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43화

오전 9시 15분. 철도공사 본사 인사기록실.

이지원이 열람 신청서를 접수 창구에 밀어 넣었다. 기록담당자가 서류를 받아 들고 줄을 훑었다.

“이철규 전 기획조정실장. 20년 전 인사철이군요.”

“연결된 내부 보고서 결재문서도 같이 열람하겠습니다.”

기록담당자가 모니터를 확인했다. 키보드를 몇 번 두드렸다.

“해당 문서는 인사철과 별도 보관 중입니다. 규정상 결재문서는 기록관리팀 서고에서 불출해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한 시간 정도. 열람석에서 기다리시면 준비되면 호출하겠습니다.”

이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담당자가 신청서 하단에 접수 도장을 찍었다. 이지원이 열람석으로 향했다.

창 없는 방. 모니터 네 대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다른 이용자는 없었다. 이지원이 맨 안쪽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공공기관 퇴직자 인사이동 기록 조회 화면을 띄웠다.

저장된 와이파이에 자동으로 접속되면서 화면이 푸르게 밝아졌다. 그녀 손가락이 터치패드를 두 번 쓸었다. 로그인 창이 떴다.

사원 번호와 사번을 치자 화면이 열렸다. 내부망 메인 화면에서 인사기록 열람 메뉴로 진입하는 경로를 세 번 클릭만에 찾았다. 좌측 메뉴 트리에서 ‘퇴직자 정보’를 펼치고 고급 검색으로 들어갔다.

검색 조건에 연도와 부서명을 입력했다. 엔터를 치기 직전 손끝이 키캡 위에 멈췄다가 살짝 눌렀다. 화면이 깜빡이고 검색 결과가 테이블로 떴다.

스크롤을 미세하게 내리는 그녀의 집게손가락 움직임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일부러 천천히 내렸다. 왼쪽 손목의 메탈 시계를 한 번 톡 쳤다. 보온병을 가져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시계 초침이 디지털 눈금을 갉아먹는 소리가 귀에 달라붙었다. 실내는 공조기 소리만 낮게 울렸다. 그 소리 아래로 형광등의 고주파음이 한 겹 덧대어졌다.

이지원이 손목을 뒤집어 시계 페이스를 확인하려다 동작을 멈췄다. 검은 액정 화면에 숫자가 떠오르자마자 손가락을 거두었다. 시간을 확인하는 행위 자체가 기다림을 길게 만들었다.

그녀는 허벅지 위에 손을 포개었다. 왼손 검지 끝으로 오른손 손등의 정맥 푸른 선을 따라 한 번 그었다. 피부 결이 손톱에 걸리는 감촉이 작았다.

복도 쪽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났다가 멀어졌다. 바닥 타일을 스치는 고무 밑창 소리였다. 이지원은 다시 시계를 쳐다보지 않았고, 대신 눈을 들어 벽면의 소화기 위치를 확인했다.

출입구 오른쪽. 열람석 의자 열두 개 중 일곱 번째 등받이에는 누군가 놓고 간 A4 용지 한 장이 반쯤 걸쳐져 있었다. 뒷면이 위로 향해 있었고, 형광등 빛을 받아 희게 말려 올라간 구석이 그림자를 접고 있었다.

그녀는 그 종이가 신경 쓰여 시선을 거두고 모니터 네 대의 검은 화면을 차례로 훑었다. 전부 절전 모드였다. 그녀의 왼쪽 어금니가 입술 안쪽 점막을 약하게 눌렀다가 풀렸다.

공기가 건조해서 목젖이 간질거렸다. 가방에 손을 넣어 목캔디를 찾으려다, 기록실 안에서는 음식물이 금지라는 안내판을 본 기억이 나서 동작을 접었다. 보온병을 가져왔다면 뚜껑에 물을 따라 입 안을 축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침을 삼켰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목구멍 안에서 작게 났다. 시계를 다시 보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갈비뼈가 조끼 안쪽에서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복도 저편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알림음이 벽을 타고 흘러왔다.

10시 20분. 기록담당자가 서류 봉투를 들고 왔다.

“사본 발급은 불가합니다. 필사만 허용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기록담당자가 봉투를 건네고 돌아갔다. 이지원이 봉투를 열었다. 크림색 서류철. 표지에는 '기획조정실-감사연계-98-042'가 찍혀 있었다.

인사철부터 펼쳤다.

이철규. 당시 기획조정실장. 1998년 4월 23일자로 좌천 발령. 사유란에는 '내부 감사 절차 위반 및 허위 보고'라고 적혀 있었다. 발령지는 지방 차량기지 관리소.

이지원의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허위 보고.

그녀가 수첩을 꺼냈다. 인사철 하단의 결재 라인을 옮겨 적었다. 인사 발령 기안자는 당시 총무국장. 결재자는 사장 직인. 그 위에 검토자 한 명이 더 있었다.

구매본부장.

이지원이 두 번째 서류를 펼쳤다. 내부 보고서 결재문서. 문서 번호는 PC-1998-042. 제목은 '대한부품산업 납품 부적합 보고 및 재검증 요청'.

이지원의 호흡이 멈췄다.

대한부품산업.

21년 전에도 그 회사였다. 부적합 판정을 받고도 납품 계약이 유지됐다. 아버지는 이 보고서로 재검증을 요청했고, 그 뒤로 좌천됐다.

결재 라인을 따라 손가락을 내렸다.

첫째. 기안자: 기획조정실장 이철규. 둘째.

검토자: 감사실장 김재원. 셋째. 승인자: 구매본부장 박동수.

이지원이 수첩에 세 이름을 적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조용한 열람실에 울렸다.

노트북으로 인사이동 기록을 조회했다.

감사실장 김재원. 2001년 정년 퇴직. 이후 공공기관 감사 자문위원으로 3년 활동. 현재는 개인 사무소 운영 중. 연결 고리 없음.

구매본부장 박동수.

이지원의 손가락이 키보드에서 멈췄다.

화면에 퇴직자 인사이동 내역이 떠올랐다. 박동수. 2002년 퇴직.

2004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철도산업협회 부회장. 2013년 민간 컨설팅 법인 '태산경영연구원' 설립. 그리고—

2022년 6월부터 현재까지. 대한부품산업 주식회사. 등기이사 겸 경영고문.

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등을 의자에 붙이고 화면을 다시 읽었다.

의자 등받이가 그녀 척추 곡선을 따라 딱 붙었다. 허리 쪽에 체중이 실리면서 허리 근육이 가라앉는 느낌이 먼저 왔고, 그다음에 둔부에 깔린 방석의 메모리폼이 천천히 복원되는 압력이 전달되었다. 등을 기대는 동작으로 체온이 등받이 인조가죽으로 옮겨 붙어 약간 따뜻해졌다.

그녀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각막이 건조해서 깜빡일 때마다 눈꺼풀이 살짝 달라붙었다. 모니터 픽셀들이 흰 바탕에 검은 활자로 박동수라는 이름을 띄우고 있었다.

그 이름 석 자가 망막에 남아 화면 밖 여백에서도 잔상처럼 맴돌았다. 이지원이 오른손 중지로 자기 쇄골 끝을 한 번 만졌다. 옷깃 바로 안쪽.

피부 온도가 손끝에 잡혔다. 그녀가 들이마신 숨이 코 안에서 좁게 소리를 냈다. 들숨과 날숨 사이 공백이 평소보다 길었다.

그 공백 동안 공조기 바람이 그녀 목 뒤로 지나갔다. 의자 팔걸이에 얹은 왼쪽 팔뚝의 소매에 실내 먼지 한 올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걸 쳐다보지도 털어내지도 않았다.

대한부품산업. 윤태호가 구매처 과장으로 있던 7년 동안 계약을 따낸 바로 그 납품사. TH-1187을 KD-2037로 모델명만 바꾸어 납품하던 곳. 대영정밀기계와 함께 B4 계열을 독점 공급하던 업체.

그 회사의 고문이, 20년 전 아버지의 보고서를 묵살한 결재자였다.

이지원이 수첩의 빈 칸에 적었다.

'박동수. 前 구매본부장. 現 대한부품산업 경영고문. 2022년 6월~현재.'

그녀가 펜을 내려놓고 결재문서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결재란 하단에 세 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감사실장, 구매본부장, 그리고 기획조정실장의 서명.

날짜는 1998년 4월 15일.

좌천 발령은 4월 23일.

보고서 상신 8일 만에 좌천이 결정됐다. 보고서는 묵살됐고, 보고자는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20년 뒤, 그 보고서를 묵살한 사람이 같은 회사의 고문으로 앉아 있다.

이지원이 결재문서 전체를 수첩 옆 페이지에 필사하기 시작했다. 결재 라인. 날짜. 문서 번호. 직인 위치.

기록담당자가 다가왔다.

“열람 시간 10분 남았습니다.”

“사본 발급을 요청합니다.”

“해당 문서는 감사 목적 공문이 있으면 발급 가능합니다. 감사실 공문을 제출하시겠습니까.”

“제출하겠습니다.”

기록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이지원이 휴대폰을 꺼냈다. 감사실 공문 양식을 열었다. 열람석 모니터로 내부 전산망에 접속했다. 감사실장 직인 전자 결재 경로를 띄웠다.

사유를 적었다.

'AU-2024-003 관련 증거 보강. 1998년 동일 납품사 부적합 보고서 결재 라인 확인 필요.'

발송 3분 만에 감사실장의 승인 회신이 떴다. 전자 직인이 찍혔다. 이지원이 승인 화면을 기록담당자에게 보여줬다.

“가능합니다. 20분 후 사본 드리겠습니다.”

기록담당자가 화면을 확인하고 복사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복사기가 예열되는 동안 담당자가 서류 봉투를 열고 보고서 장수를 하나하나 세는 소리가 났다. 종이 귀퉁이가 책상 모서리에 닿으며 경쾌하게 톡톡거렸다. 이지원이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복도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사기 내부에서 광원이 지나가는 소리와 롤러가 회전하는 진동이 벽을 통해 그녀의 어깨뼈에 닿았다.

이지원이 열람석으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 벽에 기대섰다. 팔짱을 끼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수첩 표지를 두드렸다.

아버지의 보고서 원본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재문서만이 존재를 증명했다. 그 결재문서의 승인자는 현재 윤태호의 납품사 고문이었다.

연결고리는 단순했다. 20년 전 묵살된 보고서. 7년간 유지된 납품 계약.

동일한 납품사. 동일한 결함 패턴. TH-1187에서 KD-2037로 모델명만 바뀐 부품.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항상 한 사람이 있었다. 박동수.

20분 뒤 사본이 도착했다. 이지원이 서류를 가방에 넣고 인사기록실을 나섰다. 복도 너머로 감사실 사무실이 보였다.

점심시간이었다.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이지원이 자기 책상으로 걸어갔다.

모니터 두 대가 절전 모드로 깜빡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어제 복사한 정치 후원금 장부 초안이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감사실 내부 조사 파일은 서랍 안이었다.

이지원이 가방에서 결재문서 사본을 꺼냈다. 표지에 '증거자료 AU-2024-003-별첨'이라고 펜으로 적었다. 감사실 서류 캐비닛으로 걸어가 잠금을 풀었다.

AU-2024-003 파일 철을 꺼냈다. 목록 페이지를 펼쳐 새 항목을 추가했다.

'별첨 12. 1998년 대한부품산업 납품 부적합 보고서 결재문서 사본. 발굴자: 감사관 이지원. 등록일: 오늘.'

결재문서 사본을 파일에 끼웠다. 철을 닫아 캐비닛에 넣었다. 자물쇠를 잠갔다.

그녀가 책상에 앉아 휴대폰을 집었다.

신우진의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내일 아침 회의 전 10분. 감사실 소회의실. 1998년 결재 라인에서 현재 윤태호 납품사 고문 연결 확인. 검토 요청.'

전송.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고 결재문서 사본의 첫 장을 펼쳤다. 결재란의 직인 세 개를 다시 살폈다.

빛이 모자랐다. 서랍에서 확대경을 꺼냈다.

감사실장 직인. 날짜 1998년 4월 15일. 선명했다.

구매본부장 직인.

이지원이 확대경을 가까이 댔다.

직인의 날짜가 4월 14일이었다.

그녀가 결재문서 상단의 기안일을 확인했다. 1998년 4월 15일 오전 10시 30분.

기안일보다 하루 앞선 직인.

구매본부장의 결재는 보고서가 상신되기 전에 미리 찍혀 있었다.

이지원이 확대경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녀의 왼쪽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무정차 통과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