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29화

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오후 2시.

박중호가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삐걱거렸다. 왼손이 책상 모서리를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부풀었다.

신우진이 맞은편에 섰다.

“보고서 폐기 지시. 누가 내렸습니까.”

박중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정비고 너머로 열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당시 본부장이었다. 이름은 묻지 마라.”

“구두 지시였습니까.”

“그렇다.”

“왜 따랐습니까.”

박중호의 턱 근육이 굳었다.

“안 따를 수 없었다. 팀 전체가 위태로웠다.”

신우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왼손 집게손가락의 흉터가 창문 빛에 드러났다.

“사본은 왜 만들었습니까.”

“언젠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가 언제입니까.”

박중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 밑 다크서클이 짙었다. 시선이 신우진의 왼손에 닿았다.

“작년에 한 번 그런 순간이 왔다.”

신우진이 기다렸다.

“한경숙. 그 사람이 제보 받은 게 있었어. B4 계열 부품 얘기였지.”

“알고 있습니다.”

“그 제보 내용. 내 보고서랑 똑같은 지점을 찌르더라.”

박중호의 오른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패킹 내열 온도. 규격서는 230도인데 실제 재질은 달랐다. 내가 9년 전에 확인한 바로 그 내용이었다.”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세로선을 그었다.

“그걸 알면서도 침묵하셨습니까.”

“금고를 열려고 했다.”

박중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 이미 법무팀 쪽에서 내 금고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더라. 열기 전에 인사팀 경고가 날아왔어. 징계 사유 삼겠다고.”

“그래서.”

“못 열었다.”

박중호의 주먹이 풀렸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박승호가 죽었다.”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신우진이 숨을 들이쉬었다.

“사본은 금고에만 있습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그렇다.”

“다른 부서에 회람된 사본은.”

박중호가 잠시 멈췄다. 미간이 좁혀졌다.

“당시 구매처로 정식 보고 올리기 전에, 품질관리팀 내부 검토를 한 번 거쳤다.”

“누구랑.”

“강재호. 그때 과장이었어.”

신우진이 가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유성 매직으로 이름을 적었다.

“그 사람이 내용을 기억할까요.”

“기억할 거다. 꼼꼼한 놈이었어.”

“연락 가능합니까.”

“퇴직하고 연락 끊겼다. 휴대폰 번호는 찾아볼 수 있다.”

“찾아주십시오.”

박중호가 신우진을 올려다봤다.

“왜 강재호까지 들춰내려는 거냐.”

“금고가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법무팀이 5영업일 걸어놨다. 그 안에 뭘 하겠다는 거냐.”

“강재호가 회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중호의 표정이 변했다. 뭔가 떠오른 듯했다.

“그… 그럴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강재호는 버릇이 있었어. 중요한 회의 자료는 항상 개인 파일로 따로 보관했다. 퇴직할 때 상자째 들고 나갔을 거다.”

신우진이 수첩을 덮었다.

“연락처를 지금 바로 확인해주십시오.”

박중호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낡은 주소록을 꺼냈다.

대전 시내 모 카페. 오후 4시.

윤태호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창가에서 두 번째 테이블. 밖에서는 차량 소리만 들렸다.

김민혁이 맞은편에 앉았다. 서류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았다.

“로그 분석이 진행 중입니다.”

윤태호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잔 받침에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디까지 좁혀지셨나요.”

“삭제 실행 계정까지는 아직입니다. 시간대 접속자 일곱 명에서 네 명으로 압축됐다고 합니다.”

“네 명이군요.”

“감사실 내부에서 추가 필터를 걸었습니다. 야간 접속 패턴과 문서 분류 체계 접근 이력을 교차 검증 중입니다.”

윤태호의 오른손 약지에 낀 금색 인장 반지가 형광등 빛을 반사했다.

“당신 계정은 어디쯤 있나요.”

“아직 의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의심 대상이 아니라 제외 대상으로 만드셔야죠.”

김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IT 보안 관제 센터에서 백업 서버 로그도 요청했습니다. 거기까지 추적이 확장되면 삭제 전 동기화 중단 기록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동기화 중단은 누구 계정으로 하셨나요.”

“시스템 관리자 계정입니다.”

“추적 가능한가요.”

“관리자 계정은 다섯 명이 공유합니다. 개인별 접속 기록이 남지 않습니다.”

윤태호가 잠시 생각했다.

“그럼에도 좁혀지겠죠. 시간대와 작업 내역으로요.”

“예.”

“법무팀 쪽은 어떻게 됐나요.”

“금고 개방 5영업일 지연을 확정했습니다. 공문이 이지원 감사관에게 발송됐습니다.”

“신우진 씨는요.”

“오늘 오전에 박중호 팀장 개인 면담을 했습니다.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윤태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깜빡임이 없었다.

“박중호 씨는 금고를 열지 못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우진 씨가 찾으실 다른 경로가 뭘까요.”

“기록 대조입니까.”

“아니에요. 사람입니다.”

윤태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9년 전 그 보고서를 본 사람이 있을 겁니다. 작성자는 박중호 씨지만, 검토자는 따로 계실 거예요. 신우진 씨가 거길 파고드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민혁이 태블릿을 열었다.

“인사 데이터베이스에서 9년 전 품질관리팀 소속 직원을 조회해보겠습니다.”

“그건 이미 늦었어요. 신우진 씨가 지금쯤 연락처를 받으셨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막지 않으실 겁니다.”

윤태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다.

“다만 정치권 쪽 준비를 앞당기십니다. 국회의원 비서관에게 연락하실 시점을 내일 오전으로 잡으세요.”

“비서관에게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감사실이 정비팀 내부 갈등을 감사로 포장해 특정 납품사를 압박하고 있다. 그 정도 문구면 충분하겠죠.”

김민혁이 태블릿에 메모했다.

“삭제 실행자는 어떻게 보호하시겠습니까.”

“추적이 그 사람에게 도달하기 전에, 다른 이슈를 터뜨리셔야죠.”

“어떤 이슈를 생각하십니까.”

윤태호가 미소를 지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신우진 씨의 징계 청문회가 무혐의로 끝났잖아요.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시는 겁니다. 검수 일지의 날짜 불일치를 재소환하세요.”

“이미 종결된 사안입니다.”

“종결은 행정적 판단일 뿐이에요. 정치적 재검토는 언제든 가능하답니다.”

김민혁이 태블릿을 덮었다.

“알겠습니다.”

“한 가 더요. 법무팀에 연락하셔서 금고 개방 검토 기한을 최대한 늘리라고 전하세요.”

“5영업일 이상은 사규상 불가능합니다.”

“그럼 그 안쪽에서 다른 방법을 찾으셔야죠.”

윤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고 안의 물건을 물리적으로 이전하는 것도 검토해보시고요.”

김민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법적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검토만 해보시라니까요.”

윤태호가 계산대 쪽으로 걸어갔다.

감사실 사무실. 오후 6시.

이지원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접근 권한 로그 분석 자료가 화면 전체를 채웠다.

원본 테이블을 정렬하고 재정렬했다. 삭제 명령 실행 시각 전후 24시간의 모든 접속 기록을 부서별로 분류했다.

감사실 내부 계정 중 비정상 패턴은 세 개였다.

첫 번째는 audit_kdh. 김민혁.

두 번째는 proc_mks. 구매처 소속 계정.

세 번째는 sysadmin03. IT 관리팀.

왼손 엄지가 시계 밴드 안쪽을 눌렀다.

proc_mks의 접속 로그를 더 깊이 추적했다. 삭제 실행 시각 3시간 전. 문서 분류 체계에서 B4 계열 검수 기록을 조회했다.

그리고.

구매처 내부 결재 문서 중 대영산업 계약 갱신 건도 동시에 열람했다.

이지원이 마우스를 멈췄다. 화면을 확대했다.

proc_mks 계정이 열람한 문서 분류 번호.

PC-2015-078.

PC-1998-042.

숫자가 시야에 꽂혔다.

1998.

이지원이 손목 시계를 풀었다.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시계 옆으로 출력물을 펼쳤다.

20년 전 아버지가 제보했던 부품 비리 사건의 문서 번호.

QC-1998-031.

분류 체계 접두사가 달랐다. 당시는 품질관리팀 소관이었다. 지금은 구매처 소관으로 이관돼 있었다.

하지만 숫자 패턴은 동일했다. 연도-일련번호. 같은 규칙이었다.

이지원이 개인 수첩을 꺼냈다.

PC-2015-078.

QC-1998-031.

두 줄을 나란히 적었다.

왼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다음. 내부 메신저를 열었다.

신우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두 번째 의심 계정 확인. 구매처 소속. proc_mks. 삭제 3시간 전 B4 검수 기록 조회 이력 있음.’

10초 만에 답장이 왔다.

‘계정 실소유주는.’

‘현재 인사 기록 대조 중. 조영우와 같은 구매처 내에 있음. 추가로 감사실 계정 외에 이 계정이 대영산업 관련 문서를 반복 열람한 기록도 확보.’

‘연결된다.’

‘연결됩니다. 그리고 한 가 더.’

‘말해.’

‘이 계정이 열람한 문서 분류 체계에서 20년 전 사건과 동일한 번호 규칙을 발견했습니다.’

잠시 정적.

‘무슨 사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이지원이 메시지를 보내고 손가락을 멈췄다.

화면 속 로그가 스크롤됐다.

‘금고 개방 전에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증언 기록을 준비해주십시오.’

‘알고 있다. 강재호라는 이름. 박 팀장이 연락처를 찾았다. 지금 전화할 거다.’

‘연락 결과를 공유해주십시오.’

‘그러겠다.’

이지원이 메신저 창을 닫았다.

다시 proc_mks의 접속 로그로 돌아갔다.

구매처 내부에 또 한 명.

조영우만이 아니었다.

김민혁 외에 한 명 더.

내부 정보 누설 경로는 디지털과 물리적,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로 갈라져 있었다.

이지원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손가락이 탁자 위의 출력물을 한 번 짚었다.

차량기지 검수고 사무실. 오후 7시.

신우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박중호가 건넨 메모지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010-5347-1289.

통화 연결음이 길게 울렸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에 받았다.

“여보세요.”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 배경에 TV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강재호 과장님입니까.”

“그런데 누구신지.”

“철도공사 차량기지 정비팀 신우진입니다. 박중호 팀장님 소개로 연락드렸습니다.”

잡음. TV 소리가 작아졌다. 강재호가 리모컨을 누른 듯했다.

“박중호? 그 양반 아직 있나.”

“예. 현장 팀장으로 계십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신우진이 허공에 짧은 가로획을 그었다.

“9년 전 B4 계열 부품 품질 의혹 보고서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걸 왜 지금.”

“무정차 통과 사고가 났습니다. 원인이 그때 그 부품과 동일한 계열입니다.”

침묵. 더 길었다.

“확실한가.”

“패킹 내열 온도 불일치. 동일한 제조사. 동일한 설계 계통입니다.”

강재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TH-1187?”

“맞습니다. 지금은 KD-2037로 모델명이 바뀌었습니다.”

“그걸… 그걸 아직도 쓰고 있어?”

강재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

“내가 그때 분명히 보고서에 썼어. 이 부품은 3년 안에 전량 교체해야 한다고. 결론에 못 박았어.”

신우진이 수첩을 펼쳤다. 유성 매직으로 빠르게 적었다.

TH-1187 전량 교체 권고. 9년 전 결론.

“그 보고서. 원본은 폐기됐습니다만. 강 과장님께서 회의 자료를 별도 보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그걸…”

“금고가 봉쇄됐습니다. 박 팀장님의 사본을 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다른 경로가 필요합니다.”

강재호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료는 있다. 옛집 창고에 상자째 넣어뒀어.”

“열람할 수 있습니까.”

“몸이 안 좋아. 거동이 어렵네.”

신우진이 잠시 멈췄다.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집이 전라도야. 군산. 쉽지 않을 거다.”

“내일이라도 가능합니다.”

강재호의 침묵. TV도 꺼졌다.

“그 보고서. 나 때문에 묻힌 거나 다름없었어.”

“무슨 뜻입니까.”

“당시 구매처 담당자가 검토 반려를 시켰거든. 내가 더 강하게 밀었어야 했는데.”

“그 담당자. 윤태호였습니까.”

강재호가 숨을 멈췄다.

“알고 있군.”

“예.”

“그 사람 지금 뭐 하는지 아나.”

“납품사 대표입니다. 같은 부품을 납품하고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내일 아침 9시. 대전역 맞이방에서 보지.”

“가능하십니까.”

“몇 시간은 버틸 수 있다.”

“감사합니다.”

“단.”

강재호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박중호는 데려오지 말게.”

“왜입니까.”

“그 양반은 내 얼굴 보면 또 괴로워할 거야. 9년 전에 이미 충분히 괴로워했어.”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서 멈췄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수첩에 강재호의 이름과 약속 시간을 적었다.

오른손 검지가 천천히 마지막 글자를 완성했다.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문자 한 통.

‘내일 아침 9시, 대전역 맞이방에서 잠깐 보겠네. 단, 박중호는 데려오지 마시게.’

신우진이 화면을 바라봤다. 표정이 굳었다.

수첩을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왼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문자를 저장했다.

창밖으로 정비고의 불빛이 깜빡였다.

무정차 통과2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