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20화
철도공사 감사실. 오전 9시 15분.
이지원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왼손이 메탈 시계 밴드를 한 번 톡 쳤다.
화면에는 서버 접속 로그 뷰어가 열려 있었다. 지난 사흘간 B4 계열 문서 열람 기록. 그 옆 창에는 감사팀 전 직원의 공식 계정 목록. 오른쪽 끝에 작은 창 하나 더. 내부 메신저 서버의 파일 전송 로그였다.
이지원이 마우스를 두 번 클릭했다.
공식 계정 열람 이력은 깨끗했다. 전출된 김 주무관도, 남은 팀원들도 정상 접근 외 이탈은 없었다.
비공식 계정 목록을 불러왔다. 전산실에서 넘겨받은 백업 계정 리스트. 여섯 개. 퇴사자 계정을 비활성화하지 않고 방치한 흔적이었다.
그중 하나가 어제 오후 4시 12분에 접속했다. 계정명은 choywbackup.
이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영우. 감사팀 3년차 주무관.
접속 IP는 감사실 내부망. 열람 문서 번호가 화면에 줄줄이 떴다. 'B4 계열 부품 시험 성적서 검증 요청'이 세 번째 줄에 있었다. 함정 문서였다.
“찾았다.”
이지원이 인쇄 버튼을 눌렀다. 프린터가 웅웅거리며 로그를 뽑아냈다.
곧바로 파일 전송 로그로 시선을 옮겼다. 같은 계정. 같은 시각. 메신저 서버를 경유한 외부 메일 전송 기록 하나.
수신 메일 주소는 gujh@daeyoung-partners.co.kr.
이지원이 수첩을 꺼내 메일 주소를 적었다. 오른쪽 광대 아래 작은 점이 형광등 불빛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외부 협력자 데이터베이스를 열었다. 검색창에 메일 주소를 입력했다.
결과는 한 건. 구재호. 대영산업 전략기획실장. 비고란에 '윤태호 본부장 대외협력 라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프린터가 멈췄다. 이지원이 출력물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 세 장을 넘기며 계정 접속 시간, 열람 문서 목록, 파일 전송 타임스탬프를 순서대로 확인했다. 좌측 하단을 받쳐 들었다.
조영우가 감사실 내부 문서를 빼돌린 경로는 명확했다. 그리고 이 유출 경로는 정보원과 무관했다.
이지원이 출력물을 서류철에 끼웠다. 책상 위 전화기를 들었다.
오전 9시 45분.
이지원이 전화기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녹음 장치의 빨간 불이 들어왔다.
수화기 너머로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네 번째에 받았다.
“네, 구재호입니다.”
이지원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곧게 폈다.
“철도공사 감사실 이지원입니다.”
한 박자 침묵.
“예,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구재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약간의 긴장이 끝음절에 묻어났다.
“어제 오후 4시 12분, 대영산업 전략기획실장님의 개인 메일로 감사실 내부 문서가 유출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 숨소리가 멈췄다.
“문서명은 B4 계열 부품 시험 성적서 검증 요청입니다. 발신 계정은 본사 감사팀 소속 직원의 비공식 백업 계정이었고, 수신처는 귀하의 이메일 주소로 확인됐습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구재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속도가 미세하게 빨라졌다.
“서버 전송 로그와 계정 접속 IP가 모두 확보됐습니다. 발신 시각과 수신 시각이 일치하고, 첨부 파일의 해시값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지원이 출력물을 한 장 넘겼다.
“오해가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구재호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지원은 기다렸다.
“그 문서가… 감사실의 공식 자료인가요.”
“아닙니다.”
이지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해당 문서는 실재하지 않는 부품 번호와 존재하지 않는 시험 성적서 번호로 구성된, 감사실 내부 정보 보안 검증용 문서입니다.”
다시 침묵. 이번에는 조금 길었다.
“이 사실을 왜 저에게 알리시는지.”
“유출 경로와 수신자가 특정되었으므로, 향후 동일한 경로로 전달되는 모든 문서는 감사 기록에 자동 등재됩니다. 감사실은 이미 해당 계정의 활동을 실시간 추적 중입니다.”
구재호가 침묵했다. 이지원이 한 문장을 더 붙였다.
“전략기획실에서 앞으로 수신하실 감사실 문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수신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호사를 요청하겠습니다.”
“권리입니다.”
이지원이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녹음 장치의 빨간 불이 꺼졌다.
프린터에서 통화 녹음 기록지가 나왔다. 이지원이 서명란에 사인했다. 공식 경위서 양식을 책상 서랍에서 꺼내 펼쳤다.
서울 강남구 대영산업 본사. 전략기획실.
구재호가 휴대폰을 들었다. 단축번호 1번.
윤태호가 두 번째 신호에서 받았다.
“말씀하십시오.”
구재호가 목을 가다듬었다.
“감사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함정 문서를 심어서 유출 경로를 특정했고… 제 이메일까지 확인됐습니다.”
“경로는.”
윤태호의 목소리는 매끄러웠다. 구재호가 침묵하자 윤태호가 말을 이었다.
“조영우겠군요.”
“예.”
수화기 너머로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감사관이 구체적으로 뭐라고 하던가요.”
“앞으로 동일 경로 문서는 전부 감사 기록에 등재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오는 감사실 문서는 이제 없다고.”
“흥미롭군요.”
윤태호의 어조는 공손하면서도 끝이 살짝 올라갔다.
“일단 문서는 모두 폐기하십시오. 조영우는 제가 처리합니다. 구 실장님은 오늘 오후 일정 그대로 진행하시고요.”
“본부장님, 만약 감사실이 추가로…”
“감사관은 먼저 손을 보여준 겁니다. 상대 패를 아직 모르는 쪽은 그쪽이에요.”
윤태호가 전화를 끊었다. 구재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감사실.
이지원이 경위서 첫 줄을 채웠다. ‘문서 유출 경로 확인 및 수신자 특정 건.’
서류철에 방금 인쇄한 로그 출력물과 통화 녹음 기록지를 함께 끼웠다.
표지에 ‘조영우 비공식 계정 유출 사건 — 경위서 및 증거자료’라고 적고 서랍에 넣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7층 아래로 본사 정문이 보였다. 로비에서 목격한 비서실장과 보좌관의 접촉.
이틀 전 그 장면을 떠올렸다. 지금 확인한 유출 경로, 그리고 청문회의 정치적 연결.
이지원이 왼손 손목의 시계를 풀었다.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판에 손을 올렸다.
감사실장 보고용 요약 문건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20분. 윤태호의 납품사 대표실.
통화가 끊기자 윤태호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구재호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감사실이 유출 경로를 특정했다. 함정 문서였다.
오른손 약지의 금색 인장 반지를 천천히 돌렸다. 깜빡임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이십 초쯤 지났을까.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 세 번.
“조영우 주무관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부드러웠지만 끝이 정확히 내려앉았다.
“지금 괜찮으십니까.”
수화기 너머 조영우의 목소리가 긴장되어 있었다. “네, 대표님. 말씀하십시오.”
“사용하시던 비공식 계정, 오늘부로 중단하시죠. 로그인 흔적도 정리하시고.”
조영우가 숨을 들이켰다. 윤태호는 말을 이었다.
“관련 문서는 전부 폐기하십시오. 출력물, 임시 파일, 메일함. 하나도 남기지 마시고.”
“대표님, 그게 무슨…”
“감사실에서 유출 경로를 확인했습니다.”
수화기 너머 정적.
윤태호는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삼켰다.
“조 주무관님.”
“네.”
“앞으로 저와의 접촉은 기존 채널로 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면 다른 경로로 제가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처리하시고, 내일 출근하실 땐 평소처럼 행동하십시오.”
통화를 끊었다.
윤태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 너머 도심 전경.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창틀을 한 번 두드렸다.
조영우의 계정이 발각되었다. 함정 문서라는 건 이지원 감사관의 수법일 터. 감사실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빠르다.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순 없다.
구매처 내부의 다른 접점을 확보해야 했다. 인사팀 쪽 라인은 아직 살아 있으니 청문회 전까지는 버틸 수 있다.
휴대폰을 들고 구매처 과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영우 계정 폐쇄. 문서 정리 확인. 오후 2시 보고.’
오전 11시. 본사 인사팀 청문회실 인근 열람실.
탁자 위에는 검수 기록 대조표가 펼쳐져 있었다. 형광펜으로 표시된 항목이 곳곳에 보였다. KD-2037-114 부품의 교체 이력, 물류창고 입고 대장과의 일자 차이, 검수 소요 시간 표.
신우진은 펜을 내려놓지 않은 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함정 문서가 외부로 전송됐습니다. 유출 경로는 감사팀 조영우 주무관의 비공식 계정입니다.”
“조영우.”
“네. 구매처 쪽으로 흘러간 정황도 확인했습니다.”
신우진은 형광펜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왼손 집게손가락의 유압유 흉터가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윤태호 쪽 로비스트인가.”
“그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구재호 감사실장에게도 경고 조치를 완료했습니다. 윤태호 본인도 곧 알게 될 겁니다.”
“유출된 문서는.”
“전부 함정 문서입니다. 실제 정보는 하나도 없습니다.”
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청문회 준비는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검수 기록 보완 중이다. 유출 경로 특정된 건 윤태호 쪽에 부담으로 작용할 거다.”
“네. 감사실 쪽에서도 오늘 중으로 공식 기록을 정리하겠습니다. 필요하면 청문회에서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신우진은 대조표 위에 펼쳐진 문서들을 다시 끌어당겼다. 검수 일지, 교체 이력 대조표, 선임의 조사 노트 사본이 순서대로 놓였다.
이지원의 작전이 성공했다는 건 단순한 정보 한 건이 아니었다. 윤태호가 감사실 내부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약점이었다. 내일 청문회에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할 지점.
신우진은 빈 종이 한 장을 꺼내 청문회 대응 전략 노트에 새 항목을 추가했다.
‘감사실 유출 경로 특정 — 윤태호 측 내부 정보 의존 정황. 청문회에서 감사실 공식 기록과 교차 제시 가능.’
그 아래로 검수 기록 보완 사항을 정리했다.
검수 일지 3월 17일자 상세 시간대 재확인. 물류창고 입고 대장과의 시차 원인은 당일 오전 현장 점검 후 오후 입고 처리 — 정상 절차. 검수 소요 시간 단축 건은 부품 육안 점검과 계측기 측정을 병행한 결과. 규정상 문제없음.
펜을 내려놓고 목을 좌우로 풀었다.
이제 문서들은 정리됐다. 감사실의 공식 기록과 교차 검증할 수 있는 구조도 만들었다. 윤태호가 정치적 연결을 동원해도, 감사실 내부에서 유출 경로가 특정된 이상 그 움직임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34분.
내일 오전 10시까지 남은 시간은 스물두 시간 남짓.
오후 2시. 철도공사 감사실 복도.
이지원은 감사실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손에는 유출 경로 입증 출력물과 구재호 통화 녹음 파일이 담긴 USB, 조영우의 계정 전송 내역이 들려 있었다.
복도 끝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왔다.
조영우.
서른 중반의 마른 체격, 뿔테 안경을 쓴 남자였다. 평소에는 표정 변화가 적기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깨가 굳어 있었고, 시선이 복도 바닥을 향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 걸음 반쯤 좁혀졌을 때.
“조 주무관님.”
이지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톤.
조영우의 걸음이 멈췄다.
“네, 이 선배님.”
“오늘 오전에 메신저로 전송하신 문서 말입니다.”
조영우의 오른손이 바지 옆주머니 근처에서 움찔했다.
“그 문서에서 인용된 시험 성적서 번호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습니다.”
조영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입술이 열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지원은 조영우의 반응을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관찰했다. 공격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그저 확인하는 눈빛.
“앞으로 문서 전송은 공식 경로로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비공식 계정의 사용 이력도 이미 파악됐습니다.”
조영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뿔테 안경 너머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그게…”
“지금 여기서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건 오늘 업무 종료 전까지 본인 계정으로 접근했던 모든 문서의 목록을 작성해서 제출하시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영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이지원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지원은 뒤돌아서서 조영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걸음걸이가 빨랐다. 왼쪽 어깨가 오른쪽보다 약간 처져 있었다.
조영우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손에 쥔 출력물을 들어 올렸다. 조영우의 외부 전송 내역 리스트. 오른쪽 아래, 오늘 오전 10시 7분에 함정 문서가 전송된 기록 위에 또 다른 항목이 있었다.
9일 전. ‘B4시험성적서사본.pdf’.
동일한 비공식 계정으로 외부 전송되었다. 수신처는 함정 문서와 같았다. 구매처 구재호 감사실장.
이지원은 출력물을 접어 손목 아래 끼웠다.
조영우의 유출은 단발성이 아니었다. B4 시험 성적서도 이 경로로 빠져나갔다. 윤태호가 이미 확보한 정보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을 가능성이 있다.
내일 청문회 전에 이 부분을 신우진과 공유해야 한다.
이지원은 복도를 걸어 사무실로 돌아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조영우의 이름을 감시 대상 목록에 추가했다. 메모란에 ‘B4 시험 성적서 유출 — 9일 전, 비공식 계정, 구재호 수신’이라고 입력했다.
저장. 이제 내부 유출 경로는 완전히 특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