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2화
사무실 형광등이 새벽부터 깜빡이고 있었다. 신우진은 확대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렌즈 가장자리에 묻은 유분을 닦아내지 않은 채였다.
전날 밤 잠은 두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눈이 뻑뻑했다. 오른쪽 관자놀이 근처가 간헐적으로 뛰었다.
모니터를 켰다. 운영 시스템 로그인 화면이 떴다. 사번과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손가락이 평소보다 느렸다.
정비 이력 관리 메뉴로 진입. 품번 검색창에 입력했다. KD-2037-114.
엔터. 화면이 깜빡였다.
검수고 사무실은 조용했다. 같은 조의 정비사 둘이 2번 선로에서 야간 입고 차량을 점검 중이었다. 사무실 안에는 신우진 혼자였다.
데이터베이스가 응답했다. 부품 교체 이력이 세 개의 행으로 정렬됐다.
첫 번째: 2년 전 3월 14일. 교체 예정 등록. 결재자 윤태호.
두 번째: 작년 9월 7일. 교체 연기 승인. 결재자 윤태호.
세 번째: 올해 12월 20일. 교체 연기 승인. 결재자 윤태호.
전산망과 종이 정비 일지의 기록이 정확히 일치했다. 차이점은 하나. 종이 일지에는 수기 결재 도장이 찍혀 있고, 전산망에는 전자 승인 코드만 남았다.
신우진은 첫 번째 연기 건을 클릭했다. 세부 정보 창이 열렸다. 연기 사유: '부품 정상 작동 확인. 현장 판단으로 교체 보류.' 두 번째도 같은 문구. 세 번째도 같았다.
복사해서 붙여넣은 텍스트였다. 문장 부호, 띄어쓰기, 줄바꿈까지 동일했다. 신우진은 마우스에서 손을 떼었다. 검지가 허공에 짧은 획을 그었다.
서랍에서 USB를 꺼냈다. 검은색 플라스틱 케이스에 은색 클립이 달린 32기가짜리. 캡을 열었다.
화면 캡처를 세 번 찍었다. 교체 이력 목록. 세부 정보. 연기 사유.
파일명을 'KD2037이력전체'로 저장했다. 다시 한 장 더 캡처했다. 날짜와 결재자 이름이 한 화면에 잡히도록 스크롤을 조정했다.
이 캡처들은 정비 일지 복사본과 달리 위변조 추적이 남지 않는 디지털 파일이었다. 전날 밤 혼자 결정했다. 모든 기록을 최소 세 곳에 분산 보관한다. USB, 개인 수첩, 사무실 외부.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신우진은 USB를 주머니에 넣고 수화기를 들었다. 확인하기 전에 누군지 알았다. 내선 번호가 팀장 직통이었다.
“신우진 씨. 잠깐 와요.”
고영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아침 인사도 없었다.
“지금 갑니다.”
신우진은 모니터를 끄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팀장 책상은 사무실 안쪽 구석에 있었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다른 정비사들의 자리와 분리된 공간. 현장에서는 '면담실'이라고 불렀다.
고영호는 모니터를 켜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커피잔 하나. 검은 액체가 반쯤 남아 있었다.
“문 닫아요.”
신우진이 문을 닫았다. 칸막이 유리 너머로 빈 복도가 보였다. 형광등 불빛이 여전히 깜빡였다.
고영호가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두 번 두드렸다.
“어제 그 일 말인데.” “본사에서 연락 왔어요. 구매처.”
신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태호의 전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고영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윤 과장님이 보고서 검토하시다가, 거. 부품 관련 내용 좀 과하다고 보셨나 봐.”
“아직 보고서 초안 제출 안 했습니다.”
“알아.” “그래서 지금 말하는 거요.”
고영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을 때 바닥에 약간의 소리가 났다.
“이번 사고는 운전 취급 부주의로 가는 게 맞아요.” “제동 장치는 정상 작동했고.”
신우진의 오른손이 허벅지 옆에서 잠깐 멈췄다.
“KD-2037. 교체 예정일 2년 지났습니다.”
“연기 승인 난 부품이야.” “규정상 문제없어요.”
“세 번 연기됐습니다.” “결재자 모두 동일인이고.”
고영호의 손가락이 다시 책상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세 번. 리듬이 빨랐다.
“정비 일지는 참고자료일 뿐이야. 사고 원인은 운행 기록과 관제 데이터로 판단하는 거요.”
신우진은 확대경 렌즈에 손이 닿는 것을 느꼈다. 주머니 속 USB가 허벅지에 닿아 있었다.
“참고자료를 무시하면 조사가 성립 안 됩니다.”
“조사는 성립시키라고 있는 거요.” “결론은 정해져 있어.”
고영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팔걸이에 얹은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신우진 씨. 우리 팀 7년째잖아.” “내가 당신 검수 실력 존중하는 거 알죠.”
잠깐 멈췄다. 복도에서 정비사 둘이 지나갔다. 작업화 소리가 유리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다.
“이번 건은 그냥 넘어가요.” “보고서에서 부품 결함 항목 빼고, 운행 쪽으로만 채워.”
“빼면 허위 보고서 됩니다.”
“허위가 아니지. 판단의 차이야.”
“판단은 증거로 하는 겁니다.” “부품 실물 있고, 이력 있고, 교체 주기 연기 세 번.”
고영호의 표정이 굳었다. 입술이 얇게 당겨졌다. 커피잔 손잡이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내 마지막 제안이오.” “알아서 판단해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전모를 집어 들고 문고리를 잡았다.
신우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소견서는 제출합니다.” “부품 결함 가능성 항목으로.”
고영호가 돌아봤다. 문이 반쯤 열린 채 멈췄다.
“올려봐요.” “결재 라인에서 반려될 테니까.”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로 멀어졌다.
신우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USB가 들어 있는 주머니 쪽으로 손을 내렸다.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사고 조사 보고서 초안 파일을 열었다. 마우스 포인터가 깜빡였다.
'사고 원인' 항목. 현재까지 입력된 내용은 운행 기록 분석뿐이었다.
신우진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정비 일지 복사본을 왼쪽에 펼쳐 놓았다.
입력을 시작했다.
'2. 부품 점검 소견' '- KD-2037-114 제동 밸브: 교체 주기 2년 경과, 3회 연기 이력.' '- 연기 결재자: 구매처 윤태호 (3회 전건).' '- 별첨: 정비 일지 사본, 전산망 캡처.'
저장 버튼을 누르기 직전 멈췄다. 복사본 파일을 새로 하나 만들었다. 파일명: '사고보고서초안부품소견포함.' 원본 파일은 그대로 유지하고, 부품 항목이 추가된 버전을 따로 저장했다.
USB를 다시 꽂았다. 정비 일지 캡처 파일 세 개와 소견서 파일을 함께 복사했다. 폴더를 만들었다. 이름은 'KD2037.'
복사가 완료된 뒤 USB를 뺐다. 안전 조끼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지퍼를 올렸다.
--- 철도공사 본사 7층. 감사실.
이지원은 이메일 알림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2분. 시스템이 사고 조사 보고서 1건을 감사실로 자동 배정했다. 무정차 통과 사고. 금정차량기지 관할.
화면 왼쪽 창에 보고서 원문을 띄웠다. 오른쪽에는 동일 유형 사고 4건의 결재 이력. 비교 분석이 습관이었다.
보고서는 아직 초안 상태였다. 작성자는 신우진. 금정차량기지 검수 주임. 현장 검수 경력 12년.
이지원은 마우스를 움직였다. '사고 개요'와 '운행 기록'은 채워져 있었다. '부품 점검 소견'은 비어 있었다.
스크롤을 내렸다. 결재 라인 확인. 작성자 서명: 미입력. 팀장 서명: 미입력. 본부장 서명: 미입력.
정식 보고서는 아니었다. 초안 작성 단계. 당연했다. 사고 접수 2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지원이 다른 창을 열었다. 전날 기록한 메모를 띄웠다.
'사고 접수: 11:09.' '구매처 과장 결재: 11:47.' '소요 시간: 38분.'
그 메모를 다시 바라봤다.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사고 보고서 초안이 감사실로 배정되는 데 23시간이 걸렸다. 현장 조사와 검수가 포함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구매처 과장 결재는 사고 발생 45분 만에 완료됐다. 현장에서 사진 한 장 올라오기 전이었다.
이지원은 구매처 시스템 접속 이력을 조회했다. 감사실 권한으로 열람 가능한 로그.
윤태호 과장. 사고 당일 오전 11시 12분 구매처 시스템 로그인. 11시 14분 KD-2037 관련 문서 열람. 11시 47분 전자 결재 승인. 11시 50분 로그아웃.
문서 열람 33분 만에 결재. 부품 사양서 78쪽 분량. 이지원은 그 문서를 화면에 띄웠다. 기술 도면, 시험 성적서, 납품 이력. 33분 안에 읽고 검토하고 승인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그녀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기댔다. 등받이가 약간 뒤로 젖혀졌다.
납품사 정보를 클릭했다. 대영산업. KD-2037을 포함한 제동 계통 부품 14종 납품. 계약 기간 7년. 윤태호가 구매처 발령을 받은 것도 7년 전이었다.
이지원은 개인 메모 파일을 열었다. 입력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1. 윤태호 구매처 과장: 사고 당일 초동 결재 38분. 통상 평균(4시간 20분) 대비 1/8 수준.' '2. 결재 전 문서 검토 시간: 33분. 부품 사양서 78쪽 검토 불가능 시간.' '3. 납품사(대영산업)와 구매처 과장 재임 기간 일치: 7년.'
키보드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녀는 세 번째 줄에 커서를 놓고 잠시 멈췄다.
검증이 필요했다. 현장 검수 기록과 구매처 결재 시점의 상관관계. 그리고 부품 교체 주기와 실제 교체 이력의 차이.
이지원은 서랍에서 개인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 목록을 스크롤했다. '정보원'으로 저장된 번호가 세 개. 그중 첫 번째를 선택했다.
메시지를 입력했다.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 생겼다. 이따 평소 장소에서 보자.'
전송.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놓았다. 화면이 아래로 향했다.
--- 해 질 무렵이었다. 검수고 창문으로 주황빛이 길게 들어왔다. 먼지가 빛 기둥 안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신우진은 검수고 사물함 앞에 서 있었다. 철제 문을 열었다. 작업복과 안전화, 여분의 장갑이 정리되어 있었다.
안쪽 선반에 USB를 내려놓았다. 정비 일지 복사본은 인쇄실에서 한 부 더 출력해 서류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면에 날짜와 품번을 유성 매직으로 적었다.
'KD-2037. 2/14.'
사물함 문을 닫았다. 자물쇠를 채웠다.
주머니 속 수첩을 꺼내 한 줄을 더 썼다.
'소견서 제출 예정. 반려 확정.' '증거 분산 보관 완료.'
수첩을 덮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안전 조끼를 벗어 걸었다.
입 밖으로 낮게 내뱉었다.
“이번엔 혼자 덮지 않는다.”
창밖으로 마지막 노을이 금정차량기지 선로 위로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