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21화

오전 10시. 차량기지 휴게실.

자판기 커피 두 컵. 윤태호가 한 컵을 밀어 보냈지만 박중호는 받지 않았다.

“신우진 주임 건입니다. 7년 전 유압유 사고는 작업자 부주의로 종결됐습니다. 팀장님 선임이셨죠. 그분 과실을 제조사 결함으로 뒤집으면 현장 책임자였던 팀장님 입장도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신우진은 왜곡하는 게 아니야. 그 선임이 남긴 조사 노트를 읽었소.”

“노트에 뭐가 있든 공식 보고서와 다르면 효력이 없습니다.”

“공식 보고서에 도장 찍은 사람이 누군지 당신이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윤태호는 입술만 웃었다.

“실무적인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정비팀 내년 예산 30퍼센트 증액, 인원 충원 2명. 조건은 하나, 청문회에서 신 주임의 부품 결함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삼가주십시오.”

“내 부하 직원이다.”

“그래서 예산 얘기를 먼저 꺼낸 겁니다. 신 주임은 인사 발령으로 해결될 일이고, 정비팀은 남습니다. 남는 사람들 장비 교체하고 야근 수당 올려주는 게 팀장님 할 일 아닙니까.”

박중호가 천천히 일어섰다.

“내가 당신 처음 본 건 7년 전이야. 그때도 부품 터지고 왔었지. 똑같은 말을 했어. ‘작업자 과실이다, 현장이 덮는 게 낫다’. 그 말에 넘어가 보고서 묻은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내 부하가 지금 같은 결함을 밝혀내고 있어. 7년 전 거짓말이 반복됐다는 걸 증명하는 중이야. 내가 예산 받고 입 다물면 그게 사람 새끼요?”

“팀장님.”

“됐다. 커피나 들고 가시오.”

윤태호가 일어서며 수트 칼라를 바로잡았다. 미소를 다시 붙였으나 다른 미소였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오후 6시까지 전화 한 통이면 조건은 유지됩니다.”

구두 소리가 복도로 멀어졌다. 박중호는 식은 커피를 싱크대에 버렸다.

오전 10시 30분. 정비팀 사무실.

박중호는 서류고 옆 사물함을 열었다. 작업 점퍼 밑 소형 금고. 다이얼을 돌리자 잠금이 풀렸다.

안에는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A4 서류 봉투. 겉면에 붉은 스탬프. ‘검토 보류 결정 통보 — 2005년 11월’.

보고서를 꺼내 책상에 펼쳤다. 표지. ‘B4 계열 부품 품질 의혹 사전 검토 보고서’. 작성자는 당시 품질관리팀 과장, 수신처는 구매처, 시행일은 9년 전 11월 7일. 상부에서 검토 보류를 결정해 정식 사고 보고서로 전환되지 못한 문서였다.

본문을 넘겼다. 부품 코드란. TH-1187. 그리고 로트 번호. DSL-0703-11.

신우진의 선임이 조사 노트에 적은 번호와 같았다. 7년 전 탈선 사고 직전에 불량 의심으로 기록된 바로 그 로트.

TH-1187. 9년 전 의혹 보고서의 주인공. 7년 전 사고의 진짜 원인.

작년부터 올해까지 B4 차량군에 납품된 KD-2037 계열 부품과 동일 설계 계보. 대영산업은 TH-1187 설계를 기반으로 KD-2037을 만들었고, 패킹 구조, 밀봉 방식, 마모 패턴이 모두 닮아 있었다. 신우진이 지적한 것도 그 점이었다. 같은 설계 결함이 세대를 바꿔 반복되고 있다는 것.

마지막 장. 당시 품질관리팀 과장의 결론 문단.

“상기 부품(TH-1187 계열)의 실차 시험 결과, 작동 온도 상승 시 패킹 변형이 재현됨. 해당 설계를 유지한 채 후속 모델에 적용할 경우 장기 사용 시 동일한 유압 저하 우려 있음. 구매처에 재검토 요청하였으나 반려됨.”

마지막 줄엔 빨간 펜으로 가로줄이 그어져 있었고, 결재란에는 희미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구매처. 9년 전에도 같은 부서였다.

박중호는 보고서를 접어 가지런히 봉투에 넣었다. 스탬프가 보이도록 겉면을 위로 향하게 한 뒤 금고 문을 닫고 다이얼을 잠갔다.

이 보고서가 청문회에 들어가면 7년 전 사고와 KD-2037-114 결함이 같은 선 위에 놓인다. 우연이 아니라 예견된 반복이었다는 게 입증된다. 윤태호가 오늘 아침 회유 제안을 한 것 자체가 불리함을 안다는 뜻이었다.

박중호는 서류고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전화기에서 신우진 번호를 찾았다. 유도로 쪽에서 견인차 경적이 길게 울렸다. 그는 전화를 귀에 댔다.

오전 11시. 정비팀 사무실.

한경숙이 노조 조끼 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박중호는 의자에 앉아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아래쪽 금고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술이 굳게 닫혀 있었다.

“팀장님. 회의 시간입니다.”

“아직 시간 안 됐다.”

한경숙이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일 있습니까.”

박중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른손이 주머니 속 토크 렌치를 만지작거렸다.

“윤태호가 왔다 갔다.”

한경숙의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언제요.”

“삼십 분 전. 회사 밖에서 기다리더군. 금고 열지 말라는 거다. 신우진이 위험한 길로 간다고.”

“팀장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거절했다. 이미 신우진이랑 약속했다. 금고 보고서는 청문회에 넣을 거라고.”

한경숙이 잠시 침묵했다. 팔짱을 끼고 박중호를 내려다봤다. “윤태호가 직접 나섰다면 급한 겁니다. 그쪽도 증거가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무슨 뜻이냐.”

“노조 차원에서 움직이겠습니다. 증인 보호랑 문서 보관 절차. 팀장님이 혼자 감당할 일이 아니에요. 오늘 중으로 노조 법률 자문위원한테 자문 구합니다. 증인 출석 때 노조 대리인 입회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신우진 주임 청문회에도 방청 들어갑니다.”

박중호가 턱을 약간 치켜들었다. “그래라.”

한경숙이 손목시계를 봤다. 11시 5분. “회의는 제가 진행합니다. 팀장님 여기 남으시죠. 금고에서 눈 떼지 말고.”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멈췄다.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다시 연락 갈 겁니다.”

문이 닫혔다.

오전 11시 15분. 본사 감사실.

이지원의 모니터에 메신저 알림이 떴다. 전날 등록한 정보원의 아이디였다.

'금일 10시 30분경 차량기지 후문. 윤태호 대표 차량 확인. 박중호 검수팀장과 약 15분간 대화. 차량 번호 동일함.'

이지원이 메시지를 읽고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마우스를 움직여 답신을 보냈다. '수신 확인. 추가 동향 발생 시 즉시 보고.'

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수신음이 끊겼다.

“신우진입니다.”

배경에 청문회 준비실 특유의 소음이 섞여 있었다. “이지원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짧게.”

“십 분 전, 윤태호가 차량기지에서 박중호 검수팀장을 만났습니다. 회유 시도로 추정됩니다.”

수화기 너머 1초간 침묵.

“박 검수팀장은.”

“거절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하지만 윤태호가 직접 나선 걸 보면 상황이 급박해진 것 같습니다.”

“내용은.”

“금고 보고서 관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화 내용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신우진의 숨소리가 짧게 들렸다. “박 검수팀장을 만나겠다.”

“네.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증거 보존 상태도 확인하시고요. 보고서 원본이 금고에 있더라도, 절차상 청문회 증거로 채택되려면 감사실 경유가 필요합니다. 그 부분도 확인해주십시오.”

“절차는 네가 알아봐. 내일까지 시간 없다. 지금은 박 검수팀장과 얘기하는 게 먼저다.”

“그럼 끊겠습니다.”

통화 종료. 이지원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손목 아래 끼웠던 조영우 유출 내역 출력물을 펼쳤다. 'B4시험성적서사본.pdf' 아래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오전 11시 30분. 정비팀 사무실.

신우진이 노크했다. 안에서 낮은 목소리. “열려 있다.”

박중호는 책상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금고는 여전히 책상 아래,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윤태호가 왔다고 들었다.”

박중호의 턱 근육이 굳었다. “한경숙이 불었나.”

“이지원 쪽에서 연락 왔다. 정보원을 통해.”

“감사실도 알고 있나.”

박중호가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회사에 손실 보지 말라고. 장기 계약 깨지면 직원들이 피해 본다고.”

“당신한테 하는 말은 아니지.”

신우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박중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윤태호는 손실이 두려운 게 아니다. 수사 확대를 막으려는 거다.”

박중호가 신우진을 응시했다. 눈 밑 다크서클이 짙었다.

“나도 안다.”

그가 허리를 굽혀 금고 다이얼을 돌렸다. 오른손 움직임은 망설임이 없었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금고 안에는 서류 뭉치 두 개. 박중호가 아래쪽 서류를 꺼냈다. A4 크기 보고서. 앞장 윗부분에 붉은 스탬프. '검토 보류 결정 통보.'

신우진이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왼손 집게손가락 흉터가 종이 위로 지나갔다.

“9년 전 보고서.”

“그렇다. 당시 검수팀장이 지금 본부장이다. 결재 라인은 윤태호였고.”

신우진은 보고서 앞장을 넘겼다. 부품 번호 TH-1187 계열. 로트 번호 DSL-0703-11.

“부품 번호는 다르지만, 결함 유형이 KD-2037이랑 같다. 패킹, 밀봉, 마모 순서까지.”

“그것만이 아니다.”

박중호가 팔짱을 풀었다. 오른손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당시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묵살당했다. 기록이 사라지고 책임은 현장으로 넘어갔다.”

신우진이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손끝이 마지막 장 가장자리에 머물렀다. “이 보고서는 청문회 증거로 제출한다.”

“어떻게. 공식 경로가 아니다. 감사실에서 정식 감사에 착수하지 않으면 이건 사문서다.”

“이지원에게 확인한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내려다 멈췄다. 사무실 밖에서 차량 엔진 소리, 곧 발걸음 소리.

문이 열렸다. 인사팀 직원이 정장 차림에 봉투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박중호 팀장님 계십니까.”

박중호가 몸을 돌렸다. “나다.”

직원이 상단에 인사팀 직인이 찍힌 봉투를 내밀었다.

“징계 청문회 증인 소환 협조 요청 공문입니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본사 인사팀으로 출석해주십시오. 위원회에서 팀장님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신우진과 박중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중호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직원이 목례하고 돌아서자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증인 소환.”

박중호가 낮게 중얼거리며 뜯지 않은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신우진은 보고서를 다시 내려다봤다. 왼손 집게손가락 흉터 위로 형광등 불빛이 떨어졌다.

.”

그가 허리를 굽혀 금고 다이얼을 돌렸다. 오른손 움직임은 망설임이 없었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금고 안에는 서류 뭉치 두 개. 박중호가 아래쪽 서류를 꺼냈다. 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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