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18화
오후 6시 30분. 차량기지 사무실.
형광등이 낮게 윙윙거렸다. 신우진은 책상 위에 선임 노트와 한경숙의 메모를 나란히 펼쳐둔 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9년 전 계약서 이미지가 여전히 화면에 떠 있었다. 윤태호의 친필 서명.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멈칫, 다시 두 걸음.
문이 열렸다. 최명식이었다. 검수복 차림 그대로, 안전모는 벗어서 왼손에 쥐고 있었다.
“선배님, 아직 안 가셨네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오른손이 뒷목으로 올라갔다.
신우진이 의자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그게... 저번에 말씀드렸던 거 있잖아요. 게임 길드원 중에 대영산업 직원.”
신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명식이 안전모를 빈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에 게임 접속했는데, 걔가 채팅으로 좀 수상한 소릴 한 거예요. 예전에 회사에서 큰 사고가 났었는데 위에서 그냥 덮었다고.”
“언제.”
“네?”
“사고가 언제 났다는 거냐.”
최명식이 눈을 깜빡였다. 신우진의 즉각적인 반응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말 안 했어요. 그냥 '옛날에'라고만. 근데 선배님, 표정이...”
“계속 말해라.”
“예, 그... 그러니까 제가 농담처럼 '무슨 사곤데 덮기까지 했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걔가 '차량기지 쪽에서 부품 문제로 탈선할 뻔한 거'라고.”
탈선.
신우진의 왼손 집게손가락이 움찔했다. 유압유 흉터 아래 신경이 옥신거렸다.
7년 전. 고영호 선임의 노트. TH-1187 계열. 윤태호의 도장이 찍힌 사고 조사 보고서 초안. 은폐.
“정확히 탈선할 뻔했다고 했나.”
“예. '탈선할 뻔한 거'라고. 제가 '그게 사실이면 엄청 큰 사건 아니냐' 그랬더니, 갑자기 '아니다 내가 헛소리했다'면서 채팅 지우고 접속 종료했어요.”
최명식의 오른손이 다시 뒷목으로 올라갔다. 손가락이 목덜미를 두 번 문지르고 내려왔다.
“그리고 저한테 귓속말로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라'고. 진짜 무서워하면서 끊었어요.”
신우진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 직원, 어느 부서인지 아나.”
“생산관리팀이래요. 걔가 2년쯤 전에 술자리에서 선배한테 들은 얘기라고 했었어요. KD-2037 계열 납품 시작할 때쯤, 부품 박스에 붙은 검수 스티커를 몇 번 떼었다 붙였다 본 적이 있다고.”
“스티커.”
“예. 걔 선배가 '이거 원래 세 겹이야'라고 웃으면서 말했대요. 검수 통과한 스티커 아래에 반려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는 식으로.”
3겹.
신우진의 시선이 책상 위 선임 노트로 옮겨갔다. 하부 2년 전 3월, 중간 작년 9월, 상부 올해 12월. 교체 스티커도 3겹이었다. 그는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대영산업에서는 이미 출하 단계에서 검수 스티커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 얘기, 언제 처음 한 거냐.”
“한 서너 달 전쯤? 처음에는 그냥 회사 욕하는 분위기였어요. 근데 오늘 다시 그 얘기가 나온 거예요. 청문회 소식이 납품사 쪽에도 돌았나 봐요. 걔가 '너희 선배 요즘 곤란하겠다' 이런 식으로.”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가로선을 그었다.
“그 선배라는 사람, 현직인가.”
“아... 그건 몰라요. 그냥 '옛날에 있던 선배'라고만. 그런데 선배님.”
최명식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제 생각에는요. 7년 전 거랑, 9년 전 거랑, 지금 거랑. 다 이어져 있는 거 맞죠?”
신우진은 대답 대신 메모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유성 매직으로 날짜 세 개를 적었다.
9년 전. 7년 전. 작년 10월 한경숙의 제보. 그리고 오늘.
“명식아.”
“네.”
“네가 들은 얘기 중에, B4 계열이라는 말이 있었나.”
최명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간이 좁아졌다가 풀렸다.
“없었어요. 그런데 KD-2037 얘기는 분명히 했어요. '요즘 너희 쪽에서 문제 된 부품'이라면서.”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B4 계열은 차량기지 내부 분류 코드다. 납품사 직원이 그 명칭을 모르는 건 자연스러웠다.
그는 키보드를 당겨 전산망에서 KD-2037의 최초 납품일을 다시 확인했다. 2년 전 3월.
그리고 TH-1187 계열의 사고 발생일. 7년 전 11월.
마지막으로 9년 전 정암정밀의 단독 수의계약일.
세 개의 시점이 모니터에 나란히 정렬됐다.
납품사는 다르다. 정암정밀, 대영산업. 그러나 결재자는 같다. 윤태호.
“최명식.”
“네, 선배님.”
“네 길드원한테는 더 묻지 마라. 그쪽도 위험해질 수 있다.”
최명식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내일 청문회.”
신우진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자료는 충분하다.”
최명식이 안전모를 집어 들었다. 문 쪽으로 두 걸음 가다가 멈췄다.
“선배님.”
신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저, 집에 가서 게임 다시 접속해볼까요? 걔가 다시 들어와 있을지.”
“하지 마라. 필요하면 내가 직접 연락할 방법을 찾는다.”
최명식이 짧게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가기 직전,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내일, 꼭 이기세요.”
문이 닫혔다.
신우진은 의자에 앉아 한경숙의 메모를 다시 펼쳤다. 'B4 계열 납품 비리. 시험 성적서 조작.' 그 아래에 적힌 제보자의 말.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는데, 아무도 말 안 했다.'
2년 전 3월. B4 차량군 부품의 첫 납품 시점.
대영산업 생산관리팀 직원이 목격한 조작 스티커의 시점도 일치한다. 검수 통과 스티커 아래 반려 스티커. 출하 전부터 결함을 알고도 덮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옛날에 큰 사고를 덮었다'는 소문.
7년 전 TH-1187. 9년 전 정암정밀의 B4 계열.
모두 윤태호의 결재 라인 아래서 발생했다.
신우진이 유성 매직을 집어 들었다. 메모지 가장자리에 세 줄을 썼다.
'첫 배치 시점 = 2년 전 3월. 결함 인지 및 은폐 시점 동일.'
'과거 사고 = 7년 전·9년 전. 납품사 다르나 결재자 동일.'
'연속성. 의도성. 구조.'
펜을 내려놓았다. 모니터에는 여전히 9년 전 계약서의 윤태호 서명이 떠 있었다.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천천히 세로획을 그었다. 길게, 한 번만.
내일 청문회에서 말할 순서가 정리됐다.
사무실 불은 신우진의 머리 위 한 줄만 켜져 있었다. 복도의 센서등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야간 경비원의 발소리가 먼 층계에서 한 번 들렸다 사라졌다.
최명식이 퇴근하고 사무실은 조용해졌다.
신우진은 개인 사물함에서 선임의 조사 노트를 꺼냈다. 책상 위에 펼쳤다. 컴퓨터 화면에는 오전에 조회한 과거 계약 이력이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9년 전 정암정밀 수의계약. 7년 전 대영산업 TH-1187 계열 납품. 모든 결재란에 윤태호의 이름.
노트를 2007년 11월 14일자 페이지로 넘겼다. 사고 조사 보고서 초안. 구매처 대리 윤태호의 도장.
손가락으로 날짜를 짚었다.
7년 전 탈선 사고 발생일은 초안 작성 3일 전이었다. 선임의 기록에 따르면 부품 교체는 사고 발생 당일 긴급 진행됐다. 정상적인 교체 주기라면 18개월 전에 이뤄졌어야 할 부품이었다.
신우진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현재 B4 계열 KD-2037-114의 교체 이력을 띄웠다. 2년 전 3월 최초 입고. 이후 3회 교체 연기. 모든 연기 결재자는 윤태호.
눈을 가늘게 떴다.
7년 전 TH-1187 계열도 동일한 패턴이었다. 교체 주기 경과. 연기.
사고. 긴급 교체. 기록에는 '정상 마모'로 종결.
패킹·밀봉·마모 양상까지 같았다.
신우진이 노트의 부품 목록 페이지를 폈다. 선임이 직접 스케치한 씰링 패킹 단면도. 연필로 그린 횡단면에 화살표가 세 개. 각각 '표준 규격 대비 0.3mm 이격', '편마모 11시 방향', '오일 유출 흔적'이라고 적혀 있었다.
컴퓨터 화면의 KD-2037-114 검수 사진을 확대했다. 자신이 촬영한 패킹 부분. 같은 이격. 같은 편마모 방향. 같은 유출 흔적.
신우진이 노트를 덮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7년 동안 납품사만 바뀌지 않았다. 결함 부품을 납품받고, 교체를 미루고, 사고가 나면 현장을 탓하는 구조도 그대로였다. 구매처 결재선에 윤태호가 있는 한, 이 구조는 멈추지 않았다.
노트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선임의 글씨가 있었다. '2007년 12월 3일. 본부 품질회의에서 TH-1187 결함 건은 논의되지 않았다. 검수팀장은 나를 배석시키지 않았다. 이 노트는 내가 유일하게 남긴 기록이다.'
신우진은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들여다봤다.
고개를 들고 시계를 확인했다. 8시였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연결됐다.
“신우진 주임님.”
이지원의 목소리 뒤로 자동차 경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직 사무실인 모양이었다.
“7년 전 사고 보고서 원본이 필요합니다.”
“원본은 기록보관소에 있습니다. 열람하시려면 정식 신청 절차를 거치셔야 합니다.”
“공문으로 가능합니까.”
“감사실 명의로 열람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됩니다. 사고 조사 보고서는 보존 기간이 10년이니까 말소되진 않았을 겁니다.”
잠시 침묵. 이지원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보고서에 뭐가 있는지 미리 아시는 겁니까.”
신우진이 노트의 초안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윤태호의 도장.
“결재 라인을 확인해야 합니다. 당시 구매처 대리가 지금 제 징계를 주도하는 과장입니다. 고영호 검수팀장의 초안에는 그 대리의 도장이 비공식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공식 보고서 결재 라인에도 그 사람 이름이 올라와 있다면.”
“7년 전에도 같은 역할이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열람 신청서 초안은 제가 오늘 밤 작성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감사실 공문으로 접수하고, 접수 번호가 나오는 대로 통보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기록보관소 규정상 접수 후 24시간 이내에 열람 가능합니다. 청문회 전에는 확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신우진이 노트를 접었다.
“하나 더 있습니다. 7년 전 탈선 사고와 현재 무정차 통과 사고의 부품 결함 패턴이 동일합니다. 패킹 이격, 편마모 방향, 오일 유출 지점까지.”
잠시 멈춤.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청문회 자료로 제출하실 생각이십니까.”
“노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원본 보고서가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신우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컴퓨터 화면을 다시 바라봤다. 9년 전 정암정밀 계약서. 7년 전 대영산업 납품 기록. 그리고 현재 B4 부품 검수 사진. 화면을 나란히 배열했다.
세 개의 시점. 하나의 결재자.
마우스를 움직여 7년 전 계약서의 결재란을 다시 한 번 확대했다. 구매처 과장 결재란에는 당시 구매처 과장의 서명이 있었다. 그 아래 검수팀장 결재란.
신우진의 손이 멈췄다.
검수팀장 결재란에 찍힌 이름.
지금 구매처에서 윤태호의 직속 검수팀장으로 있는 인물이었다. 민경수 감사실장의 바로 아래. 이지원이 압축한 내부 정보 누설 용의자 쇼트리스트에도 들어 있던 이름.
신우진은 화면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7년 전에도 검수팀장이었다. 7년 후에도 같은 사람이 윤태호의 결재선 바로 위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