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35화

오전 8시 47분. 철도공사 본사 감사실.

이지원이 모니터 두 대를 켰다. 왼쪽은 정보원 라인 메시지 관리자 화면. 오른쪽은 감사실 서버 접속 기록 화면이었다.

메신저백에서 보온병을 꺼내 책상 옆에 뒀다. 뚜껑도 열지 않았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함정 정보 문안을 열었다.

‘본사 감사실이 대한부품 TH-1187 로트의 2020년 시험 성적서 원본을 확보했으며 곧 공식 조회할 예정.’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진짜처럼 보일 조건은 갖췄다. 2020년은 계약 갱신 시점과 겹친다. TH-1187 로트 번호는 신우진이 앞선 사건에서 넘긴 노트 기록에 존재한다. 공식 조회 운운은 윤태호가 가장 두려워할 시나리오였다.

이지원이 수신자 목록을 확인했다. 정보원 일곱 명. 대한정밀 내부자 둘, 구매처 직원 하나, 품질관리팀 출신 하나, ITSM 외주 직원 하나, 그리고 배상호.

전송 버튼 위에 마우스 커서를 올렸다.

잠시 멈췄다.

이 메시지가 유출되면 내부 정보원 라인에 이중 스파이가 있다는 뜻이다. 유출되지 않으면 다른 경로를 가정해야 한다. 어떤 결과든 감사실이 감당해야 할 파장이었다.

클릭.

화면 우측 상단에 ‘전송 완료’ 알림이 떴다. 오전 10시 15분.

이지원이 오른쪽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서버 접근 로그가 실시간으로 스크롤되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수첩을 꺼내 시간을 적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오전 10시 48분. 첫 번째 정보원이 메시지를 열람했다. 10시 52분에 두 번째. 11시 3분에 세 번째.

이지원이 수첩에 계정 코드와 열람 시각을 차례로 적었다. 손목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11시 20분. 네 번째 정보원이 메시지를 연 직후였다.

오른쪽 모니터에 노란색 경고 플래그가 떴다. 감사실 서버 접근 로그 조회 쿼리가 실행됐다. 출처는 정보원 라인 계정 중 하나.

이지원의 손이 멈췄다.

해당 계정은 함정 정보를 열람한 지 4분도 지나지 않아 서버 접근 로그를 확인하려 했다. 누군가 이 정보를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감사실의 추적 가능 여부를 점검한 것이다.

그녀가 해당 계정의 내부 메신저 로그를 열었다.

오전 11시 24분.

메신저 창에 짧은 문구가 떠 있었다. 수신자는 시스템상 ‘외부 협력자’로만 표시된 계정.

‘확인 필요. 본사 감사실 TH-1187 언급. 내용은 추후 전달.’

이지원이 문구를 드래그해 별도 파일에 복사했다. 계정명, 시각, 수신자 정보를 함께 캡처했다.

첨부파일은 없었다. 상세 내용도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정보원 라인 내 이중 스파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인물은 함정 정보를 받자마자 누군가에게 전달했다. 패턴은 단순했다. ‘확인 필요’라는 표현, ‘내용은 추후 전달’이라는 유예. 정보를 빠르게 흘리고 구체적 내용은 나중에 채우는 방식.

이지원이 해당 계정을 ‘감시 대상 #01’로 분류했다. 파일을 암호화해 저장한 뒤, 신우진에게 보낼 메시지를 열었다.

‘함정 물렸다. 정보원 라인 내부 유출 확인. 상세는 추후 공유.’

전송.

오전 11시. 대전차량기지 검수장.

한경숙이 검수 라인 입구에 섰다. 노조 조끼 위에 기능성 재킷을 걸쳤다. 왼쪽 팔뚝의 오래된 기름 화상 흉터가 소매 밖으로 살짝 드러났다.

그녀 뒤로 서른여섯 명의 검수원이 줄지어 서 있었다. 유도로 쪽에서 차량이 한 대 멈췄다. 검수 대기 중이던 KTX-산천. 출고 예정은 오후 2시.

한경숙이 오른손을 들었다.

“시작한다.”

검수원들이 흩어졌다.

라인 1번 스위치가 내려갔다. 2번. 3번.

유압 게이지가 영점으로 떨어졌다. 조명이 절반 꺼졌다. 검수장 안이 어두워졌다.

한경숙이 검수 일정표 앞으로 걸어갔다. 벽에 붙은 대형 보드. 오늘 일정 세 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녀가 빨간 매직을 꺼내 첫 번째 줄에 가로로 굵게 그었다. 두 번째 줄. 세 번째 줄.

그 아래에 볼펜으로 작게 썼다.

‘예정 외 작업 중단: 노동조합 집단행동. 산업안전보건법 제52조에 근거.’

검수원들이 라인 밖으로 나갔다. 유도로 옆 대기실로 이동했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발소리만 콘크리트 바닥에 흩어졌다.

한경숙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꺼진 스위치. 빨간 줄이 그어진 일정표. 빈 검수 라인. 세 장.

바로 노조 법률 자문팀에 전송했다.

‘실행 완료. 근거 기록 확보했습니다.’

30초 뒤 답장이 왔다.

‘확인. 산안법 52조 요건 충족. 차량 출고 지연 기록은 검수팀에서 자동 생성됩니다.’

한경숙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대기실로 걸어가며 검수장 출입구를 한 번 돌아봤다.

유도로 건너편 사무실 창문에 누군가 서 있었다.

검은 양복. 스마트폰을 든 손.

윤태호의 직원이었다. 카메라 렌즈가 검수장 쪽을 향하고 있었다.

한경숙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찍어라. 어차피 공식 기록이다.”

오후 2시. 대전차량기지 검수원 사무실.

신우진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한경숙에게서 사진 세 장을 받은 지 1시간이 지났다. 검수 라인 중단은 공식 기록에 남았고, 차량 출고는 3시간 지연됐다.

그가 휴대폰을 들었다. 윤태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 세 번.

“신 주임님.”

윤태호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배경에서 차량 경적 소리가 들렸다.

“지금 통화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오히려 먼저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먼저요.”

“네. 검수장 상황을 보고받았습니다. 노조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던데, 신 주임님은 괜찮으십니까.”

윤태호의 말투에는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노조의 집단행동이 예상보다 빨랐다는 뜻이었다.

신우진이 책상 위 노트를 한 번 봤다. TH-1187 패턴 분석 메모가 펼쳐져 있었다.

“그쪽 사정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럼 용건이.”

“지난번 말씀하신 분기별 시험 일정 조정 건입니다.”

잠시 침묵.

“검토해보셨습니까.”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시험 설비 가동 방식하고, 성적서 발행까지 걸리는 기간이 실제 업무와 얼마나 차이 나는지.”

또 침묵. 이번에는 조금 길었다. 3초.

윤태호가 낮게 웃었다.

“신 주임님은 참 철저하시네요. 좋습니다. 언제 오시겠습니까.”

“다음 주 초면 되겠습니다.”

“월요일 오전 10시. 공장 시험실에서 뵙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노트에 한 줄을 더 썼다.

‘월요일 오전 10시. 대영정밀 시험실. 가동 로그 확보 필요.’

윤태호는 집단 검수 거부의 충격으로 신우진의 진짜 의도를 의심하지 못했다. 오히려 회유가 진전됐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신우진이 노트를 덮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지원이었다.

메시지 하나.

‘함정 물렸다. 정보원 라인 내부 유출 확인. 상세는 추후 공유.’

신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부 유출.

정보원 라인 안에 스파이가 있다. 이지원이 증거를 확보했다는 뜻이었다. 시험 설비 접근과 함정 작전이 같은 날 결과를 냈다.

그가 휴대폰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도로 너머 검수장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노조원들이 대기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박중호가 제천에서 보고서 사본을 받아온다. 월요일이면 시험 설비 가동 로그에 접근한다. 그리고 이중 스파이의 흔적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신우진이 왼손을 펼쳤다. 집게손가락의 유압유 흉터가 창밖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손을 다시 주먹 쥐었다.

오후 4시 30분. 철도공사 본사 감사실.

이지원이 모니터 앞에 앉은 지 여섯 시간이 넘었다. 눈이 따끔거렸다. 보온병 뚜껑을 이제야 열었다. 찻물은 이미 식어 있었다.

‘감시 대상 #01’의 계정 로그를 시간순으로 정렬했다.

메신저 문구는 단 한 줄이었다. ‘확인 필요. 본사 감사실 TH-1187 언급. 내용은 추후 전달.’

하지만 패턴은 분명했다. 메시지 수신 직후 4분 안에 서버 접근 로그 조회 시도. 8분 뒤 외부 협력자 계정에 1차 보고. 첨부파일 없는 짧은 전달. 내용은 나중에 채우는 구조.

이지원이 해당 계정의 과거 접속 기록을 불러왔다.

스크롤을 내렸다.

앞선 사건 당일. 오전 10시 8분.

신우진이 대영정밀 공장에서 감사팀에 송부한 보고 데이터의 수신 확인 로그가 남아 있었다. 그 수신 확인이 발생한 지 7분 뒤.

동일한 IP 주소에서 외부 협력자 계정으로 메시지가 발송됐다. 내용은 이번과 동일한 문구 패턴.

‘확인 필요. 대영정밀 방문 보고 접수. 상세 취합 후 전달.’

이지원의 손가락이 키보드에서 멈췄다.

같은 표현. ‘확인 필요.’ 같은 구조. ‘상세 취합 후 전달.’ 같은 IP 주소.

신우진이 공장을 방문한 그날, 이 스파이는 이미 결과를 외부로 유출했다. 윤태호가 대비할 시간을 줬다. 시험 설비와 가동 로그를 정리할 시간을 줬다.

이지원이 수첩에 적었다.

‘앞선 사건 당시 공장 방문 보고 유출 확인. IP 동일. 문구 패턴 동일. 스파이는 납품사 방문 당일에도 정보 유출.’

그녀가 해당 계정의 IP 로그를 더 거슬러 올라갔다.

한 달 전. 두 달 전. 여섯 달 전.

동일한 IP 주소에서 동일한 문구 패턴이 반복됐다.

‘확인 필요. 감사실 신규 보고 건.’

‘확인 필요. 검수 기록 열람 요청.’

‘확인 필요. B4 계열 자료 확보.’

모두 같은 수신자. 같은 구조.

이지원이 파일을 닫았다. 암호화해 별도 드라이브에 저장했다. 폴더명을 ‘감시 대상 #01’로 변경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정보원 일곱 명 중 하나. 이 인물이 2년간 윤태호의 눈이었다. 감사실이 움직일 때마다 사전에 정보가 넘어갔다. 내부 조사가 진행될수록 상대는 한 발 앞서 대비했다.

그리고 지금.

이 인물은 함정 정보마저 윤태호에게 전달했다. ‘본사 감사실이 2020년 시험 성적서 원본을 확보했다’는 거짓말을.

그 거짓말이 어디까지 퍼질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중 스파이의 존재는 더 이상 의심이 아니다. 증거가 있다.

이지원이 보온병 뚜껑을 닫았다. 화면 속 ‘감시 대상 #01’ 폴더에 시선이 멈췄다.

그 계정이 배상호의 것이라는 사실은, 이 파일 안에 이미 적혀 있었다.

무정차 통과3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