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34화
이지원이 수화기를 들었다.
“감사실입니다.”
한 박자 늦게 상대가 말을 꺼냈다. 여자 목소리. 낮고, 약간 갈라진 톤이었다.
“자료는 확인하셨습니까.”
이지원이 손가락으로 출력물 모서리를 짚었다. 정보원 라인 접근 기록. 방금 전까지 분석하던 파일이었다.
“확인 중입니다.”
“추가로 보낼 게 있습니다.”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배경에서 차량 통행음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대한정밀 2022년 3월 건 말입니다. 그때 시험 장비 교정 기록이 소급 작성됐다는 건 이미 아실 거고.”
이지원이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말을 이었다.
“교정 전에 측정한 시험 데이터는 폐기됐어야 하는데, 품질관리팀 과장이 개인 하드에 보관 중입니다. 그 과장, 배상호라고.”
이지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배상호. 2022년 3월 성적서 재발급 건의 결재선에 있던 이름. 감사실 배석 확인자로도 서명한 인물.
“그걸 왜 지금.”
“배 과장이 요즘 많이 불안해 보여서요. 누군가 감사 쪽에 자료 넘겼다는 소문이 내부에 돌고 있습니다.”
“누구한테요.”
“모릅니다. 그냥 소문이에요. 알아서 조심하시라는 뜻으로 전한 겁니다.”
전화가 끊겼다.
이지원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메모지에 빠르게 적었다. 배상호, 개인 하드에 교정 전 시험 데이터 보관 중. 내부에 감사 자료 유출 소문 확산.
그녀가 정보원 제보 로그를 다시 열었다. 2022년 3월 건을 처음 제보한 일자.
3월 4일.
재발급 신청일과 정확히 일치했다. 등록일 3월 15일보다 11일 빠른 날짜.
이 정보원은 내부 결재가 완료되기도 전에 재발급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지원이 서랍에서 정보원 라인 접속 기록 파일을 꺼냈다. 직전에 분석한 시간대별 로그.
오전 2시 14분 로그인. B4 계열 검수 기록 인덱스 조회. 대영산업 납품 이력 조회.
삭제 실행 3시간 전이었다.
그녀가 로그 파일의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6개월간 접속 기록.
대영산업 관련 문서 열람 — 0건. 대한정밀, 중앙부품, 삼일기공 — 각각 12건 이상.
그리고 2년간 제보 57건.
대영산업 제보 — 0건.
이지원이 펜을 집었다. 아까 적던 리스트 아래에 추가했다.
5. 정보원, 3월 4일 제보 — 재발급 건 등록 11일 전에 인지. 6. ‘배상호’ 직접 지목 — 내부 결재선 정보 필요. 일반 사원이 알 수 없는 범위.
그녀가 출력물을 파일에 끼우며 표지를 다시 썼다.
‘정보원 라인 신뢰성 검토 — 1차 분석 완료. 추가 검증 필요.’
신우진이 검수실 책상 앞에 앉았다.
벽시계는 오후 2시 30분. 복도 건너편에서 전동 공구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왼쪽 포켓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모니터 옆에 붙였다. 분기별 시험 일정 조정.
윤태호가 호텔 라운지에서 흘린 말이었다. 신우진이 노트를 펼쳤다. 왼쪽 페이지에 공장 방문 당시 기록한 가동 로그 요약이 있었다.
시험 가동일-성적서 발행일 평균 20.3일 차이. 시험 미실시 후 사후 발급 의혹.
오른쪽 페이지에 새로 줄을 그었다.
윤태호 주장: 분기별 시험 일정.
신우진이 개인 노트의 뒤쪽 페이지를 넘겼다. 지난 3년간 계약 갱신 일정을 정리한 표가 있었다. 구매처 공식 공지와 검수실 내부 기록을 대조해서 만든 자료였다.
계약 갱신일: - 2022년 4월 7일. - 2023년 4월 12일. - 2024년 4월 3일.
그 아래에 정보원이 제공한 시험 성적서 재발급 날짜들을 옮겨 적었다. 이지원과 통화하면서 받은 내용이었다.
대한정밀 재발급 목록: - 2022년 3월 4일(신청) / 3월 15일(등록) - 2023년 3월 28일 - 2024년 3월 19일
신우진이 두 목록을 나란히 놓았다.
계약 갱신 직전에 시험 성적서 재발급이 집중되어 있었다.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 간격은 각각 11일, 15일, 15일.
분기별 시험 일정은 없었다.
실제 패턴은 연 1회. 그것도 계약 갱신 시즌에 몰려 있었다.
신우진이 노트에 적었다.
시험 주기: 연 1회 집중 (계약 갱신 전 2주 이내). 분기별 시험 — 허구. 윤태호 발언 자체가 조작의 증거.
그가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 두 번 만에 연결됐다.
“이지원입니다.”
“시험 일정 확인했다.”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로 서류 넘기는 소리.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윤태호가 말한 분기별 시험. 실제론 연 1회다. 그것도 계약 갱신 직전에 몰려 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약간 빨라졌다.
“방금 저도 확인한 게 있습니다. 2022년 3월 재발급 건. 신청일 3월 4일, 등록일 3월 15일. 그리고 계약 갱신은 4월 7일.”
“딱 11일 차이.”
“그렇습니다. 2023년, 2024년도 거의 같아요.”
신우진이 노트를 보며 말했다.
“공장 가동 로그에는 시험 가동과 성적서 발행 사이가 평균 20일. 갱신 직전에 발행 일정을 맞추려면 시험을 실제로 할 수가 없다.”
“시험 없이 성적서만 발급. 소급 작성한 거군요.”
“그렇다.”
이지원이 잠시 뜸을 들였다.
“2022년 3월 건 결재선에 배상호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사람, 감사실 배석 확인자로도 서명했어요. 방금 정보원이 추가 제보를 줬는데, 배상호가 교정 전 시험 데이터를 개인 하드에 보관 중이래요.”
신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보원이 직접 이름을 댔나.”
“예. 그 부분이 이상합니다. 일반 사원이 결재선 정보까지 알 수가 없거든요. 이 정보원, 6개월간 대영산업 제보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배제된 납품사.”
“의도적으로.”
신우진이 포스트잇을 한 번 짚었다.
“정보원 쪽은 네가 추적해. 나는 시험 성적서와 계약 갱신 연관성으로 감사 재개 요청 자료를 보강할게.”
“이미 정리 중입니다. 두 가지가 교차 확인됐으니 신빙성은 충분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대전차량기지 정비팀 사무실. 오후 3시 10분.
박중호가 책상 서랍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겉장이 낡고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그 안에 끼워둔 메모지를 펼쳤다.
강재호. 전 품질관리팀. 연락처.
그가 사무실 유선전화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느렸다.
신호음이 네 번 갔다.
“여보세요.”
나이 든 남자 목소리. 약간 쉰 톤이었다.
“강 선배님. 박중호요.”
한 박자 뜸. 강재호가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중호. 오랜만이네.”
“몇 년 만입니까.”
“칠 년 됐나. 아흡 년인가. 됐고. 무슨 일이야.”
박중호가 수화기를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오른손 주먹이 책상 위에서 천천히 펴졌다.
“9년 전 보고서 말입니다. TH-1187.”
강재호가 잠시 침묵했다.
“그걸 왜 지금 묻나.”
“살아 있습니다. 같은 부품, 같은 결함. 모델명만 바뀌었어요.”
“KD-2037인가.”
“알고 계셨군요.”
강재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알지. 뉴스도 봤고, 사내 소식도 가끔 들어. 그 보고서는 폐기 지시 내려왔었어.”
박중호의 턱 근육이 올라왔다.
“폐기했다고 들었습니다.”
“원본은 그랬겠지.”
박중호가 숨을 멈췄다.
“사본이 있습니까.”
“내가 노조 간부였을 때, 중요한 자료는 따로 복사해뒀어. 당시 상부에서 보고서를 묻으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내가 가져온 거야.”
“어디에.”
“여기. 제천 집에 있다.”
박중호가 눈을 감았다 떴다.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꾹 눌렀다.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날짜 잡으면 연락해. 주소는 문자로 보낼게.”
“고맙습니다.”
강재호가 짧게 웃었다.
“고마울 일 아냐. 당연히 해야 했던 거야. 그때도, 지금도.”
전화가 끊겼다.
박중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수첩에 강재호가 보낸 주소를 적었다.
충북 제천시 봉양읍. 내일 오전 방문.
대전차량기지 검수실. 오후 3시 30분.
신우진이 윤태호의 번호를 찾았다. 명함을 꺼내지 않고 통화 기록에서 바로 눌렀다.
신호음 세 번.
“신 주임님. 생각보다 빠르시군요.”
윤태호의 목소리. 매끄럽고 끝이 정확히 내려앉았다.
“제안을 검토 중입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신우진이 포스트잇을 보며 말했다.
“납품사 내부 품질 관리 체계를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시험 설비도 다시 보고요.”
잠시 침묵. 윤태호가 낮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신 주임님. 그건 협조의 범위를 조금 넘는 것 같은데요.”
“검수과장을 제안하신 건, 현장보다 시스템을 보라는 뜻 아닙니까.”
윤태호가 짧게 웃었다. 비꼬는 톤이 살짝 섞였다.
“맞습니다. 좋습니다. 공장 방문 일정을 잡죠. 언제가 편하십니까.”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오전 10시. 대전차량기지 정문에서 차량 지원하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신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노트에 금요일 오전 10시를 적었다. 시험 설비 가동 로그 기록을 직접 확보할 기회였다.
대전 본사 인근 사무실. 오후 3시 35분.
윤태호가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팔걸이에 기대어 잠시 창밖을 봤다.
맞은편에 앉은 구매처 과장 최광수가 말을 꺼냈다.
“신우진입니까.”
“그렇습니다.”
“수상하지 않습니까.”
윤태호가 왼손 금색 반지를 천천히 돌렸다.
“아직은. 승진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전에 방문했던 사람이 또 시설을 보겠다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네. 과장 승진 제안을 받았으니, 본인이 관리할 자원을 미리 파악하려는 거지.”
최광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불안합니다.”
“시험 설비는 이미 정리했어. 가동 로그도 깨끗하고요. 그가 뭘 보든, 우리가 보여주는 것만 보게 될 겁니다.”
윤태호가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찻잔 가장자리 너머로 눈이 웃지 않았다.
“내부 단속만 한 번 더 하면 되겠군요.”
대전차량기지 검수실. 오후 4시.
신우진이 모니터를 끄고 있었다. 복도 쪽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 최명식이었다.
“선배님.”
숨이 약간 가빴다. 신우진이 돌아봤다.
“뭔데.”
“아까 길드 채팅방 확인했는데요. 그 납품사 직원분이 또 얘기 꺼내셨어요.”
신우진이 손을 멈췄다.
“계속해.”
“계약 갱신 시즌마다 시험 보고서 날짜 맞추느라 야근 엄청 뛰었다고. 원래 시험 주기는 분기인데, 실제로 장비 돌리는 건 일 년에 한 번이래요. 그것도 갱신 직전에 몰아서.”
“시기는.”
“딱 3월 말에서 4월 초요. 올해도 똑같았대요.”
신우진이 노트를 덮었다. 최명식의 정보는 자신이 방금 분석한 패턴과 정확히 일치했다.
“누구한테 더 말했나.”
“아뇨. 선배님한테만.”
“잘했다.”
최명식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이분한테서 더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워낙 불만이 많으셔서.”
“자연스럽게 해. 무리하게 캐내지 말고.”
“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드원 대화 계속 유지해. 정보가 더 필요하면 내가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선배님 조심하시고요.”
최명식이 돌아서서 유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신우진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노트를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내부 증언 확보 경로가 하나 더 생겼다.
퇴근 시간이 지났다.
검수실에 불이 절반쯤 꺼졌다. 복도 건너편 유도로의 조명만 남아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비쳤다.
신우진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개인 사물함에서 낡은 노트 한 권을 꺼냈다.
고영호 선임의 조사 노트.
표지는 손때가 묻어 반들거렸다. 가장자리는 닳고 찢긴 부분을 접착 테이프로 붙인 흔적이 있었다.
그가 노트를 펼쳤다. 앞부분은 이미 여러 번 읽었다. *2007년 11월 27일.
TH-1187-04 패킹 마모 기준 초과.* 2007년 12월 3일. 구매처 대리 윤태호, 검토 반려. 기록 삭제 예상.
신우진이 뒷부분으로 넘겼다. 대부분 빈 페이지였다. 선임이 퇴직 직전까지 썼던 기록은 앞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
그가 손가락으로 페이지 모서리를 짚었다. 종이가 얇아서 거의 비칠 정도였다. 페이지 하단에 뭔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연필로 눌러쓴 글씨. 거의 지워져 있었다.
신우진이 책상 램프를 켰다. 노트를 빛 아래 가까이 가져갔다.
‘TH-1187 로트, 시험일과 입고일 역전.’
심장이 한 번 느리게 뛰었다.
신우진이 글자를 다시 읽었다. 시험일과 입고일 역전. 입고된 날짜보다 시험 성적서 발행일이 앞섰다는 뜻이다. 부품이 창고에 들어오기도 전에 시험을 통과했다는 기록.
7년 전에도 똑같은 방식이었다.
시험 성적서 소급 발행. 계약 갱신일에 맞춘 서류 조작.
그가 노트를 덮고 왼손을 펼쳤다. 집게손가락의 유압유 흉터가 램프 불빛 아래 드러났다.
TH-1187 계열 부품. 같은 설계 결함. 같은 은폐 방식.
9년 전, 7년 전, 그리고 지금.
신우진이 노트를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램프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수실 창밖으로 차량기지 야간 조명이 어둠 속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