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19화

다음 날 아침, 본사 12층 감사실 복도.

신우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이지원은 이미 복도 끝 창가에 서 있었다.

손에 서류 한 묶음. 왼쪽 손목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걸음이 빨랐다. 평소보다 반 박자 빠른 구두 소리.

“이겁니다.”

이지원이 서류를 펼쳤다. 인사 발령 공람 문서. 오늘 아침 8시 40분 전사 통지.

신우진이 문서를 받았다. 시선이 발령 라인을 훑었다.

감사팀 소속 주무관 두 명. 발령일 오늘. 수신 부서는 총무팀 문서고.

“둘 다요.”

“둘 다입니다. 발령 사유는 ‘업무 조정’. 실질적인 사유는 없습니다.”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멈췄다.

“윤태호다.”

“확인된 경로는 없습니다. 하지만 타이밍이 명확합니다. 어제 감사실 정보원 색출 움직임이 있은 직후.”

이지원이 다른 서류를 꺼냈다. 감사실 내부 메신저 트래픽 요약본.

“두 직원은 제가 함정 문서 투입 직후 개별적으로 접촉했던 인원입니다. 이 중 한 명은 구매처 결재 속도 관련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고.”

“다른 한 명은.”

“서버 접속 로그 분석 권한이 있었습니다.”

신우진이 복도 벽에 기댔다.

“누가 전출 요청을 했나.”

“구매처 과장 윤태호의 상부 결재 라인입니다. 구매처 본부장.”

이름이 적힌 결재란을 짚었다.

“근거는요.”

“없습니다. 합법적인 인사 조치입니다. 공람에도 ‘해당 부서장의 요청에 따른 정기 인사’로 기재.”

“실질은 다르다.”

“그렇습니다. 이건 정보원 라인 위축입니다. 구매처 결재 속도와 서버 무단 접속을 추적하던 두 사람을 동시에.”

이지원의 손가락이 명단을 짚었다.

“전출지가 문서고입니다. 정보 접근이 원천 차단되는 부서.”

신우진은 복도 너머 감사실 유리문을 바라봤다. 실내는 아침 출근 시간이었다. 모니터가 켜지고 있었다.

“둘 중 누구라도 면담 가능한가.”

“한 명은 아직 자리에 있습니다. 오전 10시까지 인수인계 후 이동 예정.”

“가자.”

이지원이 잠시 멈췄다.

“신우진 주임님. 면담은 제가 합니다. 주임님이 배석하면 오히려 상대가 입을 닫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디서.”

“감사실 인근 소회의실입니다. 지금 예약하겠습니다.”

이지원이 무전기 이어셋을 눌렀다. 짧은 통화.

“잡혔습니다. 3층 2소회의실. 10시까지.”

오전 10시 5분. 감사실 인근 소회의실.

회의실 탁자엔 서류 두 묶음과 노트북 한 대. 이지원은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탁자 맞은편엔 감사팀 소속 주무관.

소매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눈은 탁자 가장자리에 고정.

“김 주무관님. 바쁘신데 불러서 죄송합니다.”

이지원의 말투는 차분했다.

“아닙니다.”

“오늘 오전 공람 보셨습니까.”

주무관의 손가락이 단추에서 멈췄다.

“네. 총무팀 문서고요.”

“발령 사유는 알고 계십니까.”

“‘업무 조정’이라고만.”

“다른 설명은요.”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공람 확인하고 바로 인수인계 준비하라고.”

주무관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지난주까지 감사 보고서 초안 준비하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서고라니.”

이지원이 서류를 펼쳤다. 전출 직원 명단.

“함께 전출되는 김 주무관님. 알고 계십니까.”

“같은 팀입니다. 옆자리.”

“두 분 다 구매처 결재 속도 분석 업무를 맡고 있었죠.”

주무관의 시선이 탁자를 다시 내려갔다.

“맞습니다.”

“언제부터 그 업무를.”

“3주 전쯤. 무정차 통과 사고 보고서가 배정되고 나서부터.”

이지원이 노트북을 열었다. 서버 접속 로그.

“김 주무관님. 지난주 목요일 밤 10시 이후에 서버 룸에 접속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관련해서 질문드려도 될까요.”

주무관의 어깨가 굳었다.

“그건.”

“정상 업무 시간 외 접속 사유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주무관이 시계를 봤다. 10시 17분. 인수인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밤에 접속한 건 맞습니다. 그런데.”

말이 끊겼다.

“압력이 있었습니까.”

주무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압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떤 형태였죠.”

“출장 명령이었습니다. 3주 전부터 이 건과 관련된 구매처 자료 열람 요청을 여러 번 했는데, 그때마다 출장이 잡혔습니다. 현장 실사, 외부 기관 회의. 전부 긴급이라고.”

주무관의 목소리가 약간 빨라졌다.

“어제는 부서장 면담 요청을 하려고 했습니다. 인사과에는 이미 통보된 뒤였고.”

이지원이 메모했다.

“전출은 구매처 본부장 결재죠.”

“네.”

“구매처 과장 윤태호와 직접 접촉한 적이 있습니까.”

주무관이 소매 단추를 다시 만졌다.

“직접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사과 지인이 어제 귀띔해줬습니다. 이번 인사 관련해서 구매처 쪽에서 ‘보안 점검 필요 인력’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기록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말로만.”

이지원이 펜을 내려놓았다.

“김 주무관님. 물증 없이 진술만으로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알고 계시죠.”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말씀해주셨습니다.”

주무관이 허공을 한 번 바라봤다.

“부당합니다. 이건 부당해요.”

“동의합니다.”

이지원이 명함 한 장을 탁자 위로 밀었다.

“문서고에서도 접근 가능한 자료 목록입니다. 비정기 문서 점검 절차상 감사실은 분기별로 문서고 열람 권한이 있습니다. 거기까지입니다. 더 이상의 도움은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주무관이 명함을 받아 들었다.

손이 약간 떨렸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무관이 일어났다. 문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이지원 주임님.”

“네.”

“윤태호 과장의 결재 서류 중 작년 4분기 대영산업 계약 갱신 건. 계약 조건에 비정상적인 조항이 하나 있습니다. 납품사가 자체 품질 시험 성적서를 직접 제출하는 조건. 원래는 공인 시험 기관이어야 합니다.”

이지원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부분은 구매처 규정 제12조 위반입니다.”

“규정을 알고 계셨군요.”

“규정 자체는 압니다. 그런데 그 조항은 작년 10월에 개정됐습니다. 공인 기관 의무 조항이 ‘납품사 자체 시험 허용’으로 바뀌었습니다. 개정안 초안을 작성한 부서가 구매처였고.”

주무관이 말을 삼켰다.

“검색어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영산업 자체 시험 성적서’. 계약서 첨부 문서로 내부 전산에 남아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주무관이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신우진이 복도에서 들어왔다.

“물증은 없었다.”

“예상대로요. 하지만 얻은 건 있습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았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전출은 구매처 본부장 결재. 윤태호의 상부 라인이 직접 움직였습니다. 둘째, 작년 4분기 대영산업 계약에 자체 시험 성적서 조항이 삽입됐습니다.”

“시점은.”

“작년 10월. 한경숙 위원장이 B4 부품 납품 비리를 내부 제보했던 바로 그 시기.”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탁자 위에서 멈췄다.

“제보를 묻기 위한 선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습니다. 내부 제보가 들어오기 전에 규정을 먼저 바꿔서 ‘위법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만든 겁니다.”

“보고서 원본은.”

“아침에 긴급 열람 요청했습니다. 기록보관소 오후 3시 예약입니다.”

신우진의 시계. 오전 10시 42분.

“그때까진 시간이 있다.”

“다른 전출자는 이미 문서고로 이동했습니다. 오전 일찍 인수인계 끝냈습니다.”

이지원이 명단을 접었다.

“개별 접촉은 추가로 시도합니다. 다만 오늘 오후 3시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그전에 함정 문서 결과를 확인해야 합니다.”

“언제쯤.”

“오전 중에 트래픽이 잡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제 투입했으니 오늘 상대가 움직이면.”

신우진이 벽 쪽으로 걸어갔다.

“인사팀 쪽으로 간다. 청문회 자료 열람 예정.”

“비공식 루트도 확인하시죠.”

이지원의 말에 신우진이 돌아봤다.

“정보원이 감사팀을 빠져나가면서 쥐도 새고 있을 겁니다. 주임님 징계 건 관련 문건이 감사팀 밖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발견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다.”

신우진이 문을 열었다.

“오후 3시. 기록보관소.”

“그때 뵙겠습니다.”

오후 3시 12분. 본사 인사팀 복도.

신우진이 인사팀 서류 열람실을 나왔다. 손에는 청문회 자료 목록 사본.

짐작했던 범위보다 자료가 많았다. 구매처가 제출한 ‘검수 태만’ 입증 서류가 열람실에 도착해 있었다.

계단 쪽으로 걸어가던 신우진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복도 끝에서 인사팀 직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신우진 주임님.”

신우진이 멈췄다.

키 작은 30대 초반 남성이었다. 명찰에 ‘강민호 주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사팀 소속.

“혹시 시간 되십니까.”

“잠깐이라면.”

강민호가 복도 쪽 비상구 문을 열었다. 계단실은 비어 있었다.

“귀띔입니다. 공식적인 건 아닙니다.”

“말해라.”

“오늘 오전에 감사실 쪽에서 이메일이 하나 왔습니다. 그런데 인사팀 공식 채널이 아니라 개인 메일로.”

신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용은.”

“주임님의 검수 일지 중 날짜 불일치 건을 정리한 문서. 내일 청문회에서 문제 삼을 부분을 미리 표시해둔 자료였습니다.”

“누가 보냈나.”

“발신자 이름은 가명. 그런데 IP 추적을 해보니까 감사실 내부 전산이었습니다. 접속 계정은 정규 직원 계정.”

강민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미 청문회 자료로 인사팀에 정식 접수된 서류인지 확인 중입니다. 만약 정식 접수 전에 유출된 거라면 감사팀 내에서 사적으로 흘린 게 됩니다.”

신우진이 벽에 손을 짚었다.

“감사 측이다.”

“확실합니다. 상대가 저한테 보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인사팀 내부에서 청문회 준비 자료를 미리 돌리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고.”

“왜 나한테 알렸나.”

강민호가 잠시 머뭇거렸다.

“작년에 제가 처리했던 인사 건이 하나 있습니다. 전출 대상자였던 직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어요. 사유는 ‘인사 불이익에 대한 심리적 압박’. 그 직원 사건 때 주임님이 검수팀에 있었는데.”

신우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억한다. 박승호.”

“맞습니다. 그때 주임님이 노조 쪽에 사고 경위를 상세히 알려주셨어요. 그 자료로 유족들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인사팀의 부당함이 인정됐습니다.”

강민호가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이건 오늘 오전에 유출된 문건의 메타데이터입니다. 발송 시각은 오전 9시 22분. 접속 계정명과 IP.”

메모지를 신우진에게 건넸다.

“공식 경로로는 못 드립니다. 가져가셔서 확인해보십시오.”

신우진이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감사하다.”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때 일은 지금도.”

말을 마치지 않았다.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인사팀장이 열람실로 들어가는 소리.

강민호가 고개를 숙이고 비상구 문을 열었다.

“조심하십시오. 윤태호 쪽 라인이 인사팀까지 닿아 있습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내 이지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감사팀에서 청문회 문건 유출 확인. 접속 계정명 입수. 만나자.’

곧바로 답신이 왔다.

‘본사 1층 로비. 20분 후.’

3시 35분. 본사 1층.

신우진이 계단에서 내려와 로비로 접어들었다. 발걸음이 잠시 늦춰졌다.

중앙 안내 데스크 옆.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크림색 정장 상의에 짙은 네이비 타이.

윤태호의 비서실장이었다.

그의 옆에 낯선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더블 버튼 슈트. 손에는 태블릿.

신우진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내 데스크 뒤편 벽면에 붙었다.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문회 날짜는 내일입니다만, 의원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시면 본부장님께서도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더블 버튼 남자가 태블릿을 켰다. 화면을 비서실장에게 보여줬다.

“지역구 사업과 연결할 수 있는 포인트는?”

“정비 인력 구조조정 관련 예산 항목입니다. 이 건을 인사 청문회 이후 본부 차원에서 추진할 계획입니다.”

신우진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었다. 왼손 집게손가락의 유압유 흉터가 창백하게 드러났다.

휴대폰 진동.

이지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감사실장 긴급 호출. 먼저 올라갑니다. 로비에서 기다릴게요. 늦으면 4시.’

신우진이 답신을 보냈다.

‘알겠다. 지금 로비에 있다.’

비서실장과 보좌관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닫혔다.

신우진은 안내 데스크 뒤편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국회의원의 개입. 청문회 전날의 정치적 연결.

내일이었다.

손에 쥔 메모지의 계정명을 다시 확인했다.

신우진은 본사 로비 한쪽 의자에 앉아 이지원을 기다렸다.

무정차 통과1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