본사 접견실.

윤태호가 긴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민경수 실장이 자리했다. 구매처 과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민경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청문회 자료 다 준비했어요.”

“신우진 쪽은.”

“일자 불일치가 하나 있습니다.”

민경수가 서류를 펼쳤다.

“2년 전 3월 17일 검수 일지. 부품 입고 날짜가 물류창고 입고 대장과 하루 차이 납니다.”

“하루.”

“검수 일지는 3월 17일. 입고 대장은 3월 18일.”

윤태호가 서류를 끌어당겼다.

“검수가 입고보다 하루 빠르군요.”

“네. 이 부분을 집중 공략하면 됩니다. 절차 위반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합니다.”

“다른 건.”

“도장 날인 순서 건은 우리 쪽이 더 취약합니다. 그 부분은 신우진이 결재자 전원을 지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모든 연기 결재를 했다는 거.”

“네.”

윤태호가 미소 지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

“그래서 그걸 먼저 지적한 거군요. 구매처에서 검수 기록 이상 보고를 올린 이유가.”

“선제 대응입니다.”

문이 열렸다. 구매처 과장이 들어왔다. 회색 정장에 두꺼운 서류 철을 들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앉으시죠.”

구매처 과장이 자리에 앉으며 서류 철을 펼쳤다.

“신우진의 검수 기록을 전수 조사했습니다. 일자 불일치 말고도 두 건 더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작년 9월 교체 시점 조정 건. 신우진이 기록한 부품 상태 점검 수치와 구매처가 보유한 사양서의 기준치가 다릅니다.”

“얼마나.”

“0.2밀리 차이입니다.”

윤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 오류로 몰기에 충분하군요.”

“두 번째는. 무정차 통과 사고 당일 검수 기록입니다.”

구매처 과장이 페이지를 넘겼다.

“신우진이 사고 발생 6시간 전에 KD-2037-114 부품을 점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상 없음으로 판정했습니다.”

“그게 검수 태만 혐의의 핵심이죠.”

“네. 부품 결함이 사고 원인이라면, 그 결함을 6시간 전에 발견하지 못한 검수 책임을 묻는 겁니다.”

민경수가 끼어들었다.

“신우진이 주장하는 대로 결함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검수한 사람이 왜 그걸 놓쳤냐는 논리.”

“맞습니다.”

윤태호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손가락을 모았다.

“청문회에서 신우진이 가져올 자료는.”

구매처 과장이 손가락을 접었다.

“첫째. 자신의 검수 일지. 둘째. 교체 일정 연기 결재 문서. 셋째. 고영호의 조사 노트.”

“고영호.”

윤태호의 눈썹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네. 7년 전 검수원입니다. 퇴직했고. 그 사람 노트를 신우진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윤태호가 잠시 침묵했다. 손가락이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그 노트에 뭐가 있는지.”

“확인 중입니다.”

“확인하십시오. 빨리.”

윤태호가 일어났다.

“청문회는 내일입니다. 신우진이 제출할 이의 신청서도 오늘 중으로 접수될 겁니다. 그 전에 우리가 모르는 자료가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태호가 구매처 과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고영호 노트에 7년 전 사고 조사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대비하십시오.”

“보고서요.”

“당시 보고서 초안 하나가 사라졌어요. 누군가 가져갔고,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민경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지금 말씀하시는.”

“가능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준비하시라는 뜻이죠.”

윤태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다. 어딘가 비꼬는 듯한 톤이 스며 있었다.

“모든 건 가능성으로 시작하니까요.”

저녁 8시. 정비팀 사무실.

신우진이 혼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방어 자료 묶음이 완성되어 있었다. 검수 일지 사본, 입고 기록 대조표, 교체 일정 연기 결재 문서 복사본. 세 묶음을 노란색 파일에 담았다.

왼손 집게손가락 흉터를 문질렀다. 유압유가 스며들었던 자리. 7년 전 그날 밤, 탈선 현장에서 느꼈던 뜨거움.

전화벨이 울렸다. 이지원이었다.

“신우진입니다.”

“이지원입니다. 함정 문서 투입했습니다.”

“반응은.”

“아직 없습니다. 정보원이 움직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유출 경로 특정은.”

“인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반응이 지연된다는 건 이중 경로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 이지원의 숨소리가 들렸다.

“청문회 자료는 준비하셨습니까.”

“방금 완료했다.”

“이의 신청서는.”

“제출했다. 오후 5시 40분.”

“내일 청문회. 방청 신청했습니다.”

신우진이 전화기를 바라봤다.

“감사실 인원이 방청하는 건 앞으로의 절차에 영향을 줍니다. 사전에 알려드리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신우진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눈앞의 방어 자료 묶음을 바라봤다. 검수 일지.

입고 기록. 대조표. 선임의 노트.

형광등 불빛이 흉터를 비추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를 따라 꿈틀거리는 흉터.

입술이 열렸다.

“이건.”

목소리가 낮았다.

“내가 아니라 시스템을 심판받는 자리다.”

신우진이 파일 묶음을 집어 들었다. 내일 아침 이걸 들고 청문회장으로 갈 것이다. 손가락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왼손으로.

형광등이 깜빡였다.

무정차 통과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