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26화
다음 날 오전 8시 15분. 차량기지 정비팀 사무실.
신우진이 문을 열자 최명식이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보다 얼굴이 창백했다.
“선배님, 팀장님 어젯밤……”
“들었어.”
신우진이 안전조끼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최명식이 말을 이었다.
“어제 오후 7시쯤이래요. 3번 정비고에서 수색 작업 혼자 하시다가 작업대에서 떨어지셨대요. 높이 1.5미터. 안전모는 쓰고 계셨는데 발목이……”
“의무실은.”
“일단 거기서 응급 처치하고, 밤 9시에 공사 지정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발목 염좌랑 손목 타박상. 의식은 명료하시대요.”
신우진이 책상에 손을 짚었다. 어제 CCTV 화면. 박중호가 난간을 붙잡던 모습. 피로가 쌓여 왼발을 끌던 걸음.
“작업 일지 확인했어?”
“네. 그런데……” 최명식이 말을 더듬었다. “어제 오후 작업 지시서가 없어요. 팀장님이 퇴근 무렵에 혼자 정비고 들어가신 거라……”
신우진이 컴퓨터를 켰다. 사고 경위서 양식을 열었다. 화면 왼쪽에 기본 정보를 입력했다.
‘발생 일시: 2024년. 발생 장소: 차량기지 3정비고. 부상자: 박중호(정비팀장).’
신우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안전 수칙 제7조. 1.5미터 이상 고소 작업 시 2인 1조 편성 의무. 야간 단독 작업 금지.
박중호는 그걸 몰랐을 리 없었다. 30년 차 정비팀장이 안전 수칙을 몰랐을 리.
신우진이 경위서 초안을 쳤다. 단독 작업이었음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피로 누적 상태 확인란에 체크했다.
“명식아.”
“네.”
“오늘 오전 검수 일정 뽑아와. 팀장님 몫까지 재조정해야 하니까.”
최명식이 서류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신우진은 경위서를 출력하고 서명란에 사인했다. 결재선은 비워 두었다. 박중호의 부재. 검수팀장 직무대행 지정 전까지 서류는 보류.
프린터에서 종이가 나왔다. 신우진이 서류를 들어 확인했다.
사무실 구석 금고는 여전히 잠겨 있었다.
오전 10시. 공사 지정 병원 4인실.
신우진이 병실 문을 열자 박중호가 침대 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왼쪽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오른쪽 발목은 부목으로 고정된 채 담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왔냐.”
박중호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더 잠겨 있었다. 눈 밑 다크서클은 여전히 짙었다. 신우진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경위서 초안 작성했습니다. 결재는 직무대행 지정 후에.”
“내일쯤이면 퇴원한다.”
“발목 염좌에 손목 타박상이면 1주일은 안정입니다.”
박중호가 피식 웃었다. 웃다가 손목을 움찔했다.
“병원 말이 그렇더라. 3일만에 나가도 된다고.”
“안전 수칙 위반 건은 어떻게 보고할까요.”
“있는 그대로 써. 단독 작업, 안전 수칙 위반. 내가 그랬어.”
잠시 침묵. 옆 침대 환자의 수액 펌프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팀장님. 금고 건입니다.”
박중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법무팀에서 5영업일 지연 걸었습니다. 이 감사관이 확인했습니다. 단축 사유 없음.”
“윤태호 새끼.”
박중호가 천장을 바라봤다. 붕대 감은 손목이 담요 위에서 살짝 떨렸다.
신우진이 말을 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팀장님의 공식 위임입니다. 감사실에 제출할 금고 개방 권한 위임장. 팀장님 서명만 있으면 법적 효력이 생깁니다.”
“자네한테 맡겨도 되나.”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합니다.”
박중호가 신우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알겠다. 위임장 써.”
“고맙습니다.”
“고맙긴. 내가 못 열어서 문제지.”
박중호가 오른손으로 머리맡 물컵을 더듬었다. 신우진이 컵을 집어 건넸다. 박중호가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금고 제조사 연락은 내가 직접 해보겠다. 대영정밀기계, 이미 폐업했지만 옛날 엔지니어 한 명 연락처를 안다. 혹시 비상 개방 절차를 알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신우진이 일어서며 메모지를 꺼냈다. 자필로 위임장 초안을 적었다. 금고 개방 권한 위임, 수임자 신우진, 위임 사유 불가피한 입원. 박중호에게 볼펜과 메모지를 건넸다.
“여기 서명하면 감사실에 정식 양식으로 올리겠습니다.”
박중호가 볼펜을 받아 메모지 하단에 이름을 적었다. 필체가 평소보다 힘이 없었지만 서명은 틀리지 않았다.
“신우진.”
“네.”
“금고 안 보고서. 9년 전 거 말이다. 그거 나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압니다.”
“윤태호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저쪽도 빨리 움직일 거야.”
“압니다.”
박중호가 침대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았다. 신우진이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병실 문을 나서기 전, 뒤에서 박중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비고. 검수 밀리지 마라.”
“걱정 마십시오.”
오전 11시 30분. 차량기지 정비팀 사무실.
신우진이 복귀하자 최명식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손에 노트북과 메모지를 동시에 쥐고 몸을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선배님! 다녀오셨어요? 팀장님 상태는요?”
“의식 명료. 발목 염좌, 손목 타박상.”
신우진이 책상에 앉으며 메모지를 꺼냈다. 박중호의 서명이 적힌 위임장 초안을 서류철에 끼웠다.
최명식이 목소리를 낮췄다. 긴장하면 빨라지는 말투였다.
“저, 어젯밤에 게임 길드원이랑 디스코드하다가 들은 얘긴데요. 완전 확인된 건 아니고 소문이라고 했는데……”
“내용이 뭔데.”
“대영산업 내부에서 B4 계열 부품 교체 시기가 슬슬 다가온대요. 납품한 지 2년 넘었으니까 원래 교체 주기상 올해 하반기가 한계래요.”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길드원이 대영산업 품질관리팀이랑 같은 대학 출신이래서. 요즘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던데요. 내부 감사 결과에 엄청 촉각 곤두세우고 있대요. 이번 감사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교체 계약 규모가 달라질 거라고.”
“그 얘기만 했어.”
“아뇨, 하나 더. 납품사 쪽에서도 법무팀이랑 연락 주고받고 있대요. 미리 대비하는 느낌이라고……”
최명식의 손가락이 노트북 모서리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보드에 적힌 일정표 옆 빈 공간에 매직을 들었다.
‘B4 교체 시한: 올해 하반기.’
‘납품사: 감사 결과 따라 계약 규모 변동.’
‘법무팀-납품사 연계: 이미 진행 중.’
“명식아.”
“네!”
“이 정보, 이 감사관에게 전달해도 되겠냐.”
“당연하죠. 그게 목적이었는데요. 정식 제보 경로는 아니니까…… 선배님이 판단해서 전달해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신우진이 노트를 꺼내 메모를 적었다. 이지원에게 전달할 요점 세 줄.
첫째, B4 부품 교체 시한 임박. 둘째, 납품사 내부에서 감사 결과에 촉각. 셋째, 법무팀과 납품사 간 연계 움직임 포착.
메모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최명식이 노트북을 들었다.
“그럼 저는 기록고로 갈게요. 오후 검수는 제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 할게요.”
“고맙다.”
최명식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내 이지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확인되지 않은 납품사 내부 동향. 대면 전달 필요. 오후 시간 가능하면 감사실로 가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박중호의 빈 책상 위에 어제의 정비 일지가 쌓여 있었다. 구석 금고의 다이얼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신우진이 검수 일정표를 끌어당겼다. 박중호 몫으로 배정된 B4 계열 차량 세 대. 오늘 오후, 내일 오전, 모레 오후. 재조정을 위해 연필로 표시를 넣었다.
화이트보드에 적은 세 줄이 눈에 들어왔다. 교체 시한. 감사 결과. 연계 움직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최명식이 나간 뒤 사무실은 적막했다.
신우진은 선임의 조사 노트를 다시 펼쳤다.
오후 2시를 갓 넘긴 정비팀 사무실. 최명식이 나간 뒤 사무실은 적막했다.
신우진은 선임의 조사 노트를 다시 펼쳤다. 2007년 12월 3일자 기록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고영호 선임이 남긴 TH-1187-04 점검 날짜 열이 눈에 들어왔다.
노트 왼편. 점검일자가 빼곡했다. 11월 15일, 11월 22일, 11월 29일. 매주 금요일. 그런데 12월 3일 기록 바로 위, 11월 29일과의 사이에 연필로 긋고 지운 날짜가 있었다.
신우진이 확대경을 꺼내 들었다. 지워진 글씨 위로 렌즈를 맞췄다.
11월 27일. 수요일이었다. 정기 점검일이 아닌 날.
노트의 해당 페이지를 옆으로 비춰봤다. 눌린 필압이 남아 있었다. '패킹 마모도 0.7mm 초과.
즉시 교체 요청.' 그 아래 빨간 펜으로 취소선. 옆에 낙관이 찍혀 있었다. 구매처 검토 반려. 날인은 윤태호.
신우진이 개인 검수 노트를 꺼내 현재 KD-2037-114의 점검 기록을 대조했다. 지난 3월 17일, 자신이 첫 검수에서 남긴 마모도 수치. 0.15mm.
정상 범위. 그러나 물류창고 입고 대장의 날짜는 3월 18일이었다. 부품이 입고되기도 전에 검수 기록이 존재했다.
선임 노트와 동일한 패턴이었다. 점검일보다 앞선 날짜에, 정기 점검 외의 날에 발견된 결함. 그리고 구매처의 검토 반려.
노트 두 권을 나란히 놓았다. 9년 전 TH-1187. 7년 전 TH-1187-04.
현재 KD-2037. 모두 같은 패킹 구조, 같은 마모 패턴. 날짜 불일치도 동일했다.
신우진이 컴퓨터를 켰다. 엑셀 시트를 열었다. 선임 노트에서 확인된 날짜별 불일치를 한 줄씩 입력했다. 2007년 11월 27일 긴급 교체 요청, 검토 반려자 윤태호. 2007년 12월 3일 정기 점검 시 동일 부품 패킹 변형 확인.
그 아래 현재 데이터를 병기했다. 2024년 3월 17일 검수 기록, 입고일과 불일치. 부품 코드 TH-1187에서 KD-2037까지 설계 계보도 추가하고, 내열 규격과 실제 재질 코드의 차이도 메모란에 적었다.
분석 시트를 파일로 저장했다. 제목은 'B4 계열 제동 밸브 결함 지속 및 날짜 불일치 패턴 보고'.
이메일 클라이언트를 열었다. 수신인 이지원. 본문에는 다섯 줄만 썼다.
'첨부 파일 검토 요청합니다. 선임 조사 노트에서 정기 점검 외 긴급 교체 요청이 구매처에 의해 반려된 패턴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KD-2037의 입고-검수 간 날짜 불일치와 동일한 양상입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파일이 업로드 바를 넘어갔다. 전송 완료.
모니터 시계가 14시 47분을 가리켰다.
오후 4시 30분. 본사 감사실.
이지원이 이메일을 열었다. 첨부 파일을 다운받아 출력했다. A4 용지 세 장. 첫 장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11월 27일 긴급 교체 요청. 검토 반려자 윤태호. 이지원의 시선이 그 줄에서 멎었다. 이미 아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건 7년 전 문서상에 남은 기록이었다.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갔다. 현재 KD-2037의 날짜 불일치. 세 번째 페이지는 설계 계보도와 내열 규격 차이 대조표.
이지원이 전화기를 들었다. 단축번호 2번. 신우진에게 연결했다.
“신 주임님.”
“확인하셨습니까.”
“받았습니다. 날짜 불일치 패턴은 청문회에서 다루지 않은 새로운 사실입니다.”
“의도적 반려의 증거입니다.”
“압니다.”
이지원이 분석 시트 마지막 장을 넘겼다. 메모란에 신우진이 적은 설계 계보도가 보였다. TH-1187부터 KD-2037까지. 붉은 선으로 이어진 패킹 구조.
“이 자료로 감사 범위를 B4 전 계열로 확장할 근거가 확보됐습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무엇입니까.”
“청문회 속기록과 유출 경로 입증 자료로 내부 감사 재개 조건이 충족됐습니다. 공식 개시 전 정보원 접촉을 재개합니다.”
이지원이 컴퓨터 화면을 켰다. 비공식 메신저 계정을 열었다. 대화 상대 목록에서 세 개의 계정이 보였다. 하나를 선택하고 열 글자 남짓의 메시지를 입력했다.
‘내일 오전. 평소 장소.’
전송.
“정보원 접촉은 제가 진행합니다. 신 주임님은 박 팀장님 위임장을 공식 제출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위임장 양식은 어디서 받습니까.”
“감사실 내부 전산망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법적 개방 절차에 필요한 검수팀장 직인 날인도 필요합니다. 박 팀장님은...”
이지원이 잠시 멈췄다.
“박 팀장님이 직접 서명할 수 없는 상황이오니 인감증명과 위임 사유서를 첨부해야 합니다. 의료기관 소견서도 필요하고요.”
“병원에 확인하겠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준비해주십시오.”
신우진이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손에 쥔 선임 노트의 표지를 한 번 쓸었다.
공사 지정 병원 입원실. 창밖으로 차량기지 방향이 보였다. 정비고 옥상의 붉은 경고등이 어둑한 하늘에 깜박였다.
박중호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왼팔에 수액 라인이 연결돼 있었다. 얼굴의 핏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신우진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손에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박중호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봉투에 닿고, 다시 신우진의 얼굴로 올라왔다.
“수액 라인. 한 시간 뒤에 뺀답니다.”
“네.”
신우진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봉투에서 문서를 꺼내려는 손을 박중호가 말렸다.
“됐다.”
박중호가 창밖을 바라봤다. 붉은 경고등이 다시 깜박이고 사라졌다.
“내 금고는 내가 직접 열겠네.”
신우진이 고개를 약간 들었다. 박중호의 옆얼굴이 창 빛에 실루엣으로 남았다.
“그게 이 9년의 무게를 끝내는 방식일세.”
신우진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봉투를 무릎 위에 그대로 두고 창밖으로 기지 방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