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31화
오전 9시 12분. 감사실 책상.
이지원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액정 모니터 왼쪽 하단에 메일 알림이 떠 있었다. 발신자는 익명의 웹메일 주소. 제목은 ‘대한정밀시험성적서재발급_목록’.
첨부 파일 하나. PDF도 아니고 스캔 이미지 세 장이었다. 이지원이 미리보기를 열었다. 첫 장 상단에 본사 품질관리팀 내부 결재 번호가 찍혀 있었다.
지난 3년간의 재발급 신청 목록. 총 7건.
이지원이 이미지를 확대했다. 각 행에는 신청일, 부품 코드, 재발급 사유, 결재자 직인이 순서대로 기재돼 있었다. 재발급 사유란은 전부 ‘분실’이었다. 7건 전부.
마우스를 놓고 손목시계를 봤다. 9시 15분.
정보원 라인의 익명 채널은 어제 오후 재가동했다. 함정 문서 투입 이후 첫 접촉. 이지원이 요청한 건 ‘대한정밀과 대영산업의 시험 성적서 발행 패턴 비교 자료’였다. 돌아온 건 대한정밀 쪽 재발급 이력뿐.
“대영산업은 없고.”
혼잣말이 작게 책상 위에 떨어졌다. 이지원이 품질관리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감사실 계정으로 공식 성적서 등록 대장을 열었다.
첫 번째 재발급 건부터 대조했다. 2021년 6월. 부품 코드 KD-2037-081. 신청일 6월 14일, 등록일 6월 14일. 일치.
두 번째. 2021년 9월. KD-2037-092. 신청일 9월 8일, 등록일 9월 8일. 일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같은 패턴이었다. 재발급 신청일과 공식 등록일이 동일했다. 손실 보고 후 당일 재발급 처리된 셈이다. 절차상으로는 문제없는 속도.
여섯 번째 줄에서 이지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2022년 3월. 부품 코드 KD-2037-114.
이지원이 품질관리팀 등록 대장을 같은 부품 코드로 검색했다. 공식 등록일은 3월 25일. 이미지에 찍힌 재발급 신청일은 3월 14일.
열하루 앞서 있었다.
이지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온도가 혀에 닿았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재발급 신청은 등록된 성적서가 있어야 가능하다. 원본을 잃어버렸을 때 재발급을 요청하는 구조다. 그런데 신청일이 등록일보다 11일 빠르면, 원본이 등록되기도 전에 재발급을 신청한 셈이 된다.
절차상 불가능한 순서였다.
이지원이 스캔 이미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결재란에는 품질관리팀 과장 직인이 선명했다. 날짜는 3월 14일. 위조된 흔적은 없었다.
이미지의 결재 번호를 공식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했다. 해당 번호의 전자 결재 문서가 화면에 떴다. 결재선에 오른 이름이 표시됐다. 품질관리팀 과장, 검수팀장, 그리고—
이지원이 숨을 들이쉬었다.
최종 승인란에 배상호의 사번이 찍혀 있었다.
감사실 소속 주무관 배상호. 어제 함정 문서를 배포할 때 참조에 넣었던 바로 그 이름.
이지원이 손목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메탈 밴드가 목재 책상에 닿아 짧은 소리를 냈다.
정보원이 보낸 자료에 감사실 내부 인물이 결재자로 등장한다. 그것도 2022년 3월, 공식 등록보다 11일 앞선 재발급 건에서.
정보원의 신뢰성. 아니면 배상호의 개입 경로. 둘 중 하나는 균열이 나 있었다.
이지원이 이미지 세 장을 폴더에 저장했다. 파일명은 ‘202203reissuegap’. 품질관리팀 등록 대장 화면도 캡처해서 같은 폴더에 넣었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려다 잔을 내려놓았다. 차가웠다.
정보원 라인은 어제까지 유일한 비공식 채널이었다. 이 불일치가 단순 오류인지, 의도된 정보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의 설계인지— 아직 판단할 근거는 부족했다.
이지원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신우진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화면을 켜고 잠금을 해제한 상태로 멈췄다.
공장 방문은 오늘 중이다. 교차 검증할 데이터가 더 필요했다.
대전차량기지 검수장. 오전 10시 45분.
신우진이 B4 계열 대차 프레임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패킹 홈을 따라 더듬었다. 표면은 매끄러웠다. 육안으로는 이상 없음.
뒤에서 안전화 소리. 발걸음이 빨랐다. 최명식이었다.
“선배님.”
숨이 약간 가빴다. 신우진이 일어서며 손에 묻은 유압유를 걸레로 닦았다.
“뭔데.”
최명식이 주위를 한 번 훑었다. 검수장 안은 점심 교대 시간이 다가와 인원이 절반쯤 빠져 있었다. 유도로 쪽에서 전동 공구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어젯밤에 길드원한테 연락 왔었거든요. 그, 지난번에 납품사 내부 얘기 전해줬던 분.”
“대한정밀.”
“예, 거기 품질관리팀인데.”
최명식이 목소리를 낮췄다.
“작년 11월 말에 ISO 심사 있었대요. 그 전에 시험 장비 교정 기록을 전부 다시 썼다는 거예요.”
신우진이 걸레를 접었다.
“소급 작성.”
“예. 심사 기준에 못 미치는 장비가 몇 대 있었대요. 교정 주기도 지났고. 근데 기록상으로는 전부 정상으로 맞춰서 통과했다고.”
“언제 들었지.”
“어젯밤 11시쯤이요. 게임 끝나고 음성 채팅방에 잠깐 들어왔는데, 요즘 검수 거부 얘기가 뉴스에 나오니까 걱정된다고. 자기네 회사는 예전부터 그런 식이었다면서.”
최명식의 오른손이 뒷목으로 올라갔다.
“선배님. 근데 이 사람 진짜 무서워해요. 들키면 자기 팀 전부 감사 대상이라고.”
“이름은 빼고 쓴다.”
“그것만으로도… 패턴이 노출될까 봐.”
신우진이 유성 매직을 가슴 주머니에서 뽑았다. 왼쪽 손바닥에 ‘11월·ISO·교정 기록 소급’이라고 적었다.
“장비 종류는.”
“인장 시험기랑, 경도 시험기요. 재질 시험에 쓰는 장비들이래요.”
“몇 대나.”
“그건 모르겠대요. 자기 부서 건만 알려줬어요.”
신우진이 매직을 주머니에 도로 꽂았다.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작년 11월. 대영산업의 자체 시험 성적서 제출 조건이 계약에 포함된 시점과 두 달 차이였다.
“필요하면 정식 조사 경로로 확인한다. 정보원은 거기까지만.”
“예.”
최명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얼굴이었다.
“선배님, 근데 이거 진짜 연결되네요. 시험 장비가 조작됐으면, 성적서 자체가…”
“증거가 필요하다.”
신우진이 말을 끊었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가로획을 그었다.
“소문은 소문이다. 교정 기관 확인이 먼저.”
검수장 입구 쪽에서 정비반 인원들이 점심 식사 방향으로 걸어가는 소리. 신우진이 손바닥의 메모를 수첩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철도공사 본사 인사기록 열람실. 오후 1시 20분.
이지원이 단말기 앞에 앉아 있었다. 열람실은 좁았다. 창 없는 방에 모니터 네 대뿐. 다른 이용자는 없었다.
화면에는 2022년 3월 발행된 시험 성적서 재발급 건의 전자 결재 라인이 펼쳐져 있었다. 이지원이 스크롤을 천천히 올렸다.
기안자: 구매처 주무관 장호진. 검토자: 구매처 과장 민경수.
승인자 세 명. 첫째는 구매처 본부장 도장. 둘째는—
이지원의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둘째 승인란. 감사실 배석 확인. 서명: 배상호.
현재 감사실에 근무 중인 배상호였다. 지난주 감사실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온건한 말투에 인사성 밝은 40대 중반. 윤태호 건에는 발언을 삼가던 사람.
이지원이 개인 수첩을 꺼냈다. 인사기록 열람실의 형광등이 낮게 윙윙거렸다. 페이지를 넘겨 빈 칸을 찾았다.
‘배상호 – 2022년 3월 성적서 재발급 건 승인. 감사실 배석 확인자.’
오른쪽 여백에 작은 별표를 그리고 ‘재검증 대상’이라고 적었다.
화면을 다시 봤다. 셋째 승인란은 빈칸이었다. 법무팀 검토 보류 상태로 종결. 재발급 건은 그 상태로 통과된 듯했다.
이지원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시 28분. 열람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단말기가 로그아웃 화면으로 전환됐다. 수첩을 메신저백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배상호라는 이름이 감사실 내부 정보 누설 가능성과 처음으로 교차한 순간이었다.
일어서서 열람실 문을 열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대전차량기지 노조 회의실. 오후 3시 10분.
탁자 위에 서명부가 펼쳐져 있었다. 한경숙이 팔을 걷어붙인 채 명단을 훑었다. 서른여섯 번째 칸까지 이름이 채워져 있었다.
“최소 기준은 스물일곱이야. 이미 넘겼어.”
박상호가 명단에서 고개를 들었다.
“반대파는요.”
“다섯.”
한경숙이 옆에 놓인 별도 명단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징계 불안이야. 청문회 보면서 겁먹었어.”
“이해한다고 전해. 압박 안 한다는 조건으로 명단은 보관한다.”
박상호가 끄덕이고 일어섰다. 한경숙이 서명부를 접어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을 꺼내 신우진 번호를 찾았다.
‘서명 완료. 최소 기준 초과. 반대 5명 별도 관리. 공식 통보 곧 발송.’
전송. 화면이 전송 완료로 바뀌는 데 2초 걸렸다.
한경숙이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고 법률 자문팀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두 번 울렸다.
“노조입니다. 서명부 확보했어요. 산업안전보건법 52조 적용 검토 다시 한 번 해주시고.”
상대가 답변하는 동안 그녀는 서류를 정리했다. 반대파 명단은 별도 파일에 끼워 서랍에 넣었다.
통화를 끊고 회의실을 나서며 한 번 더 휴대폰을 확인했다. 신우진에게서 답신이 와 있었다.
‘확인.’
대전차량기지 복도. 오후 4시 25분.
신우진이 한경숙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서른여섯 명. 숫자를 기억하며 휴대폰을 왼손으로 쥔 채 걷다가 멈췄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2, 3을 그렸다. 2022년 3월.
최명식에게서 받은 메모를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꺼냈다. 시험 장비 교정 기록 소급. 대한정밀. 2022년 3월.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세 번의 신호음 뒤 받았다.
“신우진입니다.”
“네, 이지원입니다.”
“최명식이 확보한 소문 하나 전달합니다.” 신우진이 메모를 펼쳤다. “대한정밀 내부 제보. 시험 장비 교정 기록을 소급해서 입력했다는 내용입니다. 시점은 2022년 3월.”
수화기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2022년 3월. 날짜를 특정할 수 있습니까.”
“제보자는 교정 주기와 일치하는 달이라고만 했습니다.”
이지원이 잠시 말을 멈췄다. 서류가 탁자에 닿는 소리.
“제가 오늘 확인한 정보원 제공 내역 중에 2022년 3월 건이 두 개 있습니다. 인장 날짜가 발행일보다 먼저 찍힌 시험 성적서.”
“같은 달입니까.”
“3월 12일과 3월 28일. 둘 다 B4 계열 부품입니다.”
신우진이 복도 창밖을 바라봤다. 유도로에 차량 한 대가 서 있었다. 검수원 두 명이 하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교정 기록 소급과 성적서 인장 역순. 둘 다 2022년 3월이면.”
“우연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교정 기록을 먼저 조작한 후 그 장비로 시험한 것처럼 성적서를 발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한정밀 측 제보자 말이.” 신우진이 메모의 마지막 줄을 읽었다. “2022년 3월 이후로는 장비 교정 일지 출력물을 폐기하지 않고 따로 보관한다고 했습니다. 내부 감사 우려 때문에.”
이지원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내부 감사 우려는 자체 조작을 인지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현장 감사로 교정 일지 원본을 확보할 수 있다면.”
“시험 성적서 조작의 물적 증거가 됩니다.”
“둘이 아니라 시리즈로 존재할 겁니다. 2022년 3월을 기점으로.”
신우진이 메모를 접어 다시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이 선임의 노트 모서리에 닿았다.
“정보원 제공 불일치 건과 교정 기록 소급 건을 하나로 묶어서 보고서 초안을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시험 성적서 발행 목록과 교정 주기를 대조해볼게요. 2022년 전후로 상시 조작이 있었다면 패턴이 나올 겁니다.”
“확인되면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신우진은 복도 벽에 기대어 유도로 너머를 봤다. 검수원 한 명이 차량 하부에서 나와 클립보드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철도공사 감사실 복도. 오후 6시 50분.
이지원이 통화 기록을 닫고 노트를 펼쳤다. 왼쪽 페이지에 배상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정보원과 연결?’이라고 썼다.
고개를 들고 복도 끝을 바라봤다. 사무실 대부분의 불이 꺼져 있었다. 배상호의 자리만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이지원이 자리로 돌아와 이메일을 열었다. 수신자에 배상호의 사내 주소를 입력했다.
제목: 협조 감사 자료 요청 – 2022년 시험 성적서 발행 목록
본문은 두 줄이었다. 정보원의 존재나 불일치 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단순한 자료 협조 요청.
전송 후 노트를 닫았다. 모니터 전원이 꺼졌다.
이지원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감사실 유리문이 닫히고 복도 끝까지 걸어가서 스위치를 내렸다. 배상호의 자리 불까지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