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3화

오전 7시.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신우진은 책상 위에 정비 일지 사본을 펼쳤다. 어젯밤 USB에 저장한 파일을 인쇄한 것이다. 오른쪽 서랍에서 부품 목록 양식을 꺼냈다.

KD-2037-114. 제동 밸브 조립체. 교체 예정일 최초 등록: 2년 전 3월. 1차 연기: 작년 9월. 2차 연기: 올해 12월.

승인자 칸에는 모두 같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구매처 과장 윤태호.

신우진은 확대경을 꺼내 들었다. 도장 인주의 미세한 번짐까지 확인했다. 세 개 모두 동일한 도장판에서 찍은 것이 분명했다.

펜을 들어 부품 목록에 기록을 시작했다.

'1. KD-2037-114: 교체 주기 2년 경과, 3회 연기. 승인자 윤태호.' '2. KD-2037-089: 동일 품번 하위 부품. 교체 예정일 1년 6개월 전. 2회 연기.'

검수고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잠시 후 다시 안정됐다.

신우진은 계속해서 정비 일지와 전산 출력본을 대조했다. 왼쪽 눈이 가늘어졌다. 세 번째 부품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됐다.

--- 오전 8시 30분. 철도공사 본사 감사실.

이지원은 사고 조사 보고서를 2차 검토했다. 화면 왼쪽에 보고서 원문, 오른쪽에 구매처 결재 이력. 세 개의 창을 동시에 띄워놓았다.

커서를 움직이며 시간을 추출했다. 사고 접수 시간과 구매처 과장 결재 시간의 간격. 이번 건은 38분.

추가로 7건의 무정차 통과 사고를 불러왔다. 각 건마다 구매처 결재 일자를 납품사 납품 일정과 대조했다. 데이터베이스 쿼리 결과가 로딩되자 동공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패턴이 있었다. 부품 납품일로부터 평균 6개월 이내에 결재가 집중됐다. 그중 4건은 납품일과 결재일의 차이가 3주 이내.

이지원은 오른쪽 광대뼈 아래 점을 손끝으로 쓸었다. 생각이 정리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노트북 화면에 새 메모 파일을 열었다.

'추가 소견: 구매처 과장의 결재 시점이 납품사 납품 일정과 반복적으로 근접함.' '7건 중 4건: 납품-결재 간격 3주 이내.' '부품 검수 주기와 무관하게 납품 주기에 결재 시점이 수렴하는 패턴 의심.'

키보드에서 손을 떼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기지에 직접 가야 했다.

이지원은 서류 가방에 보고서 출력본과 메모를 넣었다. 책상 위 명패가 잠시 기울었다. '감사실 이지원 주임'.

--- 오전 9시 10분. 금정차량기지 정문.

이지원은 출입 게이트에서 방문증을 발급받았다. 안내 직원이 검수고 방향을 가리켰다. 안전화로 갈아 신은 발걸음이 경쾌했다.

검수고 중앙 통로에 들어서자 철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디젤유와 그리스가 뒤섞인 현장 특유의 공기. 형광등 아래 작업자 세 명이 대차 분해 작업 중이었다.

신우진은 검수대 옆 철제 책상에서 무언가 기록하고 있었다. 안전조끼 위로 확대경이 걸려 있고, 왼쪽 가슴 주머니에 유성 매직이 꽂혀 있었다.

이지원이 다가갔다.

“신우진 주임님이십니까.”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방문객의 명찰에 멈췄다.

“맞다.”

“감사실 이지원입니다. 무정차 통과 사고 건으로 왔습니다.”

신우진은 펜을 내려놓았다.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감사실에서 여길 올 일이 있나.”

“있습니다.”

이지원은 서류 가방에서 결재 시간 분석 메모를 꺼내려다 멈췄다. 신우진의 손에 들린 부품 목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서류. 부품 목록이죠.”

“그렇다.”

“사고 열차 제동 밸브 품번. KD-2037.”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서 멈췄다. 글자를 쓰던 버릇이었다. 검지가 천천히 접혔다.

“어떻게 알았나.”

“보고서 초안을 봤습니다. 부품 점검 소견이 비어 있더군요.”

신우진이 상체를 뒤로 젖혔다.

“초안이다. 다 채울 거다.”

“그럼 지금 말씀해주십시오. 소견 내용을.”

이지원의 어조는 차분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

신우진은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왼쪽 눈이 가늘어졌다.

“안 된다.”

“이유가 뭡니까.”

“감사실은 서류로 부품을 판단한다. 서류가 틀렸을 가능성은 보지 않는다.”

“저는 숫자와 기록을 봅니다.”

“그 기록이 조작된 거라면.”

신우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칠지 않았지만 명확했다.

이지원은 한 발짝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서류 가방에서 다른 출력물을 꺼냈다.

“이걸 보셨습니까.”

사고 접수 11시 9분. 구매처 과장 결재 11시 47분.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숫자.

신우진이 종이를 내려다봤다. 시선이 숫자 위에서 3초 머물렀다.

“봤다.”

“소요 시간 38분입니다. 통상 평균의 8분의 1 수준이죠.”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감사실을 신뢰하지 않으십니까.”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는 비슷했다. 안전조끼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빼곡한 메모. 부품 번호, 교체 연기 횟수, 승인자 도장 대조 결과.

“감사실이 이걸 증거로 인정한 적 있나.”

이지원이 수첩을 내려다봤다. 왼쪽 손목의 메탈 시계가 형광등 빛에 반사됐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우진이 수첩을 덮었다.

“없다면 갈 길 가라.”

“주임님.”

“내 부품은 내가 증명한다. 서류 말고 현장에서.”

이지원이 서류 가방을 닫았다. 단추가 찰칵 소리를 냈다. 존대 속 거리가 더 선명해졌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뒤돌아 검수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안전화 굽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는 소리. 일정한 간격으로 열 걸음.

신우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한마디 더 내뱉었다.

“결재 38분. 그걸로 윤태호를 조사한다면 모를까.”

이지원의 걸음이 멈췄다. 답은 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검수고 출입문이 열리고 닫혔다.

신우진은 의자에 다시 앉았다. 부품 목록의 남은 항목을 계속 써 내려갔다.

--- 오전 10시 15분. 대영산업 대표실.

윤태호는 창가에 서 있었다. 왼손에는 스마트폰, 오른손 엄지로 인장 반지를 돌리고 있었다. 통화 연결음이 두 번 울리고 상대가 받았다.

“과장님. 윤태호입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수화기 너머 구매처 과장의 숨소리가 불규칙했다.

“대표님, 사고 건 접수됐습니다. 금정기지 쪽에서 보고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고 자체는 어쩔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죠.”

“네.”

“무정차 통과는 조사 항목이 정해져 있습니다. 제동 계통, 운행 기록, 관제 이력.”

윤태호가 창밖을 내다봤다. 공장 부지 위로 아침 햇살이 흩어지고 있었다.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검수고에서 부품 쪽을 들여다볼 겁니다. 현장 검수 주임이 누군지 확인하셨습니까.”

“신우진입니다. 경력 12년. 고집이 좀 세다는 평이 있고요.”

“고집 있는 사람은 다루는 방법이 따로 있죠.”

윤태호가 인장 반지를 한 번 더 돌렸다.

“보고서에 부품 결함 소견이 들어가기 전에, 해당 부품의 교체 이력과 검수 기록을 정리하십시오.”

“정리라면…….”

“관행 아닙니까. 오래된 부품은 주기 안에 교체한 걸로 맞추는 거.”

윤태호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끝음이 정확히 내려앉았다.

“기록을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윤태호가 창가에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왼쪽 턱선의 얕은 흉터가 빛에 비쳤다.

“이쪽도 나름대로 준비할 테니, 과장님은 서류만 신경 쓰십시오.”

“……알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윤태호는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개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처를 검색했다. 이름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번호만 있었다.

메시지를 입력했다.

'무정차 통과 사고 관련, 금정기지 쪽 조사 움직임 있습니다. 필요 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송 완료. 대화 내용은 즉시 삭제했다.

윤태호는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 납품 계약서를 넘겼다. 대영산업의 제동 부품 납품 이력.

7년간 14종. 공개입찰로 따낸 계약이었다. 규격을 좁게 설정하는 방식으로 경쟁자를 걸러낸 입찰들.

그가 중얼거렸다.

“38분 결재가 문제라면, 그게 당연한 결재라는 걸 증명하면 됩니다.”

--- 밤 9시 40분. 금정차량기지 검수고.

야간 작업자들이 퇴근한 뒤였다. 형광등 절반이 꺼져 있고, 중앙 통로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신우진은 검수대 위에 부품을 올려놓았다. 사고 열차에서 분리한 KD-2037-114 제동 밸브. 검은색 금속 표면에 유압유가 말라붙은 흔적.

작업용 확대경을 눈에 대고 하우징 측면을 검사했다. 제조사 식별 코드가 각인된 플레이트. 손전등을 비추자 숫자와 문자가 드러났다.

'MFR: HJ-4412'

신우진은 잠시 손을 멈췄다. 납품사 등록 코드를 떠올렸다. 대영산업이 납품하는 모든 부품의 코드는 'DS'로 시작한다. 늘이 기억이 아니었다. 검수 주임으로 12년간 봐온 코드 체계였다.

전산 단말기로 걸어갔다. 철도공사 부품 관리 시스템에 로그인했다. 납품사 등록 정보를 조회했다.

대영산업. 등록 코드: DS-8801.

신우진이 화면을 응시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HJ' 코드는 납품 계약 목록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부품은 대영산업의 제품이 아니었다. 적어도, 대영산업이 납품했다고 서류에 적힌 그 부품은.

신우진은 확대경을 벗어 작업대에 놓았다. 숨소리가 고요한 검수고 안으로 낮게 퍼졌다. 오른손으로 유성 매직을 집어 수첩에 기록했다.

'HJ-4412. 대영산업 등록 코드와 불일치.' '제조사 식별 코드와 납품사 등록 코드 상이.'

그는 수첩을 덮었다. 사물함으로 가서 자물쇠를 열었다. USB가 있던 자리에서 빈 공간을 확인했다. 증거는 분산되어 있었다.

사물함 문을 닫으며 생각이 정리됐다. 내일 구매처 사무실에 가야 했다. 원본 시험 성적서를 열람해야 했다. 그 부품이 어디서 왔는지 증명할 서류를.

신우진이 입 밖으로 낮게 내뱉었다.

“부품이 가짜라면, 그걸 승인한 결재도 가짜다.”

형광등 한 개가 긴 파장을 내며 깜빡였다. 검수고 유리창 너머로 야간 화차의 기적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신우진은 검수대 위에 부품을 올려놓았다.
사고 열차에서 분리한 KD-2037-114 제동 밸브.
검은색 금속 표면에 유압유가 말라붙은 흔적.

작업용 확대경을 눈에 대고 하우징 측
무정차 통과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