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37화
대전차량기지 검수원 사무실.
신우진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한경숙의 마지막 말이 이어폰에 남아 있었다.
정치 후원금 라인이 먼저 움직일 거라는 정보예요.
그가 수첩을 펼쳤다. 펜 끝이 종이를 스쳤다.
계좌명 2개. 확인 중. 내일 아침 전 선제 대응 예상.
시계는 오후 11시 17분.
신우진이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 세 번. 연결됐다.
“이지원입니다.”
“윤태호 쪽 움직임. 정치 후원금 라인 타고 내일 아침 전에 선제 대응할 거래.”
잠시 정적.
“출처는요.”
“한경숙 지부장. 내부 제보자한테 계좌명 두 개 받았대. 확인 중이고.”
“배상호 건과 연결됩니까.”
“그건 아직. 하지만 타이밍이 이상해. 배상호 접근 차단한 지 두 시간 만에 후원금 라인 움직임.”
이지원의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제보자가 알려준 계좌명을 제게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한경숙한테 확인해서 바로 보낼게.”
“배상호 로그에서 윤태호의 암호화 통신 패턴을 추출해뒀습니다. 문구 구조가 일정해요. 앞으로 윤태호의 내부 접촉을 식별하는 필터로 쓸 수 있습니다.”
“그걸로 후원금 라인도 추적 가능해?”
“접촉 패턴이 동일하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신우진이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뭔데.”
“배상호가 검수 기록을 삭제한 당일, proc_mks 계정이 삭제 3시간 전에 같은 기록을 조회했습니다. 이 계정은 구매처 소속입니다. 김민혁 건과 별개로, 구매처 내부에 또 다른 접근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윤태호의 직접 지시?”
“가능성이 높습니다. proc_mks의 조회는 배상호의 삭제와 같은 날, 같은 데이터를 대상으로 했어요. 우연으로 보기엔 시간차가 너무 정확합니다.”
신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배상호가 삭제 실행자면, proc_mks는 확인자.”
“네. 윤태호의 지시 구조가 이중으로 되어 있을 가능성입니다.”
“알겠다. 그 계정 추적 계속해. 나는 한경숙한테 계좌명 받아서 보낼게.”
“잠시만요.”
이지원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배경에서 캐비닛 닫히는 소리.
“내일 아침 감사 재개 요청서가 접수되면 감사실장에게 배상호 건을 포함해 정식 보고할 겁니다. 그 전에 윤태호가 움직이면, 저희도 대응 속도를 올려야 합니다.”
“보고서 초안은.”
“이미 정리했습니다. 배상호의 접근 로그, 암호화 통신 패턴, 2년간의 제보 분석까지. 감사실 규정 제8조에 따라 예비 감찰 보고서로 제출 가능한 수준이에요.”
“그걸 내일 아침 동시에 올려.”
“검토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신우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서랍에서 고영호의 노트 사본이 삐져나와 있었다.
2007년 11월 27일자 페이지. 윤태호가 검토를 반려했다는 기록.
기록 삭제를 예상했다는 문장.
그가 노트를 다시 서랍에 밀어 넣었다.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최명식이었다.
“선배님.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응.”
“저도 좀 남을게요. 밤샘 검수는 없지만 상황 봐야죠.”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명식이 자기 자리로 갔다. 모니터 켜지는 소리.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경숙의 메시지.
계좌명: 주식회사 태흥컨설팅, 미래정책연구소. 둘 다 정치 후원금 중개 법인으로 등록됨. 제보자는 이 돈이 내일 오전 중으로 국토위 의원실 보좌진한테 전달될 거라고 함.
신우진이 메시지를 이지원에게 전송했다.
이지원의 답장은 2분 만에 왔다.
두 법인 모두 2022년 이후 윤태호의 대영산업과 정기적 거래 이력 있음. 태흥컨설팅은 작년 감사실의 로비스트 의혹 조사 때도 언급된 이름입니다.
신우진이 답장을 썼다.
그 조사 기록 열람 가능해?
내일 오전 법무팀에 기록 보존 요청을 넣겠습니다. 다만 공식 열람은 감사 재개 이후에나 가능해요.
신우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오후 11시 38분.
그가 컴퓨터를 켰다. 감사 재개 요청서 파일을 열었다. 이지원이 보낸 배상호의 로그 요약을 첨부 목록에 추가했다.
실행자는 auditkdh——실소유주 배상호. 삭제 3시간 전 동일 데이터를 조회한 계정은 procmks, 구매처 소속. 2년간 제보 57건 중 대영산업 관련은 0건. 외부 유출 수신처는 dhparts.com.
저장했다.
복도 반대편에서 최명식이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선배님, 하나 드릴까요.”
“아니.”
“커피는요.”
“됐다.”
신우진이 수첩을 덮었다.
내일 아침까지 일곱 시간이 채 안 남았다.
다음 날 오전 8시 15분.
대전차량기지 검수원 사무실.
신우진은 검수복 상의를 갈아입고 있었다. 형광 안전조끼를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탈의실 밖으로 휴대폰 진동이 들렸다.
이지원이었다.
“신우진 씨.”
“들어.”
“어젯밤 보내주신 계좌명으로 추적한 결과, 태흥컨설팅 계좌에서 어젯밤 11시 52분에 5천만 원이 인출됐습니다. 미래정책연구소는 오늘 오전 6시 14분에 같은 금액.”
“움직였네.”
“네.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금이 이동 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윤태호가 감사 재개 발표 전에 무언가 막으려는 건 확실해요.”
“어느 의원실인지 특정 가능해?”
“아직. 태흥컨설팅은 세 곳 의원실과 정기 자문 계약이 있습니다. 그중 한 곳은 국토위 소속.”
신우진이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흉터가 형광등 빛에 옅게 드러났다.
“감사실장 보고는.”
“오늘 오전 9시로 예정됐습니다. 배상호 건과 proc_mks 건, 그리고 윤태호의 통신 패턴까지 포함해 제출합니다. 공식 조사 개시 요청도 같이.”
“윤태호 만나러 갈 시간이야.”
이지원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신우진 씨. 그쪽 면담에서 배상호 이름을 직접 언급할 생각입니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어떻게 하실 건지.”
“정보원 라인이 뚫렸다는 것만 암시한다. 그걸로 충분히 흔들릴 거야.”
이지원이 잠시 멈췄다.
“조심하십시오. 윤태호는 지금 자금까지 움직이고 있어요. 그가 손해를 감수하는 건 본인의 생존이 걸렸을 때뿐입니다.”
“알겠다.”
통화가 끝났다.
신우진이 안전조끼를 집어 들었다. 형광 밴드가 빛을 반사했다. 그가 조끼를 걸치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전 9시 30분. 박중호의 자택 서재.
벽걸이 시계가 아홉 시 반을 가리켰다.
박중호가 서재 문을 닫았다. 책장 옆 금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금고 제조사명이 손잡이 아래 눌러져 있었다. 대영정밀기계. 2015년 폐업한 대영산업의 계열사.
그가 다이얼을 돌렸다.
오른쪽으로 세 바퀴. 24.
왼쪽으로 두 바퀴. 17.
오른쪽으로 한 바퀴. 8.
핸들을 돌렸다. 잠금쇠가 금속성으로 울렸다.
문이 열렸다.
안쪽에는 서류 봉투 몇 개와 낡은 수첩이 쌓여 있었다. 지난번 개봉 때 확인한 것들.
박중호가 봉투를 하나씩 빼냈다. 손이 느렸다. 손등의 핏줄이 부풀었다.
봉투 두 개를 치우자 바닥판이 드러났다.
그가 주머니에서 일자 드라이버를 꺼냈다. 바닥판 모서리에 끼웠다. 지난주 강재호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거기 금고. 대영정밀 제품이지.”
“맞다.”
“그 모델은 밑판이 이중으로 돼 있어. 제조 당시 납품용 금고 대부분이 그 구조였어. 우리가 검수 때 그 부분까지 뜯어봤거든.”
드라이버를 비틀었다. 바닥판이 들썩였다.
들어 올렸다.
아래로 오 센티미터 깊이의 빈 공간.
그 안에 마닐라 봉투 하나가 누워 있었다.
박중호가 봉투를 꺼냈다. 겉면에 볼펜으로 쓴 글씨가 바랬다.
‘TH-1187 품질 문제 긴급 보고. 2015년 2월.’
자신의 글씨였다.
그가 봉투를 열었다.
첫 페이지.
보고서 표지. ‘TH1187 품질 문제 긴급 보고’. 작성자 박중호. 검토자 강재호.
둘째 페이지부터 본문이 이어졌다.
패킹 재질 시험 데이터. 내열성 저하 그래프. 교체 권고 기한. 그리고 결론.
‘해당 로트에 사용된 패킹 재질은 규격서상 HNBR 등급이나, 실측 결과 EPDM 혼합재로 확인. 3년 이내 전량 교체를 권고함.’
그 아래로 결재란. 작성자 서명. 검토자 서명.
승인란은 비어 있었다.
박중호가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봉투 안에 또 한 장이 있었다. 접힌 A4 용지.
펼쳤다.
공문. 2015년 2월 28일자.
‘수신: 품질관리팀장 박중호. 발신: 구매본부장. 제목: TH1187 품질 보고서 처리 건.’
‘해당 보고서는 사내 품질 기준 재검토 전까지 공식 기록에서 제외함. 원본은 즉시 폐기 조치할 것. 본 지시는 구두로 갈음한다.’
공문 하단에는 구매본부장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박중호가 공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이 떨렸다.
그가 보고서를 한 장씩 넘겼다. 부록 페이지. TH1187 로트 번호 목록. 입고일과 검수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맨 아래 항목.
TH-1187-04. 입고일 2007년 11월 10일. 검수일 2007년 11월 10일.
고영호의 노트에 적혔던 번호.
7년 전 탈선 사고의 원인 부품 번호.
박중호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신우진의 번호를 눌렀다.
오전 10시. 납품사 본사 접견실.
신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윤태호는 이미 접견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수트. 금색 인장 반지가 왼손 약지에서 빛났다.
커피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오셨군요. 앉으시죠.”
신우진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안전조끼를 벗어 옆에 접었다.
윤태호가 커피잔을 집었다.
“아까 전화하신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저희 부품 로트 추적 시스템에 접근하고 싶다. 맞습니까.”
“맞는다.”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신우진이 윤태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검수 데이터를 복원 중이다. KD-2037의 실제 납품 로트와 검수 시점을 교차 확인해야 한다.”
“그건 구매처 시스템에서도 조회 가능하지 않습니까.”
“구매처 데이터는 이미 두 번 삭제됐다. 당신 회사의 생산 관리 시스템이 원본에 가장 가깝다.”
윤태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눈은 웃지 않았다.
“신우진 씨.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당신은 어제까지만 해도 저를 압박하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협조를 구하러 왔군요.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쪽도 나를 회유하려고 했다. 서로 필요한 게 있으니까.”
“제가 필요한 것은 당신의 협조겠죠. 그런데 당신에게 시스템 접근을 주는 게 제게 어떤 이득입니까.”
신우진이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감사실 내부 정보.”
윤태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무슨 뜻이죠.”
“당신의 정보원 라인이 뚫렸다.”
윤태호의 손가락이 커피잔 손잡이에서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이해할 거다. 감사실 내부에서 대영산업 쪽으로 정보를 빼돌리던 계정이 어젯밤 차단됐다. 차단 직후 접근 로그와 통신 기록이 전부 감사실에 확보됐고.”
신우진이 말을 끊고 윤태호의 반응을 지켜봤다. 윤태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깜빡임이 사라졌다.
“근거는.”
“직접 확인하고 싶으면 감사실에 물어봐. 답은 없을 거다. 이미 정보가 차단됐으니까.”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윤태호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그 정보를 저한테 주는 이유가 뭡니까.”
“나는 로트 추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당신은 지금 새 정보원이 필요할 거다.”
“제 정보원이 뚫렸다면, 당신과 거래하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은 양쪽이 감수하는 거다. 나는 당신 시스템에 접근하는 기록을 남기고, 당신은 내게 정보를 준 기록이 남는다.”
윤태호의 미소가 돌아왔다. 이번엔 입꼬리만 올라갔다.
“흥미롭군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주실 생각입니까.”
“감사실의 다음 조사 대상.”
“그걸 제가 믿을 수 있을까요.”
“먼저 시스템 접근을 주면 첫 번째 정보를 준다.”
윤태호가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왼손 약지의 금색 반지가 탁자 가장자리에 닿았다.
“조건을 달겠습니다.”
“말해.”
“접근은 48시간. 제한된 계정으로 IP와 시간이 전부 기록됩니다. 열람만 가능하고 다운로드는 불가. 조회하는 모든 데이터의 목록은 저에게 실시간으로 공유됩니다.”
“데이터 열람 목록은 하루에 한 번 메일로 보내라. 실시간은 거부한다.”
“왜죠.”
“내 검색 패턴을 당신이 실시간으로 분석할 거니까.”
윤태호가 짧게 웃었다.
“날카롭군요. 알겠습니다. 일일 보고로 하죠. 한 가지 더.”
“뭔데.”
“당신이 주는 첫 번째 정보가 제게 유의미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접근 권한은 즉시 회수합니다. 이 조건은 양보할 수 없어요.”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인다.”
윤태호가 휴대폰을 들어 IT 담당자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탁자 위 태블릿으로 알림이 떴다.
“계정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디는 tempaudit37. 비밀번호는 첫 접속 시 재설정하시고요. 지금부터 48시간 유효합니다.”
신우진이 일어섰다.
“첫 번째 정보는 오늘 오후에 보낸다.”
윤태호도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신우진은 손을 잡지 않았다.
“감사실 내부 정보. 기대하겠습니다.”
신우진이 안전조끼를 집어 들고 접견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윤태호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휴대폰을 집어 올렸다. 정치 후원금 라인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금 전달 속도를 올려라. 오늘 아침 안으로 끝내야 한다.’
오전 11시. 납품사 본사 주차장.
신우진이 운전석에 앉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중호.
“팀장님.”
“금고 열었다.”
신우진의 손이 시동 버튼에서 멈췄다.
“언제.”
“한 시간 전. 강재호 그 양반이 알려준 대로 밑판 뜯었더니 있더라.”
“뭐가.”
“보고서 원본. 2015년 거. TH1187. 폐기 지시 공문도 같이 들어 있었어.”
잠시 침묵.
“공문 내용은.”
“구매본부장 명의야. 보고서를 공식 기록에서 제외하라고. 원본 폐기 지시. 구두로 갈음한다고 적혀 있고.”
“보고서 결론은.”
박중호가 숨을 들이쉬었다.
“패킹 재질이 규격과 다르다. 3년 안에 전량 교체 권고. 그게 아홉 년 전이야. 지금도 같은 부품을 KD-2037로 모델명만 바꿔서 납품하는 거고.”
“로트 번호는.”
“TH-1187-04. 네 선임 고영호가 적어뒀던 그 번호다. 2007년 11월 10일 입고된 부품.”
신우진이 왼손으로 핸들을 쥐었다. 흉터가 있는 검지가 가죽을 눌렀다.
“지금 어디야.”
“집이다. 보고서 들고 나오는 중이야.”
“감사실로 와. 나도 지금 간다.”
“이지원은.”
“내가 연락한다.”
통화가 끊겼다.
신우진이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울리고 연결됐다.
“박중호 팀장이 금고에서 보고서 원본 찾았어.”
이지원의 호흡이 순간 멈췄다.
“TH1187 말입니까.”
“맞다. 2015년에 폐기 지시 받은 원본. 공문까지 같이 보관하고 있었어. 지금 감사실로 가져오는 중이고.”
“공문에 지시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시 구매본부장. 직인까지 찍혀 있어.”
“폐기 지시를 받았는데도 보고서가 존재한다는 건, 공식적으론 폐기됐지만 실물은 남아있다는 뜻이군요.”
“그리고 그 보고서의 부품 번호가 7년 전 탈선 사고의 원인 부품과 일치해.”
이지원이 잠시 침묵했다.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지금 오십시오. 배상호 건 1차 보고서 초안은 완성됐습니다. 두 가지를 묶어서 감사실장에게 올리겠습니다.”
“보고서 원본이 도착하면 로트 추적 시스템 데이터와 교차 검증할 거야. 윤태호한테서 48시간 접근 권한 받아냈어.”
“윤태호가 조건부로 승인했습니까.”
“응. 내 검색 내역을 일일 보고로 받고, 첫 정보가 유의미하지 않으면 회수한대.”
“첫 정보는 주실 생각이십니까.”
“이미 정했다. proc_mks 계정의 접근 기록. 배상호와 같은 날 같은 데이터를 조회했다는 사실만.”
“그 정보는 이미 윤태호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알더라도 내가 직접 알려줬다는 사실 자체가 내 신뢰도를 올릴 거다. 다음 정보를 더 받아내려면 지금은 진짜를 줘야 해.”
이지원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감사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신우진이 시동을 걸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차장 출구로 나오는 길에 휴대폰이 또 한 번 진동했다. 최명식이었다.
“선배님. 검수 라인 지금 상황이 좀 이상한데요.”
“어떻게.”
“한경숙 지부장님이 방금 공문 보냈어요. 산안법 52조 근거로 B4 계열 부품 전면 검수 거부. 오늘부터 유효하대요. 구매처 쪽에서 연락 오고 있어요.”
“윤태호도 알고 있나.”
“당연히 알 거예요. 구매처 시스템에 실시간으로 검수 지연 뜨니까.”
신우진이 백미러를 확인하며 차를 돌렸다.
“버텨. 노조 법률 자문 붙어 있으니까 아무나 못 건드려.”
“선배님은 어디세요.”
“감사실 간다.”
통화가 끝났다.
차가 대전차량기지를 빠져나와 본사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대시보드 시계는 오전 11시 23분.
신우진이 핸들을 쥔 왼손에 힘을 줬다. 흉터가 하얗게 질렸다.
철도공사 본사 감사실.
오전 11시 48분.
이지원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배상호의 1차 보고서 초안이 화면에 떠 있었다. 접근 로그. 통신 패턴. 2년간 제보 분석. 윤태호와의 암호화 통신 문구 구조까지.
그 옆 창에는 어젯밤 신우진이 보낸 태흥컨설팅과 미래정책연구소의 계좌 정보도 정리되어 있었다.
이지원이 프린트 버튼을 눌렀다.
복사기가 열 장을 한 번에 토해냈다.
보고서를 집어 든 순간, 감사실 문이 열렸다.
박중호였다.
손에 마닐라 봉투를 쥐고 있었다. 봉투 겉면이 바래고 가장자리가 닳았다.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군요.”
박중호가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거다.”
봉투에서 서류 두 건을 꺼냈다.
보고서 표지.
‘TH1187 품질 문제 긴급 보고’.
그 아래로 폐기 지시 공문.
‘원본은 즉시 폐기 조치할 것’.
두 문서가 형광등 빛에 나란히 놓였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신우진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탁자 위 보고서에 모였다.
신우진이 다가가 보고서 첫 페이지를 넘겼다. 고영호의 노트에 적힌 번호를 그가 찾았다.
TH-1187-04.
입고일 2007년 11월 10일.
그 페이지를 조용히 손가락으로 짚었다.
“같은 거다.”
이지원이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이 결론부로 페이지를 넘겼다.
‘3년 이내 전량 교체를 권고함.’
9년 전에 적힌 그 문장이 형광등 빛에 뚜렷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