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무정차 통과

44화

오전 9시 15분. 감사실 소회의실.

이지원이 테이블 위에 수첩을 펼쳤다. 어제 인사기록실에서 필사한 결재자 명단. 그녀가 손가락으로 세 번째 이름을 짚었다.

“박동수. 1998년 당시 구매본부장.”

신우진이 이름을 응시했다. 이지원이 수첩을 한 장 넘겼다. 공공기관 경력정보 조회 결과가 적혀 있었다.

“2002년 퇴직. 2022년 6월부터 대한부품산업 등기이사 겸 경영고문.”

“대한부품산업.”

신우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윤태호 본부장의 현 납품사입니다.”

“같은 회사다.”

신우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른손 검지가 테이블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이지원이 수첩을 덮었다.

“아버지가 상신한 보고서는 묵살됐습니다. 결재 라인 중 한 사람이 현재 윤태호 쪽 고문입니다. 20년 전 부적합 판정을 받은 납품사에 현재 재직 중이고.”

“보고서 원본은.”

“인사기록 담당자가 결재문서만 찾았습니다. 보고서 자체는 편철되지 않았어요.”

신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은 남겼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지원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왼쪽 눈썹이 올라가지 않았다.

“결재문서 사본은 확보했습니다. 결재란에 이상이 있어요. 구매본부장 직인 날짜가 기안일보다 하루 앞서 있습니다.”

“4월 14일.”

“네.”

신우진의 검지가 멈췄다.

“보고서 상신 전에 결재가 준비돼 있었다는 뜻이군.”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지원이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아버지 보고서 원본 위치를 추적하겠습니다. 당시 감사실장 김재원도 컨택할 거예요. 2001년 퇴직했지만.”

“그 보고서가 20년 전과 지금을 잇는 연결점일 겁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이지원이 일어섰다. 신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화면에 10시 20분이 표시됐다.

“병원 다녀오겠습니다. 박 팀장님 퇴원 수속입니다.”

“진단서 봉투 잊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신우진이 소회의실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서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복도 창문 너머로 차량기지가 보였다. 붉은 경고등은 꺼져 있었다.

오전 10시 40분. 서울중앙병원 503호.

병실 문이 열려 있었다. 침대 시트는 정리됐고 개인 사물함은 비어 있었다. 박중호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른손에 서류 봉투 하나를 쥐고 있었다. 발목 보호대는 벗겨져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신우진이 들어섰다.

“퇴원 언제십니까.”

“수속 끝났다.”

박중호가 손에 든 봉투를 들어 보였다.

“사물함 정리하다 넣어둔 건데.”

봉투를 신우진 쪽으로 내밀었다.

“자네가 가져가야 할 것 같아.”

신우진이 봉투를 받았다. 만져보니 진단서 여러 장 사이에 다른 것이 끼워져 있었다. 종이의 질감이 달랐다. 더 두꺼웠다.

“뭡니까.”

“열어봐.”

신우진이 봉투를 열려는 손을 멈췄다.

“팀장님, 이거 언제.”

“어젯밤. 병실 불 끄고 사물함 정리하다 보니까 있더군. 작년 11월에 넣어둔 거야.”

작년 11월. B4 계열 검수 기록이 삭제된 시점이었다.

박중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디지털 기록 날리기 전날 프린터에서 뽑아둔 거다. 누가 삭제 명령을 내릴지 몰랐지만, 내릴 거란 건 알고 있었어.”

“누군지 아셨습니까.”

“배상호.”

박중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삭제 명령 내린 놈은 윤태호지만, 실행한 놈은 배상호. 난 그때까진 정보원인 줄도 몰랐다.”

신우진이 봉투를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팀장님, 퇴원 후 어디로.”

“사택으로 간다. 금고 정리도 해야 하고.”

“조심하십시오.”

박중호가 피식 웃었다. 웃을 때 오른쪽 귀 뒤 흉터가 살짝 당겨졌다.

“걱정 마라. 이제 놈들도 날 건드리면 역풍 맞는다. 노조가 붙었고, 감사실이 움직인다.”

“그래도.”

“내 걱정 말고 그 출력본이나 제대로 써먹어.”

박중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왼손으로 지팡이를 짚었다.

“내 사무실에 오늘 오후 늦게 들를 거면 연락해라. 금고 정리할 때 자네도 와.”

“알겠습니다.”

신우진이 병실을 나섰다.

복도 끝 창가에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신우진이 걸어가 앉았다.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열었다. 진단서 세 장이 먼저 나왔다. 진단명, 입원 기간, 통원 치료 계획.

그 아래 접힌 A4 출력본이 있었다.

신우진이 종이를 펼쳤다.

상단 인쇄 일자. 작년 11월 12일 오후 10시 43분. 삭제 실행일은 11월 13일 오전 2시 14분이었다.

출력본 제목. ‘TH-1187 로트 검수 기록 원본 — B4 계열 제동 패킹’

표가 있었다. 총 7개 부품의 시험 항목별 수치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신우진이 첫 번째 부품 번호를 읽었다. KD-2037-114와 형식 번호는 다르지만, 형상 치수는 동일했다.

중량. 디지털 조작 후 데이터는 규격 범위 내로 기록돼 있었다. 출력본의 수치는 상이했다. 중량이 규격 상한을 0.7그램 초과했다. 인장 강도도 허용오차를 2.1뉴턴 벗어나 있었다.

패킹 재질 난. 디지털 기록에는 HNBR로 기입돼 있었다. 출력본에는 달랐다. 검수자 코멘트 난에 ‘EPDM 혼합재 의심’이라고 수기로 적혀 있었다.

신우진이 테이블의 마지막 줄을 응시했다.

열 번호. 피로 한계. 허용오차 +0.03mm 초과.

그 수치 옆에 박중호의 필체가 있었다. 진한 검정 매직 글씨.

“이 부품, 9년 전 그때와 같은 패턴이다.”

신우진이 출력본을 접었다. 손끝이 정확히 접히는 선을 따라 움직였다. 접은 종이를 다시 봉투에 넣고 외투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지원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 두 번. 연결됐다.

“신우진입니다.”

이지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출력본 확보하셨나요.”

“했습니다. 병원 로비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신우진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TH-1187 원본 검수 수치입니다. 디지털 삭제 하루 전 출력된 물리적 문서. 중량, 인장 강도, 패킹 재질 모두 조작 전 수치가 남아 있습니다.”

“재질은 뭡니까.”

“EPDM 혼합재 의심. 디지털에는 HNBR로 돼 있는데, 검수자가 수기로 코멘트 남겼습니다.”

잠시 침묵.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철도안전법 시행령 부칙 제14조 기억하십니까.”

“부품 시험 성적서 보존 책임 조항입니다.”

“네. 그 조항이 디지털 기록과 물리적 원본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아요. 출력본의 법적 증거력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우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해석이 엇갈린다는 건, 우리 쪽 해석도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법무팀에 검토 의뢰하겠습니다. 그런데 신 과장님, 하나 더 확인해주십시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신우진이 들어서며 말했다.

“뭡니까.”

“출력본 마지막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신우진이 잠시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박 팀장님 필체입니다. ‘이 부품, 9년 전 그때와 같은 패턴이다.’”

이지원의 침묵이 길어졌다. 3초. 수화기 너머로 숨소리만 들렸다.

“기록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신우진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억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록을 남깁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병원 로비의 밝은 빛이 쏟아졌다.

수화기 너머 이지원이 말했다.

“법무 검토 들어가겠습니다. 출력본은 감사실로 가져오십시오.”

“곧 갑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신우진이 로비로 걸어 나왔다. 오른손이 외투 안주머니 위를 가볍게 눌렀다.

접힌 출력본의 무게가 손끝에 느껴졌다.

무정차 통과44화