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25화

차량기지 정비팀 사무실. 오전 9시를 막 넘긴 시각.

신우진이 문을 열자 박중호는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구부정한 자세였다. 어깨가 앞으로 처져 있고, 왼손은 책상 모서리를 꽉 쥐고 있었다. 손등의 핏줄이 부풀어 있었다.

“팀장님.”

박중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검었다. 다크서클이 평소보다 짙게 내려앉았다.

“들어와.”

신우진이 문을 닫았다. 사무실 안은 정비 일지 냄새와 윤활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박중호의 책상 위에는 어제 전달된 증인 소환 공문이 펼쳐져 있었다. 종이 귀퉁이에는 구겨진 흔적이 역력했다.

“청문회 결과는 들었습니다.”

“무혐의 종결됐습니다.”

“알아. 이 과장한테 연락 왔더라고.”

박중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내 금고 얘기, 이 감사관도 알고 있나.”

“네.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그래.”

박중호의 오른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 마디가 굵고 관절이 울퉁불퉁했다. 30년 정비 현장에서 다진 손이었다.

“9년 전 보고서. 거기 쓰인 부품 번호가 TH-1187이야. 니가 이번에 문제 제기한 KD-2037이랑 설계 계열이 같아.”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세로선을 그었다.

“알고 있습니다. 선임 노트에도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노트, 아직 갖고 있나.”

“여기 있습니다.”

신우진이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표지가 낡고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책갈피로 접힌 페이지를 펼쳐 책상 위에 놓았다.

박중호가 수첩을 내려다봤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고영호 선임 글씨 맞네.”

“TH-1187 패킹 재질 코드 불일치 건. 7년 전 탈선 사고 직전에 기록했고, 보고서는 검토 보류 처리됐습니다.”

“그 검토 보류 결정이 누구한테서 나왔는지는 아시죠.”

“윤태호 당시 대리.”

“지금은 대영산업 대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끼어들었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사무실을 채웠다.

“보고서 원본. 감사실로 넘기기 전에 확인해야겠다.”

박중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임이 무거웠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동작에 평소보다 팔 힘이 더 들어갔다. 오른손으로 책상 귀퉁이를 한 번 짚었다.

사무실 구석. 쇳물 냄새 나는 철제 캐비닛 옆에 금고가 세워져 있었다. 높이 약 70센티미터, 폭은 어깨 너비만 했다. 제조사 명판에는 '대영정밀기계'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도색이 군데군데 벗겨져 바탕 철판이 드러났다.

박중호가 금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작게 났다. 오른손으로 다이얼을 감쌌다.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다이얼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손가락이 멈췄다.

다시 처음부터. 왼쪽 세 번. 오른쪽 두 번.

레버가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박중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바닥으로 금고 문을 한 번 쳤다. 철판이 둔탁하게 울렸다.

“기억이 안 나.”

일어서는 모습이 불안정했다. 허리에 손을 짚었다. 왼쪽 눈 밑이 가늘게 떨렸다.

신우진이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열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7년 전. 고영호 선임이 보고서 사본을 맡기고 간 날 밤이다.”

박중호가 금고에 등을 기댔다. 등판과 금고 철판이 부딪히며 소리가 났다.

“그때는 번호를 손가락 근육이 기억했어. 이젠 손가락도 기억을 못 하네.”

“제조사는 대영정밀기계. 법적 절차로 개방 요청할 수 있습니다.”

“감사실에서.”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에서 이지원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연결됐다.

“신 주임님.”

“이 감사관님. 차량기지 정비팀 사무실입니다. 박 팀장님 금고 개방을 시도했는데, 비밀번호를 분실했습니다.”

“제조사는 어디입니까.”

“대영정밀기계.”

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 키보드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대영산업 계열사입니다. 2015년 폐업. 현재 동일 규격 금고의 법적 개방 절차는 사내 규정상 관리 부서 승인과 외부 전문 업체 의뢰가 필요합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승인만 하루. 업체 출동까지 포함하면 최소 사흘.”

박중호가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악물었다. 턱 근육이 올라왔다.

“윤태호가 그동안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사흘이면 금고 열기도 전에 법무팀에서 보존 기한 문제 제기할 게 뻔해.”

신우진이 수화기를 다시 귀에 댔다.

“더 빠른 방법은 없습니까.”

“감사실 규정 제8조에 근거한 긴급 증거 보전 요청. 사고 조사와 연계된 사안이어서 가능성은 있습니다.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박중호가 금고 옆에 선 채로 신우진을 봤다. 눈의 충혈이 더 짙어졌다. 왼손으로 금고 상단을 한 번 쓸었다. 손바닥에 먼지가 묻었다.

“고영호 선임이 저 보고서 맡길 때 한 말이 있어. ‘박 검수팀장, 이건 우리가 진짜 뭘 검수했는지 보여주는 마지막 증거다. 없어지면 모든 게 뒤집힌다’.”

“안 없어집니다.”

신우진의 목소리.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가로선을 두 번 그었다.

“법적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나도 그럴 거다.”

박중호가 책상으로 돌아갔다. 걸음걸이가 굼떴다. 의자에 앉으면서 신음 소리를 한 번 삼켰다. 책상 위 증인 소환 공문을 접어 서랍에 넣었다.

“야, 신우진.”

“네.”

“청문회에서 니 왼손 흉터 얘기했다며.”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잘했다.”

박중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차량기지 선로 위로 아침 햇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선로 정비 작업자의 인원 점검 방송이 멀리서 울렸다.

“내 휴대폰은 여기 놔둔다. 전화 오면 네가 받아.”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 구석, 금고는 열리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대영정밀기계 명판 위에 쌓인 먼지가 오전 햇살에 반짝였다.

오전 10시 17분. 본사 감사실.

이지원이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모니터에 띄운 감사실 규정 제8조와 사내 보관 규정 사이를 번갈아 확인하던 시선이 멈췄다.

개인 금고 개방 요청 절차는 명확했다. 감사실 공문 발송 후 담당자 입회 하에 개방, 내용물 목록 작성 및 감사실 보관. 법적 근거는 충분했다.

이메일 알림이 화면 오른쪽 하단에 떴다. 발신인: 구재호, 법무팀.

제목: 징계 종결 사건 관련 물품 개방 절차 문의의 건.

본문을 열었다.

'징계위원회 무혐의 종결 사건(2024-인사-0317)과 관련하여, 해당 사건의 증거물로 분류되지 않은 개인 금고 내 문서 임의 개방은 인사규정 제15조에 따른 사전 승인이 필요함을 알려드립니다.'

'이에 금고 소유주의 자발적 제출 각서 및 법무팀 검토 완료 전까지 개방 절차를 보류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지원이 이메일을 읽었다. 문장 사이에 숨은 의도가 보였다. 사전 승인.

법무팀 검토. 보류. 세 개의 단어가 절차의 벽을 쌓고 있었다.

그녀가 곧바로 법제처 검색 창을 열었다. 인사규정 제15조, 물품 관리 규정 제7항, 감사권한 규칙 제12조. 조문을 하나씩 대조했다.

법무팀 요청에 법적 흠결은 없었다. 절차를 빙자한 시간 끌기였지만, 그 절차가 실정법과 사규에 근거했다.

이지원이 휴대폰을 들었다. 신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한 번.

“신우진입니다.”

“법무팀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금고 개방에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는 요청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법적 근거는.”

“인사규정 제15조. 증거물로 분류되지 않은 물품 임의 개방 제한. 흠결을 찾기 어렵습니다.”

“윤태호입니까.”

이지원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메일 하단. 수신 참조에 '대영산업 법무대리인'이 적혀 있었다.

“구재호 명의지만, 지시는 그쪽일 겁니다. 참조인에 대영산업 법무대리인이 포함돼 있습니다.”

“얼마나 지연됩니까.”

“사규상 법무팀 검토 기한은 5영업일입니다. 단축 사유가 없습니다.”

다시 침묵. 신우진의 숨소리만 들렸다.

“박 팀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

“사본을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규정 검토 결과도 함께.”

전화가 끊겼다. 이지원이 이메일 전문을 캡처하고 신우진에게 전송했다. 법제처 검색 결과와 규정 원문을 PDF로 변환해 첨부했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감사실 밖으로 본사 정문이 보였다. 차량기지 방향으로 난 도로는 비어 있었다.

이지원이 팔짱을 꼈다. 오른손 검지가 팔뚝을 두 번 두드렸다.

5영업일. 그 사이 윤태호가 할 수 있는 일이 세 가지였다. 법적 이의 제기, 문서 보존 기한 문제 제기, 금고 내용물의 물리적 이전.

셋 다 가능했다.

오전 10시 45분. 차량기지 정비팀 사무실.

신우진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메일 알림이 울렸다. 이지원이 보낸 공문 사본과 규정 검토 결과였다. 첨부 파일을 열지 않고 모니터를 박중호에게 돌렸다.

박중호가 화면을 읽었다. 눈이 세 줄을 넘기고 멈췄다.

“5영업일.”

“예.”

“내가 각서 쓰면 안 되나.”

신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법무팀 검토 완료 전까지 개방 불가입니다. 서명으로 단축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닙니다.”

박중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죽이 삐걱거렸다. 왼손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손가락 마디가 푸르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아침보다 부기가 더 올랐다.

“윤태호 그 자식, 예상보다 빠르네.”

“어제 오후 회유 시점에서 이미 준비했을 겁니다.”

박중호가 입술을 비틀었다. 웃는 건지 씹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 동작이었다.

“시간 벌이면 뭐 달라지나. 보고서는 사라지지 않아.”

신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에 떠 있는 이지원의 메모를 다시 읽었다. '셋 다 가능했다.' 그 문장이 무게를 두고 내려앉았다.

박중호가 일어났다. 동작이 느렸다. 의자 손잡이를 짚고 몸을 일으키는 데 평소보다 호흡 한 번이 더 걸렸다.

“갈 데가 있나.”

“정비고 한 바퀴 돌게. 3호기 마모도 체크 예정이었어.”

“제가 가겠습니다.”

“너는 여기 남아. 노트 검토해.”

박중호가 작업 점퍼를 집어 들었다. 왼쪽 소매 유압유 얼룩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입은 지 7년 넘은 점퍼였다.

“금고는 결국 열릴 거야. 시간이 좀 걸려도.”

신우진이 박중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눈 밑 다크서클이 어제보다 짙었다. 왼쪽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팀장님, 어젯밤 주무셨습니까.”

“잤어.”

거짓말이었다. 박중호의 목소리가 잠긴 데다 대답의 간격이 너무 짧았다. 신우진은 더 묻지 않았다.

박중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네 걸음째에 왼발이 바닥에 살짝 끌렸다. 본인만 모르는 버릇이었다. 피로가 쌓이면 왼쪽 발바닥을 완전히 떼지 못하는.

문이 닫혔다. 신우진이 서랍을 열었다. 7년 전 선임 고영호의 조사 노트를 꺼냈다.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공책.

책상 위에 펼쳤다. 마지막으로 읽은 페이지를 넘겼다.

2007년 12월 3일자 기록. TH-1187-04 제동 밸브 패킹 재질 코드 검증 도중 남긴 메모. 오른쪽 여백에 빨간 펜으로 필기된 문장.

'B4 작동유 계통, 9년 전과 동일 패턴.'

신우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9년 전. 선임이 2007년에 9년 전을 언급했다는 건, 1998년부터 동일한 결함이 반복됐다는 뜻이었다.

노트를 넘겼다. 뒷면에 추가 메모가 있었다. 연필로 급하게 눌러쓴 필체.

'구매처 대리 윤, 검토 반려. 기록 삭제 예상됨. 사본 보관.'

신우진이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노트 위로 형광등 불빛이 내리쬐었다. B4 작동유 계통.

9년 전. 동일 패턴. 세 개의 단어가 선 하나로 이어졌다.

밖에서 정비고 방향으로 사이렌 소리가 멀어졌다. 소방 훈련용 경적이 아니었다.

사무실 구석 천장에 달린 CCTV 모니터. 16분할 화면 중 좌측 하단 채널. 정비고 2층 통로.

박중호가 난간 옆에서 비틀거렸다. 오른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난간을 움켜쥐었다. 몸이 반쯤 기울었다가 멈췄다.

다섯 초. 박중호가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등이 들썩였다. 숨을 고르는 움직임이었다. 천천히 난간에서 손을 떼고 다시 걸었다.

CCTV 화면 속 박중호의 걸음은 여전히 왼발이 끌리고 있었다. 신우진이 일어서지 않았다. 화면을 지켜볼 뿐이었다.

손안의 노트가 무거웠다.

무정차 통과2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