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17화

오전 9시 30분. 정비팀 사무실.

신우진은 책상 위에 펼쳐진 방어 자료 묶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검수 일지 사본 왼쪽에 입고 기록 대조표를 포갰다. 교체 일정 연기 결재 문서 복사본은 오른편. 세 묶음 사이로 KD-2037-114 부품 사양서가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오른손 검지가 입고 기록의 날짜 열을 짚었다. 3월 18일. 검수 일지에는 3월 17일. 하루 차이. 구매처 과장이 이걸 물고 늘어질 건 뻔했다.

물류창고 입고 대장 원본 대조가 필요한 지점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짧고 단단한 노크. 세 번.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한경숙이 문간에 서 있었다. 노조 조끼 위에 기능성 재킷을 걸친 평소 차림. 그러나 표정이 달랐다. 입술을 꼭 다문 채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잠깐 시간 되나.”

한경숙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복도에서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절한 톤이었다.

신우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왼손 집게손가락 흉터가 책상 모서리에 스쳤다.

“무슨 일이지.”

“여기서 할 얘긴 아니다. 노조 사무실로 가자.”

신우진은 방어 자료 묶음을 노란색 파일에 밀어 넣었다. 파일을 서랍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잠갔다. 유성 매직을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알겠다.”

오전 9시 35분. 복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한경숙이 반 발짝 앞섰다. 행정동 쪽 유리문을 지나칠 때마다 그녀의 시선이 복도 끝과 사무실 문을 빠르게 훑었다.

신우진은 오른손을 기능복 주머니에 넣었다. 복도 저편에서 물류팀 직원 하나가 서류 뭉치를 들고 걸어왔다. 한경숙은 그가 지나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물류팀 직원이 계단 쪽으로 꺾어지자 한경숙이 걸음을 조금 늦췄다. 신우진과 어깨가 나란히 맞춰졌다.

일상적인 대화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노조 사무실 문이 보였다. 닫혀 있었다. 한경숙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잠금장치가 두 번 돌아가는 소리가 복도에 낮게 울렸다.

오전 9시 45분. 노동조합 사무실.

문이 닫히고 잠겼다. 한경숙이 블라인드를 내렸다. 창밖 정비고 풍경이 가로 줄무늬로 잘렸다.

작은 탁자 앞에 신우진이 섰다. 탁자 위에는 백지 상태의 보고서 용지 몇 장과 노조 공식 문구가 찍힌 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책상 서랍은 닫혀 있었다.

한경숙이 탁자 건너편으로 돌아가 섰다. 팔짱을 끼지 않았다. 두 손을 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작년 가을이다. 10월쯤.”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그녀의 눈에 고정했다.

“조합원 하나가 찾아왔다. 정비팀도 아니고 검수팀도 아니다. 자재 창고 쪽 인원이었어.”

한경숙의 왼쪽 팔뚝, 기름 화상 흉터가 소매 아래로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B4 계열 부품 이야기였다. 납품 단가가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있고, 시험 성적서는 규격에 맞춰서 새로 써서 낸 거라고 했어. 대영산업 거라고 딱 집었고.”

신우진의 손가락 마디가 살짝 굽어졌다. 대영산업. 7년 계약. TH-1187과 KD-2037을 같은 설계로 납품한 바로 그 회사.

“증거는.”

한경숙이 고개를 저었다.

“증거 불충분이었어. 납품 단가 비교 자료 같은 건 우리 손에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시험 성적서는 중앙시험소 걸 들먹이는데, 그쪽 기록은 일반 열람이 안 돼.”

잠시 멈췄다. 그녀의 눈이 깜빡였다.

“결정적으로는 제보자가 녹취도 문서도 남기지 말아 달라고 했어. 신변 보호를 절실하게 요구했어.”

“이유는.”

“납품사 쪽 인원이랑 연루된 다른 사람들한테서 보복당할 거라는 공포였지. 구체적으로 누구라고는 안 했는데… 말투로 봐선 이미 겪은 뒤였어.”

한경숙의 손가락이 탁자 위를 한 번 눌렀다.

“그래서 봉인했다. 이 노조 사무실에 문서화된 건 하나도 없어. 내 머릿속에만 있어.”

신우진은 오른손 검지를 허공에 한 번 그었다. 짧은 가로선.

서랍 속 빈 보고서 용지. 7년 전 고영호의 조사 노트. 9년 전 박중호 금고 속 보고서.

그 모든 기록과 평행선을 긋는 제보였다. 문서는 없지만 내용은 구체적이었다. 시험 성적서 조작 관행을 언급한 건 이 제보자가 처음이었다.

“왜 지금 말하는 거지.”

한경숙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니 청문회 소식 들었다. 허위 보고랑 검수 태만이라며. 웃기는 소리지. 니가 무슨 허위 보고를 하냐.”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작년 10월에는 외로운 제보였어. 나 혼자 들었고, 나 혼자 묻었어. 그런데 지금은 달라. 니가 같은 회사, 같은 계열 부품에서 결함을 찾았고, 결재 라인도 같은 놈들한테 걸렸고, 그 놈들이 지금 니 목을 치려고 하고 있잖아.”

“제보자가 입 열 가능성은.”

“여기까지.”

한경숙의 손바닥이 탁자를 짚었다.

“나한테 말한 걸로 끝이다. 공식 조사나 청문회에 나오는 건 안 돼.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판단한 거야.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알겠다.”

신우진의 시선이 빈 보고서 용지 위를 스쳤다.

“한 가지만 확인하겠다. 제보 일시. 구체적인 날짜 말고, 언제쯤이었는지.”

“작년 10월 둘째 주. 수요일이었어. 퇴근 무렵.”

“납품사명은.”

“대영산업. 확실해.”

“부품 계열.”

“B4라고 했다. B4-100번대랑 200번대 둘 다 문제라고 했어.”

신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B4-112. B4-118.

B4-203. B4-207. 자신이 대조표에서 확인한 네 대의 부품 번호가 정확히 그 범위에 들어 있었다. 작년 10월이면 그 네 대가 납품된 지 1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누군가는 이미 그때 결함을 알고 있었다. 시험 성적서가 조작된 것도 알았던 것이다. 대영산업이라는 납품사명까지 정확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그 지식은 묻혔다. 한 사람의 공포와 한 사람의 전략적 판단 속에.

“납품 단가 부풀리기. 입증 가능한 근거는.”

한경숙이 손을 펼쳤다.

“입찰 공고랑 실제 계약 금액을 비교해야 하는데, 구매처 과장 결재 라인에 묶인 자료니까. 니가 그걸 뒤지려면 구매처 규정 제12조 같은 걸로 정식 열람 신청을 해야 해.”

신우진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구매처 규정 제12조. 비정기 문서 점검 절차. 구매처 과장 윤태호가 관리하는 서류 더미.

“지금은 그쪽 움직임이 어렵습니다. 청문회 이후에나 가능하겠지요.”

“맞아. 지금은 니 청문회가 먼저야. 이 제보가 널 직접 구해줄 순 없어. 문서가 없으니까.”

한경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팔을 가슴 앞에서 접었다. 노조 지부장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니가 버티면, 상황은 달라져. 니가 살아남으면 내부 감사든 언론이든 이게 두 번째 제보가 될 수 있어.”

“첫 번째는.”

“내가 작년에 들은 거. 두 번째는 니가 지금 싸우고 있는 거. 세 번째는 그때 가서 만드는 거야.”

한경숙이 블라인드를 올렸다. 정비고의 아침 햇살이 사무실 안으로 쏟아졌다.

신우진은 빈 보고서 용지를 한 장 집었다. 유성 매직을 뽑아 왼쪽 상단에 날짜를 적었다. 작년 10월 둘째 주 수요일. 퇴근 무렵. 그 아래에 단어 세 개를 가지런히 썼다.

대영산업. B4. 시험 성적서 조작.

글씨는 또박또박했다. 오른손 검지가 마지막 글자에서 멈췄다.

“기록은 남겨도 되는 거냐.”

한경숙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팔짱을 풀었다.

“제보자 이름 빼고. 그건 남아도 된다. 어차피 니 머릿속에도 남아 있을 거 아니냐.”

신우진이 펜을 내려놓았다. 손가락 흉터가 용지 위로 짧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제보는 문서가 아니었다. 법적 효력도, 증거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B4 계열 부품이 대영산업에서 처음 납품되던 시점부터 결함이 있었고, 그걸 은폐하기 위해 시험 성적서가 조작되어 왔으며, 납품 단가까지 조작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세 개의 층위. 부품 결함. 성적서 위조. 계약 사기. 그걸 10월에 이미 알고도 봉인한 현장.

신우진이 용지를 접었다. 네 번. 손바닥만 한 크기로 접힌 종이를 기능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노란색 파일과는 다른, 몸에 직접 닿는 주머니였다.

“내일 청문회.”

한경숙이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버텨라.”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형광등 불빛이 왼손 흉터를 따라 길게 비추고 있었다.

사무실 문이 닫혔다. 한경숙의 발소리가 복도 밖으로 멀어졌다.

신우진은 손에 들린 메모를 책상 위에 펼쳤다. 구두로 들은 내용을 받아적은 종이 한 장. 제보 일시, 부품 계열, 납품사명, 그리고 덮어졌다는 사고의 개요.

오전 11시. 차량기지 사무실 창밖으로 입환 중인 전동차가 느리게 지나갔다.

메모를 옆으로 밀고 서랍에서 선임 노트를 꺼냈다. 7년 전 고영호의 조사 노트. 표지 안쪽에 윤태호의 도장이 찍힌 사고 조사 보고서 초안이 접혀 있었다.

두 개를 나란히 폈다.

왼쪽이 한경숙의 제보. 오른쪽이 7년 전 탈선 사고의 원인 부품.

B4 계열.

둘 다.

신우진의 검지가 한경숙 메모의 '납품사'를 짚었다. 대영산업. 다시 선임 노트의 부품 목록을 짚었다. TH-1187 계열. 납품사도 대영산업.

눈을 가늘게 떴다.

부품 계열은 다르다. TH-1187과 KD-2037.

그러나 패킹·밀봉·마모 양상은 같은 결함 패턴이다. 앞선 사건에서 대조해둔 교차 검증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납품사가 같다.

기간도 겹친다. 7년 전과 지금. 대영산업의 계약 기간 7년이 우연이라면, 결함의 반복도 우연인가.

손가락이 메모 아래에 적힌 날짜로 내려갔다.

한경숙이 전달한 제보의 사고 발생일. 9년 전이었다.

신우진이 키보드를 당겼다.

사내 전산망 로그인. 구매처 과거 계약 조회 메뉴로 진입했다. 검색 조건에 'B4 계열'을 입력하고 연도 범위를 10년으로 잡았다.

로딩 바가 움직였다.

옆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지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7년 전과 9년 전. 두 건 모두 B4 계열. 납품사 동일. 과거 계약 이력 조회 들어간다.'

화면이 바뀌었다.

계약 목록이 연도별로 정렬됐다. 최근 7년은 모두 대영산업이었다. KD-2037 포함 제동 계통 14종. 윤태호의 결재가 모든 갱신 건에 찍혀 있었다.

스크롤을 더 내렸다.

7년 전. TH-1187 계열 납품 계약. 납품사는 대영산업. 구매처 담당자 란에 '대리 윤태호'라고 적혀 있었다.

메모 속 날짜와 일치했다.

신우진의 손이 멈췄다. 선임 노트에 적힌 사고 조사 보고서 초안의 날짜. 2007년 11월 14일. 계약 시작일과 불과 석 달 차이였다.

더 올렸다.

9년 전.

로딩 바가 다시 돌았다. 화면이 갱신되며 9년 전 계약 건이 나타났다.

B4 계열 부품.

단독 수의계약.

납품사는 '정암정밀'.

신우진의 손가락이 마우스에서 멎었다.

계약서의 결재란을 클릭했다. 문서 이미지가 확대됐다. 구매처 과장 결재란에 친필 서명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지금과 같은 이름.

윤태호.

무정차 통과1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