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38화
대전차량기지 검수원 사무실.
오전 9시 12분.
탁자 위에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TH1187 품질 문제 긴급 보고’라는 표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았다. 옆에는 폐기 지시 공문. ‘원본은 즉시 폐기 조치할 것’이라는 도장이 선명했다.
박중호가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결론부였다. 굵은 손가락이 한 문장을 집었다.
“이거다.”
신우진이 몸을 숙였다.
‘상기 로트 전 제품은 패킹 재질이 규격 HNBR이 아닌 EPDM 혼합재로 확인되며, 현행 납품 체계가 유지될 경우 동일 계열 부품에서 3년 이내 유사 결함이 반복될 것으로 예측됨.’
신우진의 시선이 날짜에 멈췄다. 2015년 2월 14일.
“9년 전에 예측했다.”
이지원이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이 결론부에서 표지로 돌아왔다.
“3년 안에 전량 교체하라고 권고했군요. 그런데 지금까지 같은 설계로 납품됐다.”
“모델명만 KD-2037로 바꿨다.” 신우진이 말했다.
박중호가 봉투에서 서류 한 장을 더 꺼냈다. 로트 번호 대조표였다.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TH-1187-04부터 TH-1187-11까지, 그리고 현재 납품 중인 KD-2037-101부터 114까지. 번호 체계는 달랐지만 부품 분류 코드는 같았다.
“내가 어젯밤 확인했다. 같은 계열이다.”
이지원이 표를 받아 들었다. 왼쪽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이걸로 연결됩니다. 9년 전 결함 예측과 현재 검수 기록 삭제가 동일한 부품 계열을 겨냥했다는 게 입증됐어요.”
박중호가 보고서 원본을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봉투도 같이 밀었다.
“공식 제출한다.”
잠시 침묵. 신우진이 보고서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감사실 접수 절차가 필요하다.”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탁자 옆 서류 캐비닛에서 표준 양식 한 장을 꺼냈다. 감사 증거물 접수증이었다.
“제가 접수 번호를 발급하겠습니다. 감사실 정식 절차예요. 증거물 등록부에 원본 등재하고, 사본 두 통을 만들어 한 통은 박 팀장님께 드리고 한 통은 감사실 보관함에 넣습니다.”
박중호가 끄덕였다.
“그렇게 해.”
이지원이 양식에 펜을 댔다. 접수 일자, 증거물 명칭, 제출자 성명을 차례로 적어 내려갔다. 그녀의 왼손이 서류 하단을 받쳤다.
“원본은 감사실 금고에 보관됩니다. 열람 기록이 자동으로 남으니까 외부 유출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우진이 보고서 표지를 다시 한 번 내려다봤다.
“폐기 지시 공문도 같이 접수해.”
이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죠. 누가 폐기를 지시했는지도 증거니까.”
박중호가 양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오래 걸리나.”
“접수 자체는 지금 끝납니다.” 이지원이 접수증을 찢어 박중호에게 건넸다. “하지만 감사실장 보고 후 정식 조사 과제로 등록되기까지 이틀 정도 걸릴 거예요. 배상호 건 1차 보고서와 묶어서 올릴 겁니다.”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태호는.”
이지원이 접수증 사본을 정리하며 말했다.
“알 거예요. 보고서 제출 사실 자체는 오늘 중으로 전산 등록되니까. 구매처에서 감사실 전산을 모니터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차피 알 거.” 박중호가 말했다. “이제 숨길 이유도 없고.”
이지원이 증거물 접수 대장에 마지막 서명을 했다. 그녀가 원본 보고서와 폐기 지시 공문을 하나의 봉투에 넣고 봉인 스티커를 붙였다.
“접수번호 2024-감-0038. 등록 완료했습니다.”
신우진이 접수증을 접어 왼쪽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박중호가 빈 마닐라 봉투를 집어 구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이제 가야 할 곳이 있군.”
“어디요.”
“강재호한테.” 박중호가 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9년 전에 같이 이 보고서를 썼다. 이제 회수됐다고 알려야지.”
이지원이 봉인된 증거물 봉투를 들고 문 쪽으로 돌아섰다.
“전 감사실 금고에 이것부터 넣고 오겠습니다.”
신우진이 문을 열었다. 복도로 아침 햇살이 밀려들었다.
감사실은 본관 3층 복도 끝에 있었다. 이지원이 봉인된 봉투를 금고에 넣고 나왔을 때, 복도 창문 너머로 구매처 건물이 보였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건물을 바라보았다가, 곧바로 감사실장 집무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봉투 하나와 보고서 철을 다시 손에 쥔 채.
이지원이 감사실장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그녀가 왼손에 마닐라 봉투를, 오른손에 1차 보고서 철을 들고 들어섰다. 봉투 겉면은 바랬고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보고서 철은 방금 프린트한 듯 토너 냄새가 남아 있었다.
감사실장 최인규가 안경 너머로 봉투를 보았다.
“그게 뭡니까.”
“9년 전 부품 보고서 원본입니다. 박중호 검수팀장이 오늘 오전 제출했습니다.”
이지원이 봉투에서 서류 두 건을 꺼내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TH1187 품질 문제 긴급 보고’ 표지. 그 아래 폐기 지시 공문. ‘원본은 즉시 폐기 조치할 것’ 도장이 선명했다.
최인규가 보고서 첫 페이지를 넘겼다. 결론부까지 묵묵히 훑었다.
“3년 이내 전량 교체 권고였군.”
“예. 현재 KD-2037로 모델명만 변경되어 납품 중입니다.”
최인규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이지원이 보고서 철을 그 옆에 폈다. 첫 장에 배상호의 사번과 소속이 적혀 있었다.
“배상호입니다.”
최인규의 손가락이 멈췄다.
“계속하십시오.”
“배상호는 2년간 총 57건의 정보원 제보 중 대영산업 관련 건을 단 한 건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실 내부 정보를 외부 dhparts.com 도메인으로 유출했습니다.”
그녀가 부록 페이지를 넘겼다.
“유출 문구 패턴입니다. ‘확인 필요’로 시작해 ‘상세 취합 후 전달’로 끝납니다. 윤태호가 내부 협력자에게 쓰는 고정 템플릿과 일치합니다.”
이지원이 통신 로그를 가리켰다. 동일 IP에서 동일 수신자로 반복된 기록이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검수 기록 삭제 당일 배상호의 계정으로 오전 2시 14분 B4 검수 기록과 대영산업 납품 이력을 열람했습니다. 삭제 실행 3시간 전입니다.”
최인규가 로그를 읽는 동안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2022년 3월 대한정밀 성적서 재발급 건에도 배상호의 사번이 최종 승인란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감사실 배석 확인자로 서명했습니다.”
최인규가 전화기를 들었다. 단축번호를 눌렀다.
“보안팀. 감사실 직원 배상호, 사번 2017-0452. 금일 12시부로 전산 접근 권한 전면 정지. 사무실 출입 카드 권한도 함께 차단하십시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감찰은.”
“즉시 개시합니다.”
최인규가 보고서 철을 닫았다.
“공식 감사 재개 요청 접수 절차를 진행하십시오. TH-1187 계열 전 부품이 대상입니다.”
이지원이 서류를 챙겨 들었다.
“접수처에 신우진 검수원이 대기 중입니다.”
“보고서 사본을 첨부하십시오. 접수증은 귀하가 직접 교부하도록.”
그녀가 목례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왼쪽 손목 시계가 12시 7분을 가리켰다.
감사실 접수처.
신우진이 접수 창구 앞에 서 있었다. 오른손에 공문 봉투를 쥐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감사 재개 요청서 양식과 박중호의 보고서 사본, 검수 기록 대조표가 들었다.
이지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접수 준비됐습니까.”
“여기 있다.”
그가 봉투를 창구에 내밀자 이지원이 받아 접수 담당자에게 건넸다. 담당자가 공문을 꺼내 문서 등록 화면을 열었다. 키보드 소리가 몇 초 이어졌다.
잠시 후 프린터에서 접수증이 뽑혔다.
담당자가 도장을 찍고 신우진에게 건넸다.
“접수번호 Audit-2024-038, 접수일자 오늘. 감사 대상은 TH-1187 계열 부품 및 모델명 변경 후속 납품 건입니다.”
신우진이 접수증을 받아 확인했다. 문서 번호, 일자, 사유가 한 줄로 찍혀 있었다. 그가 접수증을 접어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지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실장이 감찰을 승인했습니다.”
“배상호 권한은.”
“12시부로 정지.”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저편에서 보안팀 직원 둘이 배상호의 자리 쪽으로 걸어갔다.
이지원이 접수처 카운터에서 물러서며 말했다.
“박중호 검수팀장은.”
“기지로 돌아가셨다. 내가 연락 드리겠다.”
신우진이 돌아서서 복도를 걸었다. 왼손 주머니 속 접수증이 종이 소리를 냈다.
접수증을 건네받은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신우진의 감사 재개 청구 소식은 대한부품산업 내부 정보망을 타고 흘러 대전 지사까지 번져갔다.
대한부품산업 대전 지사 사무실.
오후 1시 14분.
윤태호가 책상 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왼손 약지의 금색 인장 반지가 형광등 빛에 반사됐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김 실장님, 접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매끄러웠다.
“감사실에서 9년 전 보고서를 입수했습니다. 내부 감사도 재개됐고요.”
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윤태호가 책상 모서리를 검지로 한 번 톡 쳤다.
“본사 인맥 라인은 지금부터 가동해주십시오. 구매처 쪽 결재 속도 조절이 먼저고, 지역 정치권은——”
“윤 대표님.”
김 감사실장의 목소리가 낮았다. 평소 같으면 바로 “알겠습니다”가 돌아올 자리였다.
“이번 건은 이전과 다릅니다.”
윤태호의 검지가 멈췄다.
“다르다면, 어떤 점이.”
“감사실 내부 감찰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저희가 연락하기 전에 이중 스파이 건으로 보고가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윤태호가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기댔다. 왼손이 책상 위 인장 반지를 살짝 비틀었다.
“그래서요.”
“정치권 방패를 올리려면 최소한 감사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먼저——”
“그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속도예요.”
김 감사실장이 다시 침묵했다. 3초. 윤태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1초 안에 돌아오던 대답이 두 번째로 늦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본사 쪽 반응부터 확인하고——”
“본사 인맥은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김 실장님은 지역 라인만 붙잡아주십시오.”
“...접수했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윤태호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마우스로 옮겨갔다. 화면에 새 메일 창이 열렸다. 수신자 칸에 본사 구매처 인맥 주소를 입력했다. 제목은 비워뒀다.
본문 첫 줄을 치려는 순간——
수신함에 새 메일 알림이 떴다.
발신자: 감사실 내부 감찰 담당자.
제목: 대한부품산업 납품 전수조사 안내.
윤태호의 오른손이 마우스에서 떨어졌다. 깜빡임 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왼손 엄지가 인장 반지를 반 바퀴 돌렸다.
철도공사 본사 감사실 복도.
이지원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손에는 방금 프린트된 보고서 정본. 표지에 ‘내부 정보 유출 경위 및 관련자 신원 보고’라고 찍혀 있었다.
신우진이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왼손에 감사 재개 접수증을 쥐고 있었다. 문서 하단에 접수 번호가 찍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이 복도 중앙에서 멈췄다.
“보고 올렸습니다.”
이지원이 보고서를 살짝 들어 보였다.
“감사실장 직인 받았어요.”
신우진이 접수증을 내밀었다.
“접수 완료.”
이지원이 접수증 번호를 확인했다. 눈이 빠르게 숫자를 훑었다.
“사건 번호 같네요.”
“같은 틀이다.”
신우진이 접수증을 접어 왼쪽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박 반장님께 연락하겠습니다.”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우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자 곧바로 박중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접수됐습니다, 박 반장님.”
수화기 너머로 잠깐의 정적. 숨을 내쉬는 소리.
“그래.”
짧은 한 마디였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보고서 원본은 어떻게 할 겁니까.”
“사본 떠서 감사실에 넣었다. 원본은 내가 갖고 있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이지원이 보고서를 팔에 끼며 복도 끝을 바라봤다.
“이제 본사 쪽 절차가 시작됩니다. 5영업일 안에 1차 소명 요청이 구매처로 갈 거예요.”
신우진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윤태호도 알 거다. 이미.”
“당연히 알겠죠. 전수조사 안내도 같은 시간에 발송됐으니까.”
신우진이 복도 창문 밖을 바라봤다. 본사 앞 도로에 오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