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42화

감사실 소회의실. 오전 9시 15분.

탁자 위에 A4 용지 묶음이 펼쳐져 있었다. 여섯 장. 엑셀 시트를 인쇄한 흑백 출력물이었다.

이지원이 첫 장을 신우진 쪽으로 밀었다.

“태흥컨설팅, 미래정책연구소. 각각 5천만 원씩 인출된 내역입니다.”

신우진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표에 날짜·시간·계좌번호 끝 네 자리만 찍혀 있었다. 인출 시각은 전날 밤과 오늘 새벽. 수취처는 비어 있었다.

“선거 캠프로 흘러가는 중입니까.”

“공식 후원 계좌로 들어가기 전 단계로 보입니다. 정치 후원금 회계 장부 초안을 확보했습니다.”

이지원이 두 번째 묶음을 탁자에 올렸다. 더 얇았다. 세 장. 상단에 ‘2024년 하반기 후원금 집행 계획(안)’이라는 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신우진이 페이지를 넘겼다. 지방 선거구 네 곳의 코드명이 적혀 있었다. 각 선거구 옆에 금액이 배정되어 있고, 마지막 장에 ‘철도공사 구매본부-지역 정책 연계 소요’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었다.

“어디서 났습니까.”

“활성화된 정보원 라인입니다. 유출 정황 확인 직후 접촉을 재개했습니다.”

이지원은 정보원의 신원을 말하지 않았다. 신우진도 묻지 않았다.

“윤태호가 직접 작성한 겁니까.”

“작성자는 양 보좌관입니다. 다만 결재선 예정란에 윤태호의 사번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신우진이 마지막 장을 탁자 위에 평평하게 폈다. 왼손 검지가 ‘태흥컨설팅’에서 ‘미래정책연구소’로, 다시 ‘지역 정책 연계 소요’로 이동했다.

“자금 세탁 구조로군요. 컨설팅비 가장. 선거법 위반입니다.”

“인출 시점이 감사 재개 하루 전입니다. 윤태호가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는 증거예요.”

신우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지원은 가방에서 작은 디지털 녹음기를 꺼내 탁자 옆에 뒀다.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증거 등록 절차 없이 녹음하는 건 감사 절차 위반이었다.

“공식 증거로 등록할 예정입니까.”

이지원이 잠시 멈췄다. 시계 밴드를 손가락으로 한 번 쳤다.

“고민 중입니다. 이 문서의 입수 경로를 기록하면 정보원이 노출됩니다. 등록하지 않으면 감사 보고서에 넣을 수 없고요.”

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원의 정보원 네트워크는 이미 한 번 뚫렸다. 배상호가 이중 스파이로 활동한 기간이 최소 3개월. 다른 정보원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윤태호는 지금쯤 감사 범위 확대를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이 장부는 그 예상보다 한 발 앞선 자료입니다.”

이지원이 가방에서 USB 메모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검은색 케이스에 흰색 라벨이 붙어 있었다. 라벨에는 연필로 ‘AU-2024-003 참고자료 #2’라고 적혀 있었다.

“장부 초안 스캔본입니다. 원본 인쇄물은 제가 보관합니다.”

신우진이 USB를 집어 작업복 안주머니에 챙겼다. 이지원이 탁자 위 스캔본 한 부를 신우진 쪽으로 밀었다.

“사본 하나 더 드립니다. 분석용으로.”

탁자 위에 장부 초안이 펼쳐져 있었다. 신우진이 오른손 검지를 첫 장 왼쪽 구석에 대고 천천히 밀었다. 이지원은 노트북을 열어 엑셀 원본 파일을 띄웠다.

“자금 흐름을 역추적하겠습니다.”

이지원이 첫 번째 항목을 읽었다.

“태흥컨설팅. 인출 시각은 전날 오후 11시 52분. 수취 계좌는 지방은행 지점 코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032.”

신우진이 사본 가장자리에 볼펜으로 ‘032’라고 적었다.

“지방은행 032 지점은 어디입니까.”

“확인해보겠습니다.”

이지원이 내부 인트라넷에서 지점 코드를 검색했다. 3초 만에 결과가 떴다.

“충남 서산 지점입니다.”

신우진이 두 번째 항목을 가리켰다.

“미래정책연구소. 오전 6시 14분 인출.”

“수취 지점 코드 041. 충남 당진입니다.”

신우진이 사본에 ‘서산’-‘당진’이라고 나란히 적었다. 두 지역은 인접한 선거구였다. 충남 제2선거구에 속했다.

“윤태호가 후원하는 후보가 있습니까.”

“공식 후원 내역은 없습니다. 다만 작년 지방선거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모 후보의 선거 캠프에 태흥컨설팅 직원이 파견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지원이 노트북 화면을 돌려 신우진에게 보여줬다. 공공기관 인사이동 기록과 민간 컨설팅 업체 파견 이력을 대조한 표였다.

“파견 직원. 파견 기간. 선거 캠프 위치가 모두 일치합니다.”

“패턴이 같군요.”

신우진이 엑셀 시트 맨 아래 줄을 가리켰다. ‘합계: 150,000,000원’이라는 숫자 옆에 작은 글씨로 ‘3분기 추가 배정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1억 5천만 원. 3분기에 또 같은 금액이 움직일 예정입니다.”

“정치 후원금 연간 한도를 우회하기 위해 분기별로 쪼갠 겁니다.”

이지원이 새 창을 열었다. 정치자금법 시행령. 개인 연간 후원 한도는 2천만 원. 법인은 1억 원. 윤태호는 법인 두 곳을 이용해 한도를 회피하고 있었다.

“역감사 준비 정황도 보입니다.”

이지원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회계 재정비 일정’이라는 소제목 아래 3개월짜리 타임라인이 그려져 있었다.

“외부 회계법인 선임 예정일이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감사실의 정치 후원금 추적이 시작되기 전에 회계 장부를 정리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신우진이 사본 옆에 메모를 적었다. ‘회계법인 선임 — 월요일. 가동 전 차단 필요.’

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 장부가 증명하는 건 자금 흐름만이 아닙니다. 윤태호가 감사 재개를 예상하고 선제 대응 중이라는 사실 자체가 방증입니다.”

이지원이 노트북을 닫았다.

“등록 시점을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 등록하면 정보원이 위험해집니다. 늦추면 증거 가치가 희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우진이 서류를 정리했다. 사본을 반으로 접어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USB는 이미 들어 있었다.

“결정은 이 쪽에서 하십시오. 제 의견을 말하면, 일단 분석부터 끝내고 등록 여부를 판단하는 게 낫습니다. 증거가 불완전한 상태로 등록하면 오히려 역공당할 빌미를 줍니다.”

“동의합니다.”

이지원이 탁자 위에 남은 사본 한 부를 서류 봉투에 넣어 가방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지원이 시계를 보지 않고 손목을 한 번 돌렸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신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정보원 라인에서 추가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윤태호의 왼쪽 턱 흉터에 관한 겁니다.”

신우진의 오른손이 펜 위에 멈췄다.

“흉터가 7년 전 폭력 사건과 관련 있다는 소문입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증거가 없습니다. 목격자 진술도, 의료 기록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7년 전. 부품 결함 은폐가 시작된 시기와 겹칩니다.”

“네. 우연이라고 보기엔 시점이 일치해요. 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더 깊이 파고들 수는 없었습니다.”

신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 짧은 선을 그었다. 이지원은 그 손끝을 잠시 바라봤다.

“흉터 이야기는 지금 단계에서 공식 루트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증거가 없는 정보는 감사 보고서에 실을 수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의 노트북을 접어 가방에 넣고, 녹음기를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오늘 중으로 장부 분석을 마치겠습니다. 외부 회계법인 선임 전까지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신우진도 일어나 의자 등받이를 밀었다.

“한 가지 더.”

이지원이 가방 끈을 어깨에 걸며 말했다.

“윤태호가 감사 범위 확대를 막기 위해 행정 절차를 이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양 보좌관을 통해 조사 범위 확대 지연을 요청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얼마나 벌 수 있습니까.”

“길면 2주입니다. 그 안에 정치 후원금 라인을 증거화하지 못하면 역감사가 먼저 시작될 겁니다.”

신우진이 소회의실 문을 열었다. 복도 저편에서 감사실 직원 한 명이 서류를 들고 지나갔다. 이지원이 신우진보다 한 발 앞서 복도로 나갔다.

“기다리던 결과가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립니다.”

신우진이 복도를 걸어갔다. 작업복 안주머니 속 USB가 걸을 때마다 가볍게 허벅지를 쳤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는 접은 사본이 들어 있었다.

이지원이 소회의실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만 복도에 남았다.

오전 11시 10분. 복도 끝 503호.

신우진이 문을 열자 박중호가 침대에서 눈만 움직였다. 산소 포화도 측정기가 규칙적인 신호음을 냈다. 침대 옆 모니터에 심박수가 떠 있었다.

“왔냐.”

박중호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더 잠겨 있었다. 왼손 붕대가 갈려 있었고 오른발 부목은 그대로였다. 침대 머리맡 테이블 위에 물컵과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신우진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윤태호가 역감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역감사.”

“정치 후원금 회계 장부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선거 캠프 쪽과 조율 중이라는 정보까지 나왔습니다.”

박중호가 천장을 보며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측정기 신호음이 2초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

“감사실 내부에서 새는 정보를 받고 움직이는 겁니다. 이미 대영정밀기계 쪽도 정리했고요. 팀장님 금고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아직 못 열었나.”

“법무팀이 막고 있습니다. 감사실 정식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박중호가 몸을 돌려 침대 옆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붕대 감은 손가락이 서랍 손잡이를 더듬었다.

“열쇠.”

신우진이 일어나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 작은 플라스틱 케이스가 있었다. 박중호가 턱짓했다.

“거기.”

신우진이 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은색 납작 열쇠 한 개. 열쇠 고리에는 손글씨로 ‘PJH-사택’이라고 적힌 라벨이 붙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꺼내라. 금고 밑판 열면 보고서 원본 있다.”

“알겠습니다.”

“사택 출입은 경비실에 말해놨다. 정비팀장 자택 점검 명목으로 들어가면 된다. 누가 뭐라 해도—”

박중호가 기침을 했다. 마른 기침이었다. 측정기 신호음이 다시 빨라졌다. 신우진이 물컵을 건넸다. 박중호가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네가 직접 가져라. 감사실에 넘기기 전에 사본은 따로 떠두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윤태호 새끼가 역감사면, 너부터 물 거다. 청문회 열리면 증인으로 세우려 들 거야.”

“예상하고 있습니다.”

박중호가 고개를 돌려 신우진을 똑바로 봤다. 검은 눈이 피로 속에서도 초점을 잃지 않았다.

“버틸 수 있겠나.”

신우진이 열쇠를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버티는 건 제 일입니다.”

박중호가 피식 웃었다. 웃다가 붕대 감은 손목을 움찔했다.

“그래. 네 일이지.”

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중으로 사택 갑니다.”

“늦지 마라.”

박중호가 눈을 감았다. 산소 포화도 측정기 신호음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돌아왔다. 심박수 모니터 숫자가 천천히 내려갔다.

신우진이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는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쪽 CCTV 아래로 간호사 한 명이 지나갔다. 신우진이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1층 로비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연결됐다.

“이지원입니다.”

“윤태호 흉터 건. 감사실 기록 전면 검토해줄 수 있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흉터라면, 왼쪽 손목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언제, 어떤 사고로 생긴 건지. 공식 기록이 있는지.”

“알겠습니다. 인사 기록과 안전사고 보고서를 교차 검색해보겠습니다.”

“바로 시작해주십시오.”

“지금 사무실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도착하면 먼저 안전관리팀 사고 기록 DB부터 열겠습니다.”

신우진이 계단을 내려가며 열쇠를 한 번 쥐었다. 금속이 손바닥에 차갑게 눌렸다.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하겠습니다.”

이지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마지막 음절이 평소보다 빨랐다. 신우진이 통화를 종료하고 로비로 나섰다.

자동문 밖으로 오전 햇살이 길게 깔려 있었다. 주차장 반대편에서 구급차 한 대가 사이렌 없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신우진이 안주머니를 한 번 두드렸다. 열쇠의 무게가 느껴졌다.

박중호가 몸을 돌려 침대 옆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붕대 감은 손가락이 서랍 손잡이를 더듬었다.

“열쇠.”

신우진이 일어나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 작은 플라스틱 케이스가 있었다
무정차 통과4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