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차 통과
40화
병원 5층 복도는 저녁 문병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복도 끝 간호사실에서 인계 노트 넘어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신우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돌았다. 507호는 복도 중간쯤이었다.
걸음을 멈췄다.
자판기 옆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작업복도 환자복도 아닌, 검은색 바람막이 차림이었다. 커피를 뽑는 손이 멈춰 있었다. 시선은 507호 문 쪽을 향했다.
남자가 고개를 약간 틀었다. 신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한 박자. 남자가 종이컵을 받았다.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려 자판기 반대편, 계단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커피에서 김이 올랐다.
신우진은 남자의 뒷모습을 시야에 두고 507호 문 손잡이를 잡았다.
안에서 박중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병실은 4인실이었지만 다른 침대는 비었다. 창가 쪽 침대에 박중호가 앉은 채였다. 왼쪽 손목 붕대가 풀려 침대 난간에 걸쳐졌다. 오른쪽 발목은 여전히 부목.
신우진이 문을 닫았다. 복도 쪽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커튼을 반쯤 쳤다.
“방금 복도에 누가 있었습니다.”
박중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봤나.”
“507호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니까 자판기 쪽으로 갔고.”
박중호가 침대 머리맡 물컵을 집어 들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컵 바닥이 탁자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후에 한 번 왔었다.”
“누굽니까.”
“모르지. 문만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신우진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박중호의 붕대 감긴 손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붕대 밖으로 드러난 손가락 마디가 부어 있었다.
“몇 시쯤입니까.”
“세 시 좀 넘었나. 수액 갈고 졸다가 문 여는 소리에 깼다.”
박중호가 턱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누군가 문을 열었다. 발소리는 안 났다. 몇 초 있다가 닫혔다. 일어나서 복도 나가 봤는데 아무도 없었고.”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구석을 천천히 훑었다. 화장실 문, 옷장, 창문.
“CCTV은요.”
“복도 양쪽 끝에 있다. 이 문 앞은 사각이다.”
박중호가 피식 웃었다.
“잘 골랐지. 507호.”
신우진이 커튼을 살짝 젖혔다. 창밖은 어두웠다. 병원 주차장 가로등이 군데군데 켜져 있었다. 입구 쪽에서 차 한 대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어제부터입니까.”
“내가 알기론 오늘이 처음이다.”
“팀장님 상태를 확인하려는 겁니다. 입원 기간, 퇴원 예정일.”
“알고 있겠지. 진료 기록은 병원에 있고.”
신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걸 노리는 게 아닙니다. 누가 찾아오는지, 뭘 전달하는지. 그게 목적일 겁니다.”
박중호의 표정이 굳었다. 붕대 감은 손가락으로 담요를 한 번 쥐었다 놓았다.
“윤태호 새끼.”
“직접 보낸 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시가 시작된 건 확실합니다.”
신우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진동으로 전환했다. 화면을 확인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퇴원 날짜는 언제입니까.”
“모레다. 오전 중에 나갈 거다.”
“제가 차로 모시겠습니다. 퇴원 당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박중호가 신우진을 바라봤다.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신우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잠시 멈췄다.
“수상한 낌새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알았다.”
신우진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자판기 앞은 비어 있었다. 복도 끝 계단실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정적.
신우진은 계단실 쪽으로 걸어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릴 때까지 복도 양쪽을 번갈아 확인했다.
병원 현관을 나서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지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병원 감시 확인. 내일 아침 보고.」
병실 문 밖으로 나오자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신우진은 아까 그 남성이 서 있던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507호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창문 아래. 벽에 기대면 병실 문이 시야에 들어오는 각도였다.
발뒤꿈치로 바닥을 한 번 밀어 보았다. 미끄럼 방지 타일. 장시간 서 있기에 무리가 없는 재질.
쓰레기통은 창문 바로 왼쪽에 붙어 있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반원통. 신우진이 뚜껑을 열자 소독약 냄새와 함께 종이컵, 휴지 뭉치가 보였다.
오른손으로 윗부분을 살짝 헤집었다. 손이 멈췄다.
찢긴 종잇조각.
네 조각.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로 찢겨 있었으나 종이 질감이 주변 휴지와 달랐다. 얇고 매끄러운 메모지. 신우진이 조각들을 집어 왼손 바닥에 펼쳤다.
507.
첫 조각에 적힌 숫자였다. 검은 볼펜. 획이 또렷했다. 두 번째 조각에는 '면회 시간', 세 번째에는 '18-20시'와 '경비'가 나뉘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조각은 '교대 22시'.
신우진이 주머니에서 지퍼백을 꺼냈다. 부품 견본용으로 항상 지니고 다니는 소형 백. 네 조각을 차례로 넣고 바닥에 대고 눌러 배열했다.
찢긴 선이 맞물렸다. 507호 면회 시간 18-20시. 경비 교대 22시.
글씨는 빠르게 쓴 흔적이 역력했다. '시' 자의 마지막 획이 길게 삐져나왔다. 숫자 2는 윗부분이 눌려 있었다. 메모를 손바닥 위에서 눌러쓴 자세.
신우진이 지퍼백을 들어 형광등 빛에 비춰 보았다. 볼펜 자국이 종이 뒷면까지 눌려 있었다. 압력이 꽤 강했다. 서둘러 적으면서도 필압을 조절하지 못한 손.
감시 메모.
507호는 박중호의 병실. 면회 시간과 경비 교대 시간만 골라 적었다. 병문안 목록이 아니다. 경계가 필요한 지점만 정리한 감시 지침이었다.
신우진이 지퍼백을 접어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쓰레기통 뚜껑을 원위치하고 복도를 다시 한 번 훑었다. CCTV는 엘리베이터 쪽에 한 대. 이 위치는 사각이었다.
면회 종료 안내 방송이 울렸다. 신우진이 병실 문을 두드렸다.
박중호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찾았냐.”
“메모지. 찢어서 버렸더군.”
신우진이 지퍼백을 보여줬다. 박중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507호 면회 시간. 경비 교대. 감시용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박중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산소 포화도 측정기가 규칙적인 신호음을 냈다.
“여기도 뚫렸다 이거군.”
“문 앞에 의자 하나 기대놓으십시오. 열릴 때 소리로 알 수 있게.”
“이미 생각했다.”
박중호가 침대 옆 서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금고 열쇠가 담긴 보조 주머니가 보였다.
“열쇠는 여기 둔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라.”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감사실에 이 메모 정식 제출합니다.”
“그래라.”
박중호가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신우진이 병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1층 로비 공중전화 구역. 신우진이 수화기를 들고 이지원의 당직실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다.
“이지원입니다.”
“신우진. 병원.”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복도 쓰레기통에서 감시 메모 발견했습니다. 507호 면회 시간, 경비 교대 시간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실 앞에서 대기하던 남성이 버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화기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잠시 들렸다. 이지원의 호흡이 한 번 끊겼다.
“감사실 쪽도 상황이 생겼습니다.”
“접니다.”
“오늘 오후 4시 30분경, 비공개 조사 문건에 비정상 접근 기록이 확인됐습니다. 열람 로그를 지금 확인 중입니다. 내부 인원의 권한으로 접근한 흔적이에요.”
신우진의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서 멈췄다.
“시간이 겹칩니다.”
“네. 병원 감시 시작 시점과 거의 일치합니다.”
이지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띄어쓰기가 짧아져 있었다.
“동일한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감사실 내부 정보 유출과 병원 감시가 같은 라인에 연결돼 있어요.”
“조직적입니다.”
“규모가 예상보다 큽니다.”
신우진이 수화기를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로비의 자동문이 열렸다 닫혔다.
“메모는 지퍼백에 보관 중입니다. 내일 감사실에 제출하고 로그 자료와 교차 확인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8시에 대면 회의를 제안합니다. 로그 출력본도 준비해두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신우진 씨. 오늘 밤은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통화가 종료됐다.
병원 정문을 나서며 신우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귀가 방향은 오른쪽 버스 정류장. 그는 왼쪽으로 돌았다.
주차장 입구 쪽이었다. 아까 그 남성. 의료진 복도가 아닌 이곳으로 빠졌을 가능성.
야외 주차장은 가로등 여섯 개가 군데군데 켜져 있었다. 방문객 차량 대부분 빠져나가고 10여 대만 남아 있었다. 신우진이 주차장 가장자리 화단 쪽으로 붙어 걸었다.
회색 세단이 세 번째 줄 중간에 주차돼 있었다.
트렁크가 열려 있었다. 남성이 작은 가방을 싣고 있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체격. 검은 점퍼, 면바지. 병실 앞에서 봤던 그 사람이었다.
신우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모 앱을 열었다. 남성이 트렁크를 닫았다. 운전석 문을 열고 몸을 숙여 탑승했다. 테일램프가 붉게 켜졌다.
차량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번호판이 가로등 불빛에 드러났다.
신우진이 숫자를 타이핑했다. 뒷자리 넷. 7, 5, 0, 2.
회색 세단이 주차장 출구를 지나 후문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속도가 빨라지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는 움직임. 오히려 그 점이 더 노련해 보였다.
신우진이 메모를 저장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서는데 그림자가 다가왔다.
야간 약국 간판 불빛 아래 서 있던 여성이었다. 30대 중반. 짙은 색 코트, 손에 약국 봉투도 들지 않았다.
“박중호 씨 병실에 두 번 다시 혼자 오지 마십시오.”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신우진의 시선이 여성의 얼굴로 옮겨갔다.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았다.
“듣고 있는 사람이 병원 안에도 있습니다.”
여성이 한 걸음 물러섰다. 몸을 반쯤 돌리며 약국 옆 골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우진이 한 걸음 다가서자 여성은 이미 속도를 높였다. 병원 담벼락을 따라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 구두 굽 소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짧게 울렸다.
골목 입구까지 따라갔을 때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신우진이 발을 멈췄다. 손가락이 작업복 안주머니의 지퍼백 위치를 확인했다. 그대로 서서 골목 쪽을 3초간 더 응시하다가 정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