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22화
인사팀 직원이 돌아가고, 사무실 문이 닫혔다.
박중호가 봉투를 찢었다. 공문을 꺼내 한 번 훑더니 책상 위로 밀었다. “예상대로다.”
신우진이 공문을 집어 들었다. 발신: 인사팀. 수신: 차량기지 정비팀장 박중호.
제목은 징계 청문회 증인 소환 협조 요청. 일시는 내일 오전 10시. 장소는 본사 3층 인사팀 청문회실.
내용 끝에 증인 신문 예정 항목이 기재되어 있었다. 부품 KD-2037-114 검수 당시 현장 입회 여부. 교체 주기 연기 결정에 대한 의견. 정비팀 보관 부품의 보존 상태.
“사전에 증언 내용을 좁히려는 거다.”
“알아.”
박중호가 팔짱을 꼈다. “나는 간다. 부를 말이 있으면 다 할 거고.”
“증인 신문 예정 항목에 없는 건 답변 못 할 수도 있다.”
“청문위원이 인정해주면 된다. 항목 밖 질문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신우진은 공문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문서 보완 요청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증거 목록에 금고 보고서 내용을 추가할 겁니다.”
“명칭을 어떻게 적을 거냐.”
“9년 전 내부 품질 검토 보고서 사본. 보관자 박중호.”
박중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실 경유 절차는.”
“이지원에게 확인합니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입력했다. 보고서 사본 증거 제출 시 감사실 경유 절차 확인 요청.
3분 뒤 답신이 왔다.
“감사실이 정식 감사에 착수하거나, 청문위원회가 감사실에 자료 제출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면 사본도 증거 능력이 인정됩니다. 아니면 사문서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우진이 화면을 박중호에게 보여줬다.
“두 가지 경로다. 하나는 감사실 정식 감사 착수. 다른 하나는 청문위원회의 자료 요청 공문.”
“오늘 중으로 감사 착수가 가능하냐.”
“이지원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오후 2시. 본사 3층 인사팀 청문회실.
회의실 중앙에 긴 테이블. 위원석에 청문위원 셋이 앉았다. 가운데는 50대 남성, 본부장 직함의 명패. 왼쪽은 법무팀 과장, 오른쪽은 인사팀 차장.
신우진은 피징계인석에 앉았다. 오른쪽 앞 테이블에 서류 묶음과 검수 노트를 가지런히 펼쳐 놓았다. 방청석 2열에 이지원이 자리했다.
윤태호 측 변호사가 4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네이비 수트, 타이는 진회색. 테이블 위에 두꺼운 파일 하나를 올려놓고 손끝으로 가지런히 정리했다.
청문위원장이 속기사를 향해 목례하고 개회를 선언했다.
“징계 청문회 1차 회의를 시작합니다. 피징계인, 소속과 성명.”
“차량기지 검수팀. 신우진.”
“징계 혐의는 허위 보고 및 품질 검수 태만입니다. 지난달 B4 계열 차량 검수 과정에서, 교체 이력을 임의로 변경하고 검수 소요 시간이 내규보다 평균 38% 짧았다는 게 인사팀의 조사 결과입니다. 인정하십니까.”
“아닙니다.”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검수 기록지에 대해 확인하겠습니다. 피징계인이 지난 3월 17일 작성한 검수 기록지, 여기에 서명이 누락된 부분이 세 곳입니다.”
변호사가 기록지 사본을 위원들에게 배포했다. 이어 신우진 앞에도 한 부를 밀어 넣었다. 동그라미가 쳐진 란 세 곳. 검수자 확인 서명.
신우진이 기록지를 내려다봤다.
“서명 누락은 검수 미실시의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인정합니까.”
“검수는 했습니다. 서명을 누락한 건 사실입니다.”
“왜 누락했습니까.”
“KD-2037 계열 부품 3점을 추가로 대조하느라 마지막 장 서명을 놓쳤습니다.”
“추가 대조한 근거가 있습니까.”
신우진이 검수 노트를 폈다.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짧게 획을 그었다. 노트 속지에 수기로 적힌 부품 번호 목록과 마모도 측정값이 빼곡했다.
“개인 검수 노트입니다. 3월 17일, KD-2037-114 포함 3점의 패킹 마모도를 측정했습니다. 수치가 여기 있습니다. 표준 마모 한계치 0.3mm를 초과한 수치가 확인됩니다.”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개인 기록은 공식 문서가 아닙니다.”
청문위원장이 손을 들었다. “계속하십시오. 피징계인, 그 수치를 검수 기록지에 기재했습니까.”
“아닙니다. 교체 권고 항목으로 별도 보고했습니다. 보고서는 검수팀장 결재를 받았습니다.”
“그 보고서 사본이 있습니까.”
신우진이 서류 묶음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검수팀장 결재 필체가 선명했다. 날짜는 3월 17일.
청문위원장이 끄덕였다. 변호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변호사가 다른 서류를 집었다. 부품 시험 성적서였다. “그렇다면 시험 성적서 대조 부분입니다. 피징계인은 검수 당시 부품 시험 성적서와 실측값을 대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검수 기록지에는 대조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검수 기록지는 결과만 기재합니다. 대조 과정은 노트에 기록합니다.”
“시험 성적서 원본을 확인했습니까.”
“전산 시스템에서 사본을 열람했습니다.”
“사본과 원본이 동일하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신우진이 잠시 멈췄다. 왼손 집게손가락 흉터 위로 형광등 불빛이 스쳤다.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조했을 때 불일치가 발생했고, 그게 교체 권고의 근거입니다.”
“불일치의 구체적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시험 성적서상 마모도 측정값은 0.21mm였습니다. 실측값은 0.34mm. 차이가 0.13mm입니다. 표준 마모 한계치를 초과한 실측값을 시험 성적서는 정상 범위로 표기했습니다.”
청문위원실이 조용해졌다. 속기사의 키보드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변호사가 천천히 다음 서류를 꺼냈다. 교체 주기 이력표였다.
“그럼 검수 시간과 부품 교체 주기의 관계를 확인하겠습니다. KD-2037-114 부품의 교체 주기는 2년입니다. 마지막 교체는 1년 8개월 전. 아직 교체 주기가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피징계인은 교체 권고를 냈습니다. 교체 주기 임박 부품을 검수하면서 소요 시간은 오히려 짧았습니다. 평균 38% 짧은 검수 시간으로, 어떻게 교체 주기를 단축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습니까.”
신우진이 서류 묶음에서 B4 계열 시험 성적서 사본 여러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납품 로트 번호별 시험 성적서 사본입니다. 같은 KD-2037 계열 부품인데 로트에 따라 마모도 측정값이 다릅니다.”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그건 정상적인 편차입니다.”
“편차라고 보기에는 이상치가 존재합니다.”
신우진이 성적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로트 번호 DSL-2003-05.
“이 로트의 마모도 최초 측정값은 0.17mm. 6개월 뒤 정기 점검 측정값은 0.29mm. 6개월 만에 마모가 0.12mm 진행됐습니다. 다른 로트의 같은 기간 마모 진행 평균은 0.04mm입니다. 세 배 빠른 겁니다.”
“그 부품의 교체 주기를 단축해야 한다는 주장입니까.”
“아닙니다. 측정값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최초 측정값 0.17mm이 실제보다 낮게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거는.”
“이 부품이 장착된 차량의 1년 뒤 마모 측정값은 0.41mm였습니다. 1년간 0.24mm 진행. 앞선 6개월 진행 속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최초 0.17mm이 아니라 0.25mm 내외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변호사가 잠시 말을 멈추고 파일을 뒤적였다. 청문위원 중 인사팀 차장이 기록을 검토했다.
법무팀 과장이 질문했다. “그 측정값을 시험 성적서에 기재한 기관은 어디입니까.”
“대영산업 자체 시험 성적서입니다. 작년 10월 규정 개정으로 납품사 자체 시험이 허용된 이후 발급된 것입니다.”
청문위원장이 위원들과 잠시 귓속말을 나누고 고개를 들었다.
“피징계인의 반박에 일부 근거가 확인됐습니다. 제출된 성적서 사본과 검수 노트는 공식 기록으로 채택합니다. 시험 성적서 원본에 대한 추가 대조가 필요하니, 감사실에 협조 요청하겠습니다. 이상으로 1차 회의를 마치고, 추가 자료 검토 후 2차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일정은 추후 통보합니다. 휴정을 선언합니다.”
이지원이 방청석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청문회 휴정이 선언되기 직전이었다.
감사실 기록 담당자가 방청석 옆쪽 통로로 다가갔다. 30대 초반 남성. 명찰에 김민혁이라고 적혀 있었다. 손에는 얇은 서류 봉투.
김민혁이 변호사 옆으로 지나가며 서류 봉투를 테이블 아래로 건넸다. 변호사가 받아 서류 묶음 사이에 끼워 넣었다. 동작은 짧았다.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지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만 움직여 김민혁의 얼굴을 확인하고 메모 앱에 입력했다.
시간: 오후 3시 22분. 대상: 감사실 김민혁. 행동: 변호사에게 봉투 전달.
휴정 선언 후, 이지원이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신우진도 서류를 챙겨 복도로 나왔다.
“방청석에서 본 게 있습니다.”
이지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감사실 기록 담당자 김민혁이 변호사에게 봉투를 건넸습니다.”
“봉투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가 받아서 다른 서류 사이에 넣었습니다.”
“청문회 자료를 사전에 유출한 거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휴정 전에 전달 타이밍을 계산한 걸로 보입니다.”
신우진이 복도 벽에 기댔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획을 그렸다.
“김민혁이 누구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감사실 내부 정보 유출이 조영우 한 명이 아니었던 거네요.”
“맞습니다. 조영우는 구매처 쪽 연락책이었고, 김민혁은 청문회 현장에서 직접 정보를 넘겼습니다. 동시에 두 개 라인으로 정보가 흘러간 겁니다.”
“인사 조회를 부탁하겠습니다. 과거 발령 이력까지.”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 대상으로 올리겠습니다. 업무 일지에 오늘 관찰 내용을 기록할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내 박중호의 금고 보고서 관련 메시지를 이지원에게 보여줬다.
“청문위원회가 감사실에 자료 요청 공문을 보내면 사문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셨습니다. 청문위원장이 시험 성적서 원본 대조를 위해 감사실 협조 요청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절차 안에 금고 보고서도 포함시킬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성적서 대조 요청은 청문회 진행 중에 나온 사안이지만, 보고서는 청문위원회가 그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2차 회의에서 보고서를 언급하면 됩니다.”
“위원회가 받아들일지가 문제입니다. 절차상 2차 회의 의제는 1차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결정됩니다. 새 증거를 추가하려면 인사팀에 사전 신청해야 합니다.”
“신청서를 쓰겠습니다.”
이지원이 잠시 생각했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 2차 회의 전까지 신청서가 접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김민혁 건은 제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신우진이 서류 묶음을 팔에 끼고 복도 중앙으로 향했다. 이지원이 감사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다 멈췄다.
휴대폰을 꺼내 인사팀 내부 명부를 검색했다. 김민혁. 검색 결과가 떴다.
현재: 감사실 기록 담당. 전 발령: 본사 구매처 계약관리팀.
발령 시기. 4년 전.
이지원이 화면을 캡처했다.
오후 4시 30분. 윤태호의 납품사 대표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차단된 번호.
윤태호가 세 번째 울림에서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십시오.”
“대표님, 청문회 속기록 정리 전에 보고드립니다.”
음성은 감사실 김민혁이었다. 목소리가 낮고 빨랐다.
“들어 봅시다.”
“신우진이 시험 성적서 사본을 제출했습니다. 마모도 측정값 이상치를 근거로 들었습니다. 청문위원회가 성적서 원본 대조를 감사실에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근거 자료의 신빙성은.”
“위원회가 공식 기록으로 채택했습니다.”
윤태호가 책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규칙적인 소리. 셋. 멈춤. 셋.
“변호사는 뭐라 했습니까.”
“반박하려 했지만 위원장이 제지했습니다. 추가 자료 검토 후 2차 회의를 속개한다고 합니다.”
“감사실 쪽 대응은.”
“아직 공식 요청이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중으로 내려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적서 원본은 문제가 없도록 준비해 둡시다. 그리고.”
윤태호가 잠시 멈췄다. 손가락이 멈췄다.
“감사실에서 원본 대조 요청이 오면, 대조 범위와 일정을 최대한 좁게 잡으십시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윤태호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 너머로 도심 야경이 점등되고 있었다.
신우진이 성적서 사본을 준비할 줄은 예상보다 한 수 빨랐다. 시험 성적서 조작의 패턴을 측정값 이상치로 파고들 줄은 몰랐다.
책상으로 돌아와 인터폰을 눌렀다.
“구 실장. 청문회 전략 수정 자료를 준비하게. 변호사에게 전달할 문건이야.”
“어떤 방향으로 할까요.”
“신우진이 성적서 사본을 무단으로 취득했을 가능성을 파고들어. 사본 입수 경로와 보관 권한을 문제 삼는 거지.”
“알겠습니다.”
인터폰을 끊고, 윤태호가 서랍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내부에는 지난주 확보한 신우진의 인사 기록 사본과 검수팀 내규 위반 사례 목록이 들어 있었다.
2차 회의까지는 24시간.
그 시간 안에 신우진의 근거를 흔들어야 했다. 윤태호가 천천히 서류를 펼쳤다.
오후 6시 40분. 본사 인사팀 청문회실.
신우진은 이미 방을 떠났다. 이지원이 복도 의자에 앉아 업무 일지에 김민혁 관찰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인사팀 강민호였다.
“이 감사관님, 확인하신 명단 건 말씀드리려고요.”
“들려주세요.”
“김민혁 주무관. 감사실로 발령 나기 전 구매처 계약관리팀에 있었습니다. 4년 전 얘기고요. 당시 업무가 대영산업 계약 서류 관리였습니다.”
“지금도 구매처 쪽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군요.”
“네. 전산 로그를 보니 구매처 계정으로 접속한 흔적이 두어 번 있습니다. 공식 업무 외 접속이었어요.”
이지원이 메모를 한 줄 더 추가했다. 전 발령 이력: 구매처 계약관리팀. 현재도 비공식 접속 이력 존재.
“알겠습니다. 이 정보는 공식 감찰 자료로 전환하겠습니다. 다른 분께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당연하죠.”
전화를 끊고, 이지원이 업무 일지를 덮었다. 방청석에서 김민혁이 봉투를 건네는 장면과, 인사 기록 속 구매처 발령 이력. 두 정보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감사실 내 유출 경로는 조영우 한 명이 아니었다. 구매처 인맥이 감사실 내부에 구조적으로 심어져 있었다.
이지원이 일어나 감사실로 향했다. 내일 아침까지 예비 감찰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신우진이 인사팀 민원실에 서류를 접수하고 청문회실로 돌아왔다. 증거 추가 신청서였다.
빈 회의실. 속기사도, 위원들도 퇴장한 자리.
탁자 위에 인사팀 직원이 두고 간 명부 한 부가 놓여 있었다. 청문회 참석자 명단. 신우진이 무심코 넘겼다.
기록 담당자: 감사실 김민혁.
시선이 멈췄다.
신우진이 자신의 서류 가방에서 이지원에게 받은 메모를 꺼내 펼쳤다. 메모에 적힌 이름과 동일했다.
명부 옆 페이지. 직원 현황표 사본. 인사팀 내부 자료였다. 김민혁의 발령 이력 란.
2008년 입사. 2012년 구매처 계약관리팀 배치. 2019년 감사실 전출.
구매처 계약관리팀.
신우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2012년. 윤태호가 구매처에 발령 난 지 1년 뒤였다. 김민혁은 윤태호와 같은 부서에서 7년을 근무하고 감사실로 옮겼다.
표정이 굳어졌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게 획을 그었다. 가로선. 멈춤.
신우진이 명부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