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28화
철도공사 감사실. 오후 1시 30분.
이지원이 보안 관제 센터의 보조 모니터 앞에 앉았다. IT 보안 담당자가 로그 뷰어를 넘겼다.
“삭제 쿼리 실행 시각은 3월 17일 오후 11시 42분입니다.”
“그 시점 접속 계정은.”
“필터링 중입니다.”
화면에 세 개의 계정이 떠올랐다. 이지원이 왼손으로 메탈 시계 밴드를 한 번 쳤다.
첫 번째 계정. 시스템 관리자(sa). 정기 유지보수 시간대 접속. 삭제 명령 실행 권한 보유.
두 번째 계정. 전산실 당직자(night_op). 교대 근무자의 정상 접속. 명령 실행 권한 없음.
세 번째 계정. 감사실 내부(audit_kdh).
이지원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갔다.
“audit_kdh. 감사실 내부 계정입니다.”
“맞습니다. 삭제 실행 3분 20초 전에 접속했습니다.”
“실행 권한은.”
“없습니다. 읽기 권한만 있는 계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담당자가 로그를 한 줄 더 펼쳤다. 타임스탬프 사이에 붉은 하이라이트가 들어왔다.
“삭제 쿼리는 sa 계정으로 실행됐습니다. 그런데 audit_kdh가 삭제 직전에 해당 테이블을 조회했습니다. 삭제 대상을 확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지원이 화면을 응시했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짧게 멈췄다.
“audit_kdh 실소유주는.”
“인사 기록과 교차해야 합니다. 현재 이 계정의 최근 접속 기록을 뽑아드릴까요.”
“전부 주십시오.”
담당자가 프린터로 출력물을 뽑았다. 이지원이 종이를 받아 접었다. 왼손이 시계 밴드를 한 번 더 쳤다.
“이 목록은 제가 직접 보관합니다.”
“알겠습니다.”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전차량기지 정비고 후면 야적장. 오후 2시 15분.
신우진이 박중호를 찾았다. 박중호는 폐유 드럼 옆에서 담배를 비벼 끄고 있었다. 왼손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지난주 추락 사고의 흔적이었다.
“팀장님.”
“뭔데.”
신우진이 가슴 주머니에서 선임의 조사 노트를 꺼냈다. 표지를 펼쳤다.
“9년 전 보고서 말입니다.”
박중호의 손이 멈췄다. 담배꽁초를 드럼 옆 재떨이에 눌렀다.
“뭘.”
“TH-1187.”
박중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턱 근육이 짧게 올라왔다.
“알고 있잖아.”
“보고서를 작성하신 게 맞습니까.”
“그래.”
“어디에 있습니까.”
박중호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오른손으로 작업 점퍼 주머니를 쓸었다.
“폐기했다.”
신우진이 노트의 한 페이지를 짚었다. 2007년 12월 3일자 기록. ‘기록 삭제 예상과 사본 보관 결정.’
“선임 노트에는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고영호는 그때 현장에 없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박중호가 침묵했다. 시선이 야적장 너머 검수고 쪽으로 향했다. 크레인 소리가 멀리서 둔탁하게 깔렸다.
“상부에서 폐기 지시가 내려왔다.”
“누구입니까.”
“당시 본부장.”
“성함은.”
박중호가 시선을 돌렸다. 신우진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이미 퇴직했다.”
“문서화된 폐기 확인서는 남겼습니까.”
박중호의 오른손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작업 점퍼 지퍼를 올렸다 내렸다.
“구두 지시였다.”
신우진이 노트를 접었다. 왼손 집게손가락의 유압유 흉터가 햇빛을 받았다.
“규정상 폐기 확인서 없으면 공식 폐기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박중호가 입술을 악물었다. 오른손이 다시 주머니로 들어갔다. 담배갑을 만지는 소리가 났다.
“신우진.”
“말씀하십시오.”
“왜 이걸 지금 파는 거냐.”
신우진이 흉터 난 손가락으로 노트 표지를 한 번 쓸었다.
“삭제된 검수 기록과 선임 노트가 같은 납품사를 가리킵니다. 7년 전과 9년 전 사이에 같은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그 보고서만이 그 사이를 연결합니다.”
“증거는.”
“대영산업. TH-1187-04. 제동 밸브. 규격서와 실제 패킹 재질 코드 불일치.”
박중호의 담배갑에서 필터 하나가 빠져나왔다. 입에 물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돌리기만 했다.
신우진이 노트의 다른 페이지를 폈다. 2007년 11월 27일. 패킹 마모 기준 초과. 구매처 대리 윤태호 검토 반려.
“상부의 폐기 지시를 받은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폐기 확인서가 없으면 그 보고서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동시에 폐기됐다고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박중호가 담배를 비벼 넣었다. 이미 꺼진 재떨이에 필터가 부서졌다.
“네가 맞다.”
“그 보고서는 어디에 있습니까.”
박중호가 침묵했다. 손이 작업 점퍼 왼쪽 소매의 유압유 얼룩을 문질렀다. 20초가 지났다.
“묻지 마라.”
“팀장님.”
“지금은 안 된다.”
신우진이 노트를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게 멈췄다. 글자를 쓰는 버릇이었지만 쓰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게 전부냐.”
“아닙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뭔데.”
“보고서를 보관했을 가능성이 있는 다른 경로는 없습니까. 당시 공동 검토자나 회람된 사본.”
박중호의 손이 멈췄다. 소매 얼룩을 문지르던 동작이 뚝 끊겼다.
“사람이 하나 있었다.”
“누구입니까.”
“강재호. 당시 품질관리팀 과장. 지금은 퇴직했다.”
“그분이 내용을 기억할 가능성은.”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하다. 그 작자가 보고서 들고 밤새 뒤집던 놈이니까.”
신우진이 휴대폰을 꺼냈다. 메모 앱에 ‘강재호, 前 품질관리팀 과장’을 입력했다.
“연락처는 확보 가능합니까.”
“내가 알아본다. 오늘 중으로.”
“고맙습니다.”
박중호가 돌아섰다. 두 걸음 가다가 멈췄다. 뒤를 보지 않았다.
“신우진.”
“네.”
“네 손가락 흉터. 그날 유압유였어. TH-1187에서 새어 나온 거.”
신우진이 왼손을 내려다봤다. 집게손가락 마디의 오래된 흉터. 표면이 매끈하고 색이 바랬다.
“알고 있습니다.”
박중호가 검수고 쪽으로 걸어갔다. 작업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철도공사 감사실. 오후 3시 45분.
이지원이 접속 계정 목록과 인사 기록을 교차 대조했다. 왼쪽 모니터에는 audit_kdh의 최근 3개월 접속 로그. 오른쪽 모니터에는 감사실 현원 명단.
audit_kdh. 계정 생성일 2019년 11월 4일. 소속 부서 감사실 운영지원팀. 직급 6급 주무관.
이지원이 명단을 한 줄씩 훑었다. 같은 소속에 해당하는 이름이 하나였다.
김민혁.
이지원이 마우스를 멈췄다. 왼손이 메탈 시계 밴드를 세 번 쳤다.
화면에 조영우의 전출 기록을 띄웠다. 2019년 10월 28일. 조영우가 감사실에서 구매처로 전출된 시점. 그로부터 7일 후에 audit_kdh 계정이 생성됐다.
이지원이 새로운 창을 열었다. 김민혁의 발령 기록. 2019년 11월 1일. 전입 사유란에 ‘조영우 전출에 따른 결원 보충’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모니터를 응시한 채 내부 메신저를 열었다. 신우진에게 암호화 메시지를 보냈다.
‘접속 계정 실소유주 확인. 김민혁. 조영우 후임으로 2019년 11월 발령. 계정 생성일 조영우 전출 7일 후.’
15초 후 답장이 왔다.
‘감사실 내부인가.’
‘맞다. 현재도 감사실 소속. 운영지원팀 6급.’
‘확실한가.’
‘인사 기록과 계정 생성일, 전입 사유 모두 일치. 추가로 계정의 최근 3개월 야간 접속 패턴을 확보했다.’
‘패턴은.’
이지원이 잠시 멈췄다. 로그 파일을 다시 열었다. audit_kdh의 접속 기록을 시간순으로 정렬했다.
‘오후 10시 이후 열두 건. 주말 다섯 건. 전부 특정 문서 분류 체계 집중. 대영산업 납품 품목 코드 포함.’
‘조영우와 연관성은.’
‘확인 중이다. 발령 시점과 계정 생성 시점이 연속된다는 점은 확실. 추가 검증 전까지 단정은 보류한다.’
‘알겠다. 강재호라는 이름 혹시 아는가.’
이지원이 생각을 정리했다. 왼손 엄지가 시계 밴드 안쪽을 한 번 눌렀다.
‘前 품질관리팀 과장. 퇴직 시점 2015년 이후로 추정. 왜 필요한가.’
‘9년 전 보고서 공동 검토자. 박 팀장님이 방금 알려줬다.’
‘연락처 확보 가능한가.’
‘박 팀장님이 오늘 중으로 알아본다고 했다.’
이지원이 모니터 왼쪽에 새 검색창을 열었다. 인사 데이터베이스에서 퇴직자 기록을 조회했다.
‘내 쪽에서도 퇴직자 연락처를 검색해보겠다. 확보되는 대로 공유한다.’
‘알겠다.’
이지원이 메신저 창을 닫았다. 왼손이 시계 밴드에서 떨어졌다. 손가락이 탁자 위의 출력물을 한 번 짚었다.
김민혁.
조영우의 자리를 채운 인물. 같은 문서 분류 체계를 반복 열람한 인물. 야간과 주말에만 비정상 접속을 반복한 인물.
이지원이 로그를 더 깊이 추적했다. audit_kdh의 3월 17일 접속 기록. 삭제 명령 실행 시각은 오후 11시 42분.
그런데 그 몇 시간 전. 오후 7시 15분.
audit_kdh 계정으로 수신된 이메일 한 통. 첨부파일 포함. 암호화된 zip 파일.
이지원이 마우스를 멈췄다. 발신자 도메인을 확인했다.
메일 서버 주소는 dhparts.com. 대한부품산업의 익명 메일 서버였다.
이지원이 화면을 확대했다. 이메일 수신 로그가 모니터 전체를 채웠다. 탁자 위의 메탈 시계 초침만 움직였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