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30화
감사실 소회의실. 오전 9시 정각.
신우진이 문을 열었다. 왼손에 투명 파일 한 장. 오른손엔 커피 없는 빈 손.
이지원은 이미 테이블 위에 노트북과 인쇄물을 펼쳐놓고 있었다. 접근 권한 로그 출력본 세 묶음. 감사 문서 분류 체계표 한 장. 왼쪽 손목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신우진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파일을 테이블 중앙에 밀어 넣었다. A4 용지 네 장. 7년 전 선임 조사 노트에서 추출한 부품 코드와 날짜가 손글씨로 정리돼 있다.
이지원이 한 장을 집어 든다.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훑는다.
“2007년 11월 27일. TH-1187-04. 패킹 마모 기준 초과.”
“오른쪽이 같은 해 12월 3일자야.”
신우진의 검지가 두 번째 장을 가리켰다.
이지원이 출력물을 나란히 배치했다.
“구매처 대리 윤태호. 검토 반려. 기록 삭제 예상.”
신우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원이 왼쪽 메탈 시계 밴드를 한 번 만졌다. 노트북 화면을 돌려 신우진 쪽으로 향하게 했다.
“삭제된 검수 기록 목록입니다. 총 47건. 모두 B4 계열.”
화면에 부품 코드 열이 스크롤됐다. 신우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납품사가 전부 같아.”
“대영산업입니다.”
이지원이 출력본 맨 위 페이지를 집었다.
“첫 입고일은 2005년 3월. 부품 코드 접두사는 TH-1187로 시작합니다.”
신우진이 손글씨 목록과 화면을 번갈아 봤다. 왼손 집게손가락이 한 줄을 짚었다.
“이거다. TH-1187-04. 선임 노트에 나온 부품이랑 동일.”
이지원이 잠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삭제 기록 47건 중 31건이 TH-1187 계열입니다. 나머지 16건은 KD-2037.”
“같은 설계 계통이야. 패킹 구조랑 밀봉 방식이 동일.”
신우진이 파일에서 세 번째 종이를 꺼냈다.
“9년 전 보고서 결론. TH-1187 전량 교체 권고.”
이지원이 받아서 읽었다. 입술이 가볍게 다물렸다.
“KD-2037로 모델명만 바뀌어서 현재까지 납품 중입니다.”
“규격 불일치는 그대로지.”
신우진이 가슴 주머니에서 유성 매직을 꺼냈다. 삭제 기록 출력본 모서리에 짧게 메모했다. TH-1187 = KD-2037. 왼쪽 검지가 옅은 유압유 흉터를 따라 허공으로 떨어졌다.
이지원이 감사 문서 분류 체계표를 끌어당겼다.
“삭제 기록과 9년 전 보고서가 동일한 사양 번호를 공유한다는 건 확인됐습니다. 이제 연결 고리를 정리해야 합니다.”
프린터에서 새 출력물이 나왔다. 이지원이 집어서 신우진 앞에 놓았다.
“내부 접속자 명단입니다. 삭제 쿼리 전후 24시간 동안 서버에 접속한 계정 전부.”
신우진이 명단을 훑었다. 총 7개 계정. auditkdh, sysadmin, proc_mks…
“proc_mks는 어제 확인된 구매처 쪽 계정이지.”
“맞습니다. 삭제 3시간 전에 B4 검수 기록을 열람했어요.”
“나머지 여섯 중에 감사실 소속은 몇이야.”
“셋입니다.”
이지원이 세 개의 계정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한 명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 나머지는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신우진이 명단에서 고개를 들었다.
“알겠다.”
이지원이 감사 문서 분류 체계표를 손으로 밀어 옆에 놓으려다 멈췄다. 시선이 체계표 하단에 고정됐다.
문서 번호 체계 설명 란. ‘연도-일련번호’ 규칙.
왼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조용히 체계표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이 멈췄다.
QC-1998-031.
아버지가 제보했던 20년 전 부품 비리 사건의 문서 번호. 동일한 규칙. 연도-일련번호.
이지원이 조용히 개인 수첩을 꺼냈다. 표지가 닳은 가죽 수첩. 펜으로 한 줄을 적었다.
‘감사 문서 분류 체계 — 1998년과 현행 동일. PC-1998-042, QC-1998-031.’
펜을 내려놓았다.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다만 시계를 만지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느렸다.
신우진이 그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서 한 번 멈췄다가 천천히 내려갔다.
“삭제 기록 쪽에 더 연관된 문서 번호가 있습니까.”
이지원이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인하겠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다 다시 멈췄다.
“신 과장님. 이 체계표… 현재 감사실에서 사용 중인 분류 체계는 언제 제정된 겁니까.”
신우진이 잠시 생각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였어. 최소 15년 이상.”
“15년.”
이지원이 그 숫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수첩을 접어서 왼쪽 서류 아래에 놓았다. 왼손이 다시 시계 밴드를 쓸었다.
신우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삭제 기록 목록과 9년 전 보고서 요약본을 나란히 정렬했다. 왼손 검지가 TH-1187에서 시작해 KD-2037까지 선을 그었다.
“연결 고리는 확보됐습니다. 부품 코드, 납품사, 사양 번호.”
이지원이 다시 전문적 어조로 돌아왔다.
“이걸로 삭제된 기록과 9년 전 보고서가 동일한 부품 계열을 겨냥하고 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됐습니다.”
“한 회사가 같은 설계 결함을 9년 동안 다른 모델명으로 반복 납품한 거야.”
“거기에 시험 성적서 조작 패턴까지. 10년 이상의 관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우진이 유성 매직 뚜껑을 닫았다.
“이제 필요한 건 원본 보고서와 시험 성적서 원본 대조야. 강재호 전 과장님 만나고 오겠습니다.”
일어서면서 파일을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이지원이 수첩을 손에 집어넣고 노트북을 덮었다.
“몇 시 출발입니까.”
“지금 바로. 대전역까지 KTX 타면 한 시간 안짝.”
“강 과장님 건강 상태는요.”
“몇 시간은 버틸 수 있다고 했어.”
신우진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지원이 따라 일어섰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 문서 분류 체계 쪽도 추가로 확인할 게 있습니다.”
신우진이 문 손잡이에서 멈췄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체계. 언제든 확인해.”
문이 열리고 닫혔다.
이지원은 잠시 서서 닫힌 문을 바라봤다. 다시 자리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아까 적은 문서 번호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1998-2024. 동일 번호 체계 유지 중.’
대전차량기지 노조 회의실. 오후 3시.
탁자 위에 일용품 지급 대장과 검수 일지 사본이 쌓여 있었다. 한경숙이 팔을 걷어붙인 채로 상석에 섰다. 긴 회의 탁자 양쪽으로 간부 일곱 명이 앉아 담배 연기 없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경숙이 탁자를 짚었다.
“법무팀이 금고 개봉을 5영업일 밀었어. 구매처는 청문회로 신우진을 묶었고.”
정비 1검수팀장 박상호가 턱을 만졌다.
“신우진 혼자 감당하겠다는 겁니까.”
“아니. 감당하다 박살날 거야.”
한경숙이 수첩을 펼쳤다. 페이지 귀퉁이에 박중호가 전달한 9년 전 보고서 요지가 적혀 있었다. TH-1187 패킹 변형. 전량 교체 권고. 구매처 반려.
“9년 전, 7년 전, 작년. 같은 부품 계열에서 세 번 보고가 나왔고 세 번 다 묻혔어.”
“확실합니까.”
“박중호 검수팀장이 직접 확인했어. 강재호 전 과장이 사본을 보관 중이고.”
간부들 사이로 낮은 탄식이 엇갈렸다.
“열람할 방법은 있습니까.”
“신우진이 내일 대전역에서 강 전 과장 만나기로 했어.”
정비 3검수팀장 최덕수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뭘 더 할 수 있습니까.”
한경숙이 수첩을 덮었다.
“검수를 거부한다.”
탁자 위의 시선이 일제히 멈췄다.
“검수원들이 B4 계열 부품 점검을 중단하는 거야.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법적 근거는—”
“산업안전보건법 제52조. 급박한 위험이 있을 경우 작업 중지권을 행사할 수 있어.”
박상호가 팔짱을 풀었다.
“징계 대상이 됩니다.”
“개별 징계를 노린 거라면 이쪽도 개인이 아니어야 해. 집단으로 간다.”
최덕수가 중얼거렸다.
“구체적인 실행일은.”
“오늘 결정해. 3일 안에 준비 들어간다.”
한경숙이 노조 간부 명단을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명단 오른쪽에 ‘집단 검수 거부 제안서 초안’이 클립으로 고정돼 있었다.
“제안 안건으로 상정한다. 찬반 묻기 전에 현장 상황부터 확인하자.”
박상호가 발언을 요청했다.
“지난주 B4 계열 검수에서 패킹 표면 균열 3건 발견됐습니다. 정비 일지엔 기록됐는데, 구매처 회신은 ‘감사 대상 아님’이었어.”
한경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 검수팀장.”
최덕수가 메모를 들춰봤다.
“KD-2037 검수할 때마다 내열 패킹 재질이 육안으로 구분 안 된다고 보고했어. 재질 코드 불일치 여부는 시험 성적서 없이 결론 못 내리고.”
“그 성적서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농후해.”
탁자 위로 서류가 한 장씩 돌았다. 9년 전 보고서 요약, 법무팀 금고 지연 공문 사본, 구매처가 신우진에게 보낸 징계 청문회 통보서 사본.
교육팀장 김영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검수 거부가 장기화되면 열차 운행 차질 생기지 않습니까.”
“최대한 짧게 간다. 목표는 검수 거부 자체가 아냐.”
한경숙이 제안서 초안을 들어 올렸다.
“목표는 구매처가 공인 시험 기관에 재검증을 의뢰하게 만드는 거야. 우리 요구는 딱 하나. B4 계열 전 부품에 대한 외부 기관 시험.”
김영자가 고개를 주억였다.
“요구가 구체적이면 조합원들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상호가 팔을 접으며 말했다.
“찬성입니다.”
최덕수가 메모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찬성.”
김영자가 손을 들었다. 간부들이 차례로 손을 올렸다. 일곱 명 전원.
한경숙이 명단에 ‘전원 찬성’이라고 적었다. 펜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실행일은 3일 후. 그때까지 각 팀은 검수 거부 대상 부품 목록과 조합원 서명을 취합해.”
탁자 위의 서류를 정리하며 덧붙였다.
“법적 보호는 노조 법률 자문팀에서 받는다. 개별 징계 시도 들어오면 즉시 보고하고.”
박상호가 의자를 밀며 일어나자 다른 간부들도 기립했다. 한경숙이 제안서를 들어 유리창 너머 정비고를 등졌다.
철도공사 본사 감사실 복도.
신우진이 휴대폰을 내렸다. 이지원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흰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접혀 있었다.
“문자 왔습니다. 노조에서 검수 거부 가결됐다고.”
이지원이 휴대폰 화면을 읽었다. 메시지 발신은 한경숙. ‘실행일 3일 후. B4 계열 전 부품 외부 시험 요구. 조합원 서명 취합 중.’
“감사실에는 공식 통보가 오기 전이군요.”
“곧 올 겁니다.”
신우진이 복도 창밖을 바라봤다. 유도로 너머로 B4 계열 차량이 한 대 진입하고 있었다.
“부품 계열 연결성 정리한 것. 감사실 기록으로 남깁니까.”
이지원이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작성 중입니다. 9년 전 보고서, 7년 전 노트, 작년 검수 기록이 동일 계열을 가리킨다는 점을 중심으로.”
“노조의 검수 거부도 기록에 포함됩니까.”
“공식 통보 접수 시점에 추가하겠습니다.”
잠시 침묵. 신우진이 허공에 오른손 검지를 대고 천천히 숫자를 그렸다. 3. 3일.
이지원이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압력이 한 방향으로 모이고 있군요.”
“예.”
신우진이 휴대폰을 왼쪽 가슴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휴대폰 모서리가 선임의 조사 노트 옆에 닿아 멈췄다. 복도 끝에서 감사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