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39화

오후 햇살이 복도 창문 너머로 길어지고 있었다.

이지원이 보고서를 가슴에 끌어안듯 팔을 조정했다.

“감사실장님께 바로 올리겠습니다. 9년 전 보고서와 함께.”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이 가슴 주머니의 접수증을 한 번 눌렀다.

감사실 회의실. 오후 2시 10분.

감사실장이 탁자 위로 두 개의 서류 뭉치를 받았다. 이지원이 제출한 내부 감사 재개 요청서. 신우진이 제출한 9년 전 품질 의혹 보고서 사본.

감사실장은 5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은테 안경 테가 광대뼈를 눌렀다. 이목구비는 단정했고 목소리는 낮았다.

“보고서 결론을 요약해.”

이지원이 한 걸음 나섰다.

“TH-1187 로트 패킹 재질이 규격 HNBR이 아닌 EPDM 혼합재입니다. 3년 내 전량 교체 권고됐습니다.”

“현재 납품 부품은.”

“KD-2037로 모델명이 변경됐지만, 설계 계열과 결함 패턴은 동일합니다.”

감사실장이 보고서 첫 페이지를 넘겼다.

“대조 문서로 입증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

“언제까지.”

“내일 정오까지.”

감사실장이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왼손 검지가 책상 위를 두 번 쳤다.

“이 사건에 새 사건 번호를 부여한다. AU-2024-003. 이 감사관.” 시선이 이지원으로 향했다. “불일치 대조 문서를 1차 조사 과제로 지정한다. 이상.”

이지원이 고개를 숙였다. 신우진도 따라 목을 깎듯 숙였다.

회의실 문이 닫혔다. 복도로 나온 두 사람은 몇 걸음 걷지 않고 멈췄다.

“내일 정오.”

이지원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손끝이 보고서 표지를 톡톡 쳤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질문은 안 해도 됩니다.”

신우진이 복도 반대편을 바라봤다.

“현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박 반장님께 전할 말이 있습니다.”

그날 오후. 감사실 사무공간.

이지원이 책상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9년 전 보고서 사본과 현행 납품 사양서가 나란히 놓였다.

왼쪽 서류 더미. 오른쪽 서류 더미.

이지원이 의자에 앉았다. 왼손으로 메탈 시계 밴드를 두 번 톡 쳤다. 손가락이 키보드로 옮겨갔다.

첫 번째 불일치를 입력했다.

항목 1: 패킹 재질. 9년 전 HNBR 규격 불일치(EPDM 혼합재 확인). 현행 사양서 HNBR 명기, 시험 성적서 HNBR 통과. 실제 부품 재질 확인 불가.

두 번째 불일치.

항목 2: 내열 온도 범위. 9년 전 -30~120도 규격 대비 실제 측정치 -15~105도. 현행 사양서 동일 규격 유지.

세 번째 불일치.

항목 3: 교체 주기. 9년 전 3년 전량 교체 권고. 현행 부품 5년 사용 중.

손가락이 멈췄다.

이지원이 9년 전 보고서 우측 상단을 바라봤다.

문서 분류 번호.

PC-2015-042.

이지원의 동공이 작아졌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떠나 무릎 위로 떨어졌다.

PC-2015-042. 연도-일련번호 체계. 하이픈으로 구분된 네 자리-두 자리-세 자리.

아버지의 20년 전 제보 사건 문서 번호.

QC-1998-031.

같은 규칙. 같은 패턴.

이지원이 서랍에서 개인 수첩을 꺼냈다. 표지가 낡고 가장자리가 닳은 포켓 사이즈다. 수첩을 펼쳐 마지막 장에 볼펜을 댔다.

PC-2015-042 ←→ QC-1998-031 동일 분류 체계. 연도-일련번호 규칙 유지. 구매처 문서 체계 20년간 불변.

볼펜을 내려놓았다.

20년.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부품 결함을 은폐하는 방식도, 문서를 분류하는 방식도, 사람을 소모하는 방식까지.

이지원이 수첩을 덮었다. 손가락이 다시 키보드로 올라갔다. 불일치 목록 입력이 계속됐다.

해질녘. 대전차량기지.

신우진이 검수원 사무실 문을 열었다. 박중호가 창가에 서 있었다. 양손은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감사 재개 접수됐습니다.”

박중호가 돌아보지 않았다.

“들었다.”

“사건 번호 AU-2024-003입니다. 이 감사관이 대조 문서를 작성 중입니다.”

“그래.”

박중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9년 전 보고서를 제출한 사람 같지 않았다. 신우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배상호, 접근 권한 정지됐습니다.”

박중호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누군지 알겠더라. 얼굴을 몇 번 봤거든.”

“지금은 내부 감찰 중입니다.”

“됐다.”

박중호가 창밖을 바라봤다. 유도로 쪽에서 화차 연결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보복 들어올 거야. 윤태호는 가만히 안 있겠지.”

신우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박중호의 시선이 창밖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너도 조심해.”

“알고 있습니다.”

박중호가 몸을 돌렸다. 다크서클이 유난히 짙어 보였다.

“보고서 내놓은 건, 내가 선택한 거다. 여한은 없어.”

“끝난 일 아닙니다.”

신우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박중호가 신우진의 눈을 바라봤다. 대꾸는 없었다. 입술이 한 번 움찔했을 뿐이다.

신우진이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접수증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사본입니다. 보관하십시오.”

박중호가 접수증을 집어 들었다.

같은 시각. 대한부품산업 사무실.

윤태호가 전화기를 들었다. 창밖은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오른손 검지가 책상 가장자리를 한 번 쳤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양 보좌관님, 윤태호입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대표님, 소식 들었습니다.”

“그쪽까지 들어가셨군요.”

“감사실 전수조사 안내, 저희 사무실에서도 확인했습니다.”

윤태호가 인장 반지를 반 바퀴 돌렸다.

“그럼 말씀드리기 수월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본사 인사 라인입니다.”

수화기 너머가 짧게 침묵했다. 윤태호가 말을 이었다.

“감사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조사 범위가 확대되면 곤란한 분들이 계십니다. 인사과장님께 전화 한 통이면 될 겁니다.”

“대표님.”

양 보좌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이번 건은 분위기가 다릅니다. 지난번처럼 단순한 감사가 아니에요. 내부 감찰팀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후원금 라인도 주시하고 있어요. 급하게 움직이면 안 보일 것도 보입니다.”

윤태호의 왼손 엄지가 반지에서 멈췄다.

“양 보좌관님.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함께 해결했습니까. 지금 와서 발을 빼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다만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윤태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등받이 가죽이 낮게 삐걱댔다.

“어떻게 조절하실 생각입니까.”

“인사과장에게 연락은 하겠습니다. 다만 직접적인 감사 중단은 요청하지 않습니다. 조사 범위 확대에 시간이 걸리는 절차가 몇 가지 있습니다. 행정 절차를 철저히 활용하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윤태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간은.”

“길어야 몇 주입니다. 그 사이에 다른 카드를 정리하시죠.”

“그 카드들이 정리되면 감사가 무의미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윤태호가 전화를 내려놓지 않았다. 수화기를 든 채로 창밖을 바라봤다. 대전 시내 쪽으로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양 보좌관님.”

“예.”

“이건 제 첫 패배입니다.”

수화기 너머가 다시 침묵했다.

“여기서 더 밀리면 저는 끝입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

전화가 끊겼다. 윤태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시선이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갔다. 전수조사 안내 메일이 아직 모니터에 떠 있었다.

오른손이 마우스를 잡았다. 메일을 닫았다. 빈 바탕화면. 윤태호가 서랍을 열었다.

서류 뭉치를 꺼냈다. 대전 지역 사업체 목록. 제조업, 건설업, 운송업, 무역업. 오십여 개 업체명과 대표 이름, 연락처가 빼곡했다.

인터폰을 눌렀다.

“김 비서.”

“예, 대표님.”

“본사 인사과장님과 회동 잡아라. 내일 오후.”

“주제는 어떻게 말씀드릴까요.”

윤태호가 서류 첫 장을 넘겼다. 냉소가 입가에 번졌다.

“말 안 해도 알겠지. 긴급 현안 협의.”

인터폰이 꺼졌다.

윤태호의 손가락이 명단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어떤 이름들에는 동그라미가 이미 쳐져 있었다. 정치 후원금을 낸, 과거 입찰 비리로 도움을 받은, 함께 감사를 무마했던 업체들.

손가락이 열두 번째 줄에서 멈췄다.

대영정밀기계. 대표 김학수.

동그라미가 없는 이름이었다. 옆에 작은 별표가 손글씨로 그려져 있었다.

윤태호가 서류를 덮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대전 시내의 가로등이 완전히 켜져 있었다. 빌딩 숲 사이로 불빛이 반짝였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다.

처음이다. 정치적 방패가 주저했다. 정보원 라인이 잘렸다. 감사는 재개됐다. 9년 전 보고서가 살아 돌아왔다.

윤태호가 창밖을 응시했다. 깜빡임이 사라졌다. 왼손 엄지가 인장 반지를 반 바퀴, 다시 반 바퀴 돌렸다.

멈췄다. 손가락이 반지에서 떨어졌다.

“대영정밀기계.”

혼잣말이었다. 짧고, 낮고, 매끄러웠다.

이지원이 9년 전 보고서 우측 상단을 바라봤다.

문서 분류 번호.

PC-2015-042.

이지원의 동공이 작아졌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떠나 무릎 위로 떨어졌다.

PC-201
무정차 통과3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