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32화
다음 날 오전 10시. 대전 산업단지 3블록, 대영산업 정문.
신우진이 경비실 유리창 너머로 방문증을 보였다. 공식 업무 협조 공문 번호가 찍힌 서류였다. 경비원이 전화기를 들고 사무실로 연락하는 동안, 신우진은 정문 옆 현판을 훑었다. 대영정밀기계 사명 아래에 ‘TH-1187 대응 모델 KD-2037 생산 중’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경비원이 수화기를 내렸다. “공장장님께서 시험실로 바로 오시랍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증을 목에 걸었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 유성 매직이 꽂힌 채였다.
공장 건물 1층 로비. 회색 콘크리트 바닥에 지게차 타이어 자국이 선명했다. 신우진이 안내판을 확인하는 사이, 오른쪽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윤태호였다.
“신 주임님.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짙은 남색 수트에 옅은 회색 타이. 왼쪽 칼라의 회사 로고 배지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은 깜빡이지 않았다.
“공장 견학 오셨습니까.”
“시험 설비 점검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윤태호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뒤에서 안전화를 신은 50대 남자가 걸어왔다. 작업복 가슴에 ‘공장장 배상민’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배 공장장님이 시험실까지 모실 겁니다.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신우진이 배상민을 바라봤다.
“공장장님 허락에 달렸습니다.”
배상민이 잠시 윤태호를 쳐다봤다.
“대표님께서 직접 오시는 건 처음이십니다만.”
“요즘 품질 관리가 중요하니까요.”
윤태호의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매끄럽게 울렸다. 배상민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앞장섰다.
시험실은 2층 남쪽 끝에 있었다. 철제 문 앞에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빨간 표지판. 배상민이 문을 열었다. 내부는 소형 격납고 정도 크기였다. 인장 시험기와 경도 시험기가 중앙에 나란히 서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충격 시험기가, 왼쪽 벽 근처에는 시험편 절단용 밴드쏘가 놓여 있었다.
신우진이 왼쪽 벽의 선반으로 걸어갔다. 시험 장비 가동 로그 출력물이 연도별로 정리된 바인더 여섯 권이 꽂혀 있었다.
배상민이 바인더를 가리켰다.
“작년부터 분기별로 편철했습니다. 보실 겁니까.”
“먼저 가동 로그를 확인하겠습니다.”
신우진이 작년도 바인더를 뽑아 책상 위에 펼쳤다. 시험실 중앙에 놓인 철제 책상이었다. 윤태호는 입구 쪽에 서서 팔짱을 꼈다.
페이지를 넘기자 분기별 시험 일자가 차례로 나타났다. 인장 시험기의 가동일은 3월 7일, 6월 9일, 9월 12일, 12월 5일. 경도 시험기도 같은 날짜로 가동 기록이 남아 있었다.
신우진이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가동일을 옮겨 적었다. 그런 다음 배상민을 돌아봤다.
“이 설비로 시험한 부품의 성적서 발행 목록도 요청합니다.”
배상민이 시험실 구석의 파일 캐비닛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건넸다. 품질관리팀 내부 결재 번호가 붙은 성적서 발행 목록이었다.
신우진이 한 장씩 넘기며 가동일과 발행일을 교차 대조했다. 첫 번째 건. 가동 3월 7일, 성적서 발행 3월 27일. 두 번째 건. 가동 6월 9일, 발행 6월 30일.
손끝이 멈췄다마다 20일 전후의 간격. 세 번째도 같았다. 네 번째도.
총 여섯 건이 일관된 패턴을 보였다. 시험 장비가 실제로 가동된 날짜보다 성적서 발행일이 2주에서 3주 뒤로 잡혀 있었다.
신우진이 수첩에 ‘가동-발행 평균 간격 20.3일’이라고 적었다. 매직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서 멈췄다.
“행정 처리 지연이군요.”
윤태호의 목소리였다. 팔짱을 푼 채 한 걸음 다가서 있었다. 시선이 신우진의 수첩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품질관리팀에서 데이터 취합하고 내부 검토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아시겠지만 이쪽 업계에선 드문 일이 아니죠.”
신우진이 수첩을 닫지 않았다. 시선을 들어 윤태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행정 처리에 20일이면 시험 데이터 검증은 언제 합니까.”
“데이터는 시험 직후에 나옵니다. 공식 문서화 과정에서 생기는 시차일 뿐이죠.”
배상민이 둘 사이를 번갈아 보며 한 발 물러섰다. 윤태호의 왼손 약지에서 금색 인장 반지가 형광등 빛에 반짝였다.
“혹시 시험 성적서의 품질관리팀 내부 결재 일자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가동일과 거의 일치할 겁니다.”
신우진이 서류철을 다시 펼쳤다. 각 성적서 하단의 결재란을 훑었다. 품질관리팀장의 서명 옆에 찍힌 날짜는 가동일과 하루 이틀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시험 데이터 자체는 가동 직후 확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데이터가 공식 성적서에 기재되기까지 20일이 걸렸다는 점이었다.
“확인했습니다.”
신우진이 수첩을 접어 왼쪽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서류철을 배상민에게 돌려주면서 가동 로그 바인더도 제자리에 꽂았다.
“시험 장비 교정 기록도 확인 가능합니까.”
배상민이 주저했다. 입술을 달싹이다 시선이 윤태호 쪽으로 향했다.
윤태호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신우진과 두 걸음 거리였다.
“교정은 외부 기관에서 합니다. 기록은 품질관리팀에서 보관하고요. 오늘 열람하시려면 준비 시간이 필요할 텐데요.”
“그럼 다음 방문 때 요청하겠습니다.”
신우진이 배상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시험실을 나왔다. 윤태호가 나란히 걸으며 복도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번갈아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렸다.
“차량기지 검수 일정이 빠듯할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오히려 감사하네요.”
윤태호의 말투가 여전히 매끄러웠다. 하지만 시선이 복도 끝이 아니라 신우진의 옆얼굴에 멈춰 있었다.
“성적서 관련해서 추가로 필요하신 게 있으면 공장장 말고 저한테 직접 연락 주십시오. 아무래도 현장은 현장이니까.”
신우진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로비 방향으로 걸으며 짧게 답했다.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로비 출입문 앞에서 윤태호가 멈춰 섰다. 신우진은 그대로 정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등 뒤로 윤태호가 팔짱을 다시 끼는 옷소리만 들렸다.
공장 정문 밖. 신우진이 방문증을 경비실에 반납하고 포켓에서 수첩을 꺼냈다.
‘가동일-발행일 간격 20일. 결재일은 가동일과 일치. 공식 성적서 발행만 지연.’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유압유 흉터를 한 번 문질렀다. 시험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20일 뒤에야 납품용 성적서가 만들어진다. 그 사이 성적서 내용이 원본 데이터와 같은지는 종이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수첩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점심 무렵. 산업단지 도로 너머로 화물차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대전차량기지 검수실 앞 복도. 오후 2시 반.
신우진이 공장 점검표를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시험 설비 작동 로그 사진은 휴대폰에 저장돼 있었다. 검수실 유도로 쪽에서 공구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복도 끝에서 안전화 소리. 빠르고 가벼운 걸음. 최명식이었다.
“선배님.”
숨이 가빴다. 이마에 얕은 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최명식이 복도를 한 번 확인했다. 인적은 없었다. 검수원 한 명이 저쪽 유도로를 건너고 있었지만 거리가 멀었다.
“어제 그 길드원… 대한정밀 품질관리팀 있잖아요.”
“들었다.”
“밤에 또 연락 왔었거든요. 원래는 그냥 소문만 흘리던 분인데.”
최명식이 목소리를 낮췄다. 손이 뒷목으로 올라갔다.
“이번엔 구체적인 숫자까지 알려줬어요.”
신우진이 기다렸다.
“시험 설비 가동하고 나서 성적서 발급까지 보통 이 주에서 삼 주 걸린대요. 근데 자기네는 시험 안 돌리고 성적서만 날짜 맞춰서 뽑아준 적이 여러 번이라고.”
“언제부터.”
“길드원 말로는 자기가 입사한 2021년부터 이미 그렇게 했다네요. 부서 전체가 아는 분위기였대요.”
신우진은 공장에서 찍은 가동 로그 사진을 떠올렸다. 시험기 전원 ON 날짜와 성적서 발행일 사이 간격. 이 주가 아니라 하루.
“선배님.”
최명식의 목소리가 더 빨라졌다.
“이거… 저 길드원은 그냥 게임하다가 친해진 사람이거든요. 제가 무슨 감사 관련된 사람도 아니고. 근데 이분이 어제 ‘이 얘기 너무 많이 한 것 같다’고.”
“겁먹었나.”
“예. 자기도 이제 말 안 하겠대요. 저도 이쯤에서…”
“명식아.”
신우진이 끊었다. 짧았다.
최명식의 손이 뒷목에서 떨어졌다.
“네가 전해준 그 소문, 공장에서 직접 확인했다. 시험 설비 가동 로그랑 성적서 발행 날짜가 안 맞아.”
최명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럼 진짜로…”
“진짜다. 네 길드원 말은 정확했어.”
한 박자. 유도로 저편에서 견인차가 경적을 울렸다.
“이건 단순 소문이 아니고 증거야. 감사팀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다른 경로로 포착 중이고.”
신우진이 한 걸음 가까이 섰다.
“네 길드원한테는 더 묻지 마라. 대신 그 사람이 먼저 연락해오면 거절하지 말고 들어만 줘. 내용은 나한테만.”
“그, 그게… 괜찮을까요. 제가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갈 필요 없어. 네가 할 일은 검수다. 정보는 나한테 넘기고.”
최명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이 남아 있었지만 호흡은 조금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정말 조심하세요, 선배님.”
“너도.”
최명식이 뒤돌아 유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신우진은 잠시 서서 복도 끝까지 시선을 보냈다.
소문이 공장 로그와 일치한다. 시험 안 하고 성적서 발급. 그것도 2021년부터.
대전차량기지 검수원 사무실. 오후 4시.
신우진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왼쪽 페이지에는 공장에서 기록한 가동 로그 사진의 시간차 요약이 적혀 있었다. 오른쪽 페이지 상단에 새 줄을 긋고 최명식의 소문을 추가했다.
길드원 제보: 시험 미실시 후 성적서 사후 발급 (2021년~) 가동 로그-발행일 간격: 하루 (정상 소요일 이주~삼주)
그 아래에 이지원이 전날 공유한 정보원 불일치 목록의 요점을 옮겼다.
정보원: 2022년 3월 재발급 건 11일 불일치 결재선: 배상호
세 줄이 한 페이지 안에서 만났다. 납품사 내부 소문, 현장 점검 로그, 정보원 제보. 세 경로가 같은 결론을 가리켰다.
신우진이 서랍에서 이지원과 공유하는 암호화 채널의 단말을 꺼냈다. 감사실 내부 감사 시스템 전용 회선. 메신저가 아닌, 감사팀이 별도 관리하는 문서 전송 경로였다.
첨부 파일을 선택했다. 공장 시험 설비 가동 로그 사진 세 장. 시간차 요약 메모 스캔본. 최명식의 구두 제보를 요약한 텍스트 파일 — 길드원의 신원은 기재하지 않았다.
본문에 세 줄을 썼다.
공장 로그와 소문 교차 확인 완료. 2021년부터 시험 미실시 후 성적서 사후 발급. 정보원 불일치 건과 동일한 시간대. 배상호 결재 건 별도 확인 필요.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 멈췄다.
윤태호가 공장에서 보인 반응을 떠올렸다. 경계. 신우진이 시험실에 들어서자마자 따라 들어왔다. 시험 설비 앞에서는 대화를 유도하려 했다. 점검 시간보다 질문 시간이 길었다.
신우진은 전송을 눌렀다.
모니터에 진행 막대가 떴다. 암호화 패킷이 감사실 서버로 올라갔다. 완료 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